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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동궁과 월지 풍경. 1350여 년 전 이곳엔 신라의 왕이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던 임해전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된 동궁과 월지 풍경. 1350여 년 전 이곳엔 신라의 왕이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던 임해전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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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황리단길과 대릉원, 첨성대를 거쳐 인왕동에 이르면 국립경주박물관 맞은편에 위치한 동궁과 월지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오래된 미래'라 불러도 좋을, 1천 년 저편에서 빛나는 고대 왕국 신라가 영화를 누렸던 흔적이 2022년을 사는 여행자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한 600년 전쯤엔 오늘날 우리가 그랬듯 조선시대의 명문장가가 이곳을 찾았던 모양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시습(1435~1493). '매월당'이란 호로 더 유명한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 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해 다섯 살 때는 시를 지을 줄 아는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문집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렸다.
 
안하지(安夏池) 옛 터

못을 뚫어 물을 채우니 물고기 소라 자라고
물길을 당겨 중심에 대니 콸콸 흐르네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
지금은 봄물로 좋은 벼가 자라나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간행한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 왕경 경주>에 따르면 김시습은 21세 때인 세조 원년(1455년) 숙부가 조카를 죽인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절망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전국을 떠돌았다.

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산천을 보며 글을 짓고 시를 썼던 그는 지금의 경주 남산 인근에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한 적이 있다. 은둔의 예술가로 살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7년간 머물며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 김시습은 경주 일대 명승고적을 돌아보면서 시 또한 많이 지었다고 한다.

신라 왕과 귀족, 외국 사신들의 '놀이 공간'?

세월의 무상함과 폐허 위에 남겨진 기억의 파편을 형상화한 듯 보이는 '안하지 옛 터'는 현재의 동궁과 월지를 지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시에서 '못'은 월지를 말한다. '안하지'는 안압지(월지의 옛 명칭)의 다른 이름이다.

김시습의 '안하지 옛 터' 중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라는 3행은 의미심장하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놀이'는 유학자가 지양해야 할 행위다.

동궁과 월지가 웅장한 모습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던 신라시대엔 '놀이'를 하다가 '나라를 잃은' 공간이 있었다는 이야기일까? 김시습의 시에 쓰인 '놀이 공간'은 임해전(臨海殿)을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

임해전은 국가에 경사스런 일이 있이 있거나, 멀리 이방에서 귀빈이 방문했을 때 왕과 신하들이 연회와 접대장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 건축물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만든 책 <신라의 통치제도>에서 역사학자 주보돈은 월지와 동궁, 임해전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월지는 궁 바깥이 아니라 궁 안에 존재한 연못이었다. 거기에는 주요 건물로서 임해전이란 부속 건물을 세워 국왕 주도의 연회나 외국 사신 접대를 거행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월지는 본래부터 동궁의 부속 건물이 아니었다. 동궁보다 먼저 건설된 점도 그를 방증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동궁에 소속한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동궁은 월지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는지, 동궁의 부속 건물이었는지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하지만, 임해전이 왕이 신하와 사신들에게 베푼 잔치가 열린 곳이라는 주장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시 임해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삼국시대 신라의 안압지 서쪽에 있었던 궁궐 건물이다. 안압지, 곧 월지가 있던 궁성은 태자가 거처하던 동궁이 된다. 673년에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이 임해군공(臨海郡公)의 작호를 지녔던 점을 생각할 때 임해전은 곧 김인문의 처소이거나 본디 그와 관련된 건물이 아닌가 짐작된다. 안압지를 끼고 있는 임해전은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나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군신들의 연회 및 귀빈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임해전은 867년(경문왕 7년) 1월에 중수되었다. 이는 경문왕이 자신의 왕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라 하겠다. 1970년대 중반에 발굴·조사된 유적은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융성 흔적 증명해줄 임해전의 위치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커다란 연못 위에 배를 띄우고, 귀한 꽃과 희귀한 동물이 뛰어놀게 만든 월지에서 나라의 최고위층과 외국 왕을 대신한 사절단이 좋은 술과 안주를 나눴던 공간으로 추정되는 임해전.

화려한 잔치가 펼쳐지던 그때가 '신라의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이후 신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번영을 누렸고, 임해전은 그 번성의 한복판에서 환히 웃는 사람들의 파티 장소로 역할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랬다. 옛사람들도 현대인과 다르지 않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의 인간)였다.

김시습은 신라가 멸망한 수백 년 뒤에 이곳을 찾아 그림자조차 사라진 임해전의 번성기 모습을 그려봤을 것이다. 존재와 소멸 사이의 간극을 아프게 되새기며, 그때는 이미 논으로 변한 과거 왕국의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을 듯하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600여 년 전 김시습이 추억했고, 2021년 우리가 그 흔적을 더듬어 반추하는 임해전은 처음 만들어질 땐 어디쯤 세워진 것일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서 이 의문을 풀어줄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월지는 경주시 인왕동, 월성 동북 쪽에 있다. 주위는 평탄지로 광활하고 논밭으로 되어 있으며 남서쪽에 월성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막고 있다. 발굴되기 이전 월지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져 있고, 동과 북쪽 연못 변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솟아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 연못 동쪽 호반 변에는 1926년에 건립된 '임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연못 서쪽 평탄지에는 임해전지라고 생각되는 동서 지점의 지상에 화강석의 석구(石溝)가 노출돼 있어 대규모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임해전은 월지의 평탄지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는 좀 더 범위를 좁혀 임해전의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압지와 주변 지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문무왕대 세워진 동궁(월지궁)과 주요 관청이 있던 곳으로 동궁을 세우기 전에 먼저 못을 파서 원지(園池·정원과 연못)을 만들고(674년) 그 후에 동궁을 축조(679~680)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궁 안에는 국가 대사와 관련해 안압지를 바라보며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 안에 자리한 안압지(월지)를 마주하고, 왕과 국빈이 잔치를 열었던 건물'인 임해전. 보다 정확한 위치 파악을 위해선 앞으로도 역사학계와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지 않을까.
 
드론으로 촬영한 동궁과 월지 터.
 드론으로 촬영한 동궁과 월지 터.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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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관련 기록들

임해전은 신라의 전성기는 물론, 쇠퇴기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실물 키워드'이기도 하다.

1145년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령으로 편찬한 기전체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엔 고려 건국 직전에 존재했던 신라 왕조에 대한 기록이 세세하게 남겨져 있다. 여기엔 임해전 관련 기록도 여럿이다.

효소왕 6년 9월(697년)과 혜공왕 5년 3월(769년)엔 "왕이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소성왕 2년 4월(800년)을 다룬 대목에선 "거센 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갔으며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됐다"는 역사가 실렸다. 그 외에도 "문성왕 9년 2월(847년)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다.

보다 흥미로운 기록은 "헌강왕이 임해전에서 직접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는 서술과 신라가 기울어가던 경순왕 5년 2월(931년)엔 "태조(왕건)를 임해전에서 극진하게 예우하며 접대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기록들엔 고대 왕의 인간적 면모와 떠오르는 왕조(고려) 앞에 머리 숙인 저무는 왕조(신라)의 비애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런 걸 감안하면 임해전은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닌 신라의 흥망을 지근거리에서 가장 정확하게 지켜본 주요한 역사 유물로 평가돼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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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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