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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는 위대한 예술가를 흠모하다 좌절을 겪고 결국 자신까지 몰락시키는, 불행을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소설은 실존했던 인물인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삶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그보다는 그를 미치도록 닮고자 했던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모습을 더 깊이 그려낸다. 소설은 세 명의 중심인물인 화자 '나'와 글렌 굴드 그리고 베르트하이머가 보여주는 욕망과 고독, 절망과 파멸의 이야기로, 챕터와 문단의 구분도 없이 '나'의 내적 독백 형식으로 담담히 진술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몰락하는 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몰락하는 자"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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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잘 알고 지냈던 세 명의 친구들은 같은 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오랜만에 재회한다.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이들은 모두 촉망받는 연주자로 예술계에 이름을 알리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피아니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져간다.

글렌을 제외한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대가 호로비츠 선생에게 사사 받을 음악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었고 앞으로의 희망찬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친구의 이러한 기대는 글렌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습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베르트하이머와 '나'는 글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는다. 글렌의 연주는 자신들이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글렌과 피아노 사이에는 그 어떤 경계가 없었고, 글렌은 피아노를 신체 일부처럼 타면서 연주했다. 피아노와 혼연일체가 된 글렌은 피아노 연주자가 아니라 피아노 예술 그 자체였다.

그것은 '나'와 베르트하이머가 노력과 훈련으로 가능한 능력이 아니었다. 두 친구는 글렌이 존재하는 한, 이 세계에서 피아노로는 "절대로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후, '나'는 아끼던 피아노를 치워 버렸고 다시는 피아노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이런 결단력 있는 행동과 달리,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는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을 넘어설 수 있다는 욕망에 휩싸여 그처럼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때부터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모든 것'을 흉내 내고 따라 하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자신과 글렌을 비교하면서 피아노 대가의 꿈을 끝까지 이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글렌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베르트하이머를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평소 베르트하이머는 다른 사람을 참아내지 못하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누가 자기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것을 참지 못했으며 자기가 모르는 주제에 대해 누가 논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었고 또 인정할 수도 없었다. 이런 베르트하이머에게 글렌은 어떤 존재였을까.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는 베르트하이머에게 글렌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끊임없이 대면하게 하는 존재였다. 글렌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베르트하이머는 그런 글렌을 보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낀다.

글렌을 모방한다는 사실 또한 자신을 부정하면서, 자신이 아닌 글렌의 모습으로 실력을 증명해 내야 하는 굴욕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글렌의 우월함은 베르트하이머를 자극하여 발전하게 하는 요인이 아닌 그를 서서히 망가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작가 베른하르트는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동경하는 글렌이 피아노 연주 도중 쓰러져 끝내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베르트하이머는 그의 죽음조차 부러워한다. 그것은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는 도중에 죽었다는 사실이 베르트하이머를 질투심에 휩싸이게 하면서 이내 절망하게 만든 것이다.

베르트하이머의 욕망이 글렌에 대한 동경에서 증오로 번지는 원인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는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죽은 자의 그 우월함이 증오스러웠다." 자신이 넘어설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미움이 그것의 정체이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죽음이 부러웠고, 살아서 남겨진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나 베르트하이머의 자기 파괴적 욕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글렌의 죽음을 따라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글렌처럼 피아노 연주 중에 죽을 수는 없었지만,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이 죽었던 나이와 똑같은 51살의 나이에 나무에 목을 매달아 생을 마감한다.

자신이 만든 뜨거운 욕망 속에 자신을 밀어 넣어 태워버린 남자 베르트하이머는 요컨대 '불행을 사랑한 남자'였다. 그가 세상과 불화하고 자신을 배반하면서까지 글렌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어 자신만의 '지극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행복을 위해서 베르트하이머는 더욱 불행해져야만 했다.

왜 그러한가. 행복은 불행을 전제로 한다. "불행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행복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라고 베르트하이머는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을 파괴할 만큼의 가혹한 불행,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차원의 절망과 고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혹한 행복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결과는 끔찍했다. 행복을 위해 더 큰 불행 속으로 걸어갔던 베르트하이머가 결국 자신까지 파멸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혐오 속에 무너지는 베르트하이머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찾아가 상대를 깎아내리는 일 때문에 파멸했어."

베르트하이머가 보여주듯이, 타인을 깎아내리고 싶은 욕망과 우월한 누군가를 흉내 내면서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모두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지금 시대같이 경쟁이 심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타인을 향하는 뾰족한 욕망의 화살이 날아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꽂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폭력의 표적이 나와 타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왜곡된 욕망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우월감과 좌절감 사이를 오고 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작가 베른하르트가 보내는 일침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


몰락하는 자 (반양장)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은이), 박인원 (옮긴이), 문학동네(2011)


태그:#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욕망, #파멸,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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