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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월지 발굴조사 초기의 모습을 담은 사진.
 1975년 월지 발굴조사 초기의 모습을 담은 사진.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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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에드워드 카(Edward Carr·1892~1982)는 말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대화'란 무엇인가. 소통을 위한 노력과 다름없을 터. 과거와 현재의 인간이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학습이 필요하다. 그 역할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현대인들의 몫이다.

1천 년이란 아득한 시간 너머에 존재했던 신라의 역사에 관해 제대로 '대화'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 시대를 통찰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연구와 학습이다.

'발굴'은 이 연구와 학습의 매우 중요한 방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사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신라사 총론>은 발간사를 통해 과거 신라인들과 대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사서의 편찬은 단순한 과거의 정리가 아니다. 그것을 통해 위대한 민족사의 한 부분을 정리하고, 민족자존을 되찾고,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더불어 아래와 같은 이야기로 오늘날 신라 역사 찾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해왔지만 변치 않는 역사의 가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어 미래의 우리 삶을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지혜일 것이다. 이미 신라는 오래전 사라진 나라지만, 우리는 그 역사와 문화를 통해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 역사와 문화를 찾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혼을 찾는 일이다."

이런 인식은 에드워드 카의 역사에 관한 정의와 맥락이 닿아있고, 역사 공부의 중요성은 한국과 영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려준다.

'신라인과의 대화'를 위해 시작된 동궁과 월지 발굴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 왕과 귀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라 건축과 미술의 아름다움을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온 유적 동궁과 월지의 발굴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을까?

신라인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한 현대인들의 노력이 출발된 시기를 '시사상식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있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안압지의 서편에는 임해전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포함하여 26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해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못 바닥에서 당시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2만4천여 점의 전돌과 기와, 쇠스랑·호미·낫·작살·화살촉 등의 철제 도구들이 다량 출토됐다. 특히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紀年銘)은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실체가 일부 규명돼 작은 모형으로 복원된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를 통해 실체가 일부 규명돼 작은 모형으로 복원된 동궁과 월지.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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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의 길잡이-경주>편은 여기에 아래와 같은 부연을 덧붙인다. 이를 통해 동궁과 월지 축조와 발굴 사이에는 1300여 년의 간극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대의 발굴 조사를 토대로 2011년 7월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 천년의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통일 시기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통일 직후 674년에 동궁과 월지를 만들었으며, 679년에는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고 여러 개의 대문이 있는 규모가 큰 동궁을 새로 건설하였다. 동궁을 비롯한 궁궐이 있던 안압지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동궁과 월지와 주변의 건축지들은 당시 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 동궁, 곧 임해전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건물터의 초석만 발굴됐다."

멀고 먼 세월 저편 고대 왕국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것을 연구함으로써 당대의 모습을 해석해 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들을 해낸 사람들의 수고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발굴'의 사전적 의미는 땅속이나 큰 덩치의 흙, 돌무더기 따위에 묻혀 있는 것을 찾아서 파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유적과 유물의 발굴'에는 이런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담겼다.

동궁과 월지 발굴에 참여했다는 건 시간을 초월해 과거의 신라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대화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했다는 게 아닐까? 그러한 노력이 천년왕국 신라의 실체를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했을 것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발굴 통해 향후 연구 과제 찾아내

2020년 10월 발행된 <못 속에서 찾은 신라>는 1975년 동궁과 월지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어 주목받았다.

학술연구서의 하나로 이 책을 만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은 다음과 같은 말로 동궁과 월지 발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75년은 신라 왕경과 통일신라 연구에 있어 획기로 남을만한 중요한 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연못지 발굴조사인 안압지(월지) 발굴조사가 시작된 해이기 때문이다. 안압지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는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많은 양의 와전류, 목기류, 금속류 등의 출토 유물은 현재까지도 신라왕경 연구에 뺄 수 없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문서목간과 더불어 건축사 연구에 있어 한 획을 그을만한 신라시대 건축부재도 다양하게 출토돼 고고학뿐만 아니라 문헌·건축·보존 연구에 큰 영감을 가져다준 발굴조사이기도 했다."

<못 속에서 찾은 신라>엔 당시 발굴에 참여한 학자와 조사원들이 전해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다수 담겼다.

1975년 발굴되기 이전 동궁과 월지를 추억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비단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이 아니라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것들이다.

"준설 전에는 그냥 유적지로 생각했어요. 임해정이라고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그랬어요. 주변엔 상가가 몇 채 있었는데 관광객이 오면 먹을 것 등을 팔고 그랬죠. 아무 정비도 없이 그저 연못만 덩그러니 있었어요."

"발굴이 시작될 당시엔 고기들이 많이 나와서 연못에서 큰 고기들은 잡아 불국사의 못에 넣기도 했지요.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너무 큰 거는 무거워서 고기 한 마리를 지게에 짊어지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발굴 현장에 갔을 때는 붕어가 상당히 많아 안주로 만들어 약주도 한잔 했습니다."


동궁과 월지에서 살았던 신라인들과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기 전 풍경을 보여주는 가벼운 추억담은 본격적인 발굴조사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당연한 수순처럼 진지해진다.

책에 따르면 1975부터 1년 이상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의 수량은 총 3만 3000여 점에 달한다. 유물들은 대부분 연못의 서쪽에 복원된 건물지를 중심으로 호안석축 내부 반경 6m 거리 내의 바닥토층에서 출토됐다고 한다.

월지에서는 기와, 벽돌, 건축부재, 불상, 용기, 숟가락, 배, 주사위, 금동제 가위, 목간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이 유물들은 통일신라의 건축, 불교미술, 생활상, 오락문화 등 통일신라 초창기 신라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지금도 역할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현장.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현장.
ⓒ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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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 발굴조사로 동궁과 월지 실체 규명되기를

동궁과 월지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렇기에 반세기 전 발굴에 참여했던 선배 조사원들은 지금 발굴에 참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여건들이 옛날보다 좋아졌으니까 선배들이 못한 것은 후배들이 과감히 새로 조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따스한 격려에서부터, "발굴이라는 것은 단시간 내에 빨리하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차근차근 침착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충고까지.

덧붙여 1975년 발굴 참여 학자와 조사원들은 입을 모아 이런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이전 열악했던 여건 속에서 졸속으로 진행된 안압지 발굴과 보고서에는 미비한 점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십 년 후 이어진 같은 지역에서의 후배들의 발굴조사로 안압지 발굴의 미비점들이 보완됐으면 한다.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연구 결과가 동궁의 실체와 그 생활상을 규명하는데 중요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위와 같은 선배들의 뜻을 잘 알고 있는 현재 발굴조사원들은 지난해 초 작성된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에서 다음과 같은 방향을 설정했다고 한다.
 
"동궁과 월지의 복원은 장기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조사 및 연구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타 문화유산의 조사·연구 사례 분석, 관련 전문가 의견 분석, 외부 환경 분석, 관련 정책 분석, 대상지의 정비, 조사와 연구 결과의 활용 방안 등을 토대로 체계적인 조사 및 연구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해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균형적이고 통합적인 중장기 계획을 세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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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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