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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지하철역을 벗어나 복개된 성북천 길가에 서니 오한이 들 만큼 바람이 맵차다. 우수(雨水)를 넘긴 날씨에도 이러한데, 성북동 비둘기들은 모두 안녕하실까. 군데군데 공사판 가림막엔 스무 번째 대통령이 되어보겠노라 나선 이들의 벽보가 어지럽다. 저마다 내세우는 웅지의 끝은 과연 어디에 잇닿아 있을까.

성북천을 거슬러 한참을 오르자, 가파른 계단이 앞을 막아선다. 북악 능선을 넘어온 여지없는 바람이, 두꺼운 외투 속을 파고들며 추위에 움츠리는 나약함을 비웃는다. 오늘 찾을 그분께선 한겨울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서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데. 더구나 이 집에 살면서는 제대로 된 군불 한번 지핀 적 없다는데.

심우장 가는 길

비탈길 좁은 골목이 여러 차례 굽어진다. 그리 높지 않으나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숨이 가쁘다. 정점에 정갈하고 소담하며 고즈넉한 한 채 한옥이 반긴다. 집은 거기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모습. 맨 좌측이 방, 가운데 두 칸 대청과 맨 우측이 부엌 겸 주방.
▲ 심우장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모습. 맨 좌측이 방, 가운데 두 칸 대청과 맨 우측이 부엌 겸 주방.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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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尋牛莊). '소를 찾는 집'이란다. 불교에선 소를 '마음'에 비유한다는데,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가는 깊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집주인은 만해(卍海)다.

그도 긴 세월 한결같은 수양과 정진으로도 다다르진 못한 길이 있었나 보다. 이 집에 살면서 나를 찾는 '깨달음'의 길을 끊임없이 궁구(窮究)했다 하니, 그 경지를 어찌 짐작인들 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결혼은 늦은 나이(55세)였다. 1년 후 어린 딸을 얻는다. 성북동에서 궁벽한 셋방살이를 이어간다. 그러나 일제 탄압으로 근근이 이어오던 기고마저 끊겨버린다. 여러 도움으로 겨우 소담한 집에 정착한다. 벽산 스님이 내놓은 땅이 집터다. 여러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집(1933)을 짓는다.
 
시기를 알 수 없는 심우장 모습.
▲ 심우장 옛 모습 시기를 알 수 없는 심우장 모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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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면은 네 칸이고, 오른쪽은 두 칸이다. 'ㄴ' 모양 집은 북악 능선에 순응해 앉을 자리를 정했다. 하지만 앞 네 칸이 향한 방향은 북동쪽이다. 남향을 따르는 통례에서 어긋나있다.

만해가 이곳에 집을 지으며 "남향으로 하면 돌집(조선총독부 청사)을 향하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덜 들고 샘물이 없더라도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라 해서 집 좌향(坐向)이 정해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총독부를 정확히 등지고 앉은 방향과 모양새다. 애당초부터 집 앉을 자리를 그리 정한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서 보아 맨 왼쪽이 큰 방이다. 궁핍에 몰린 생활에도 이 방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긴다. 오세창이 쓴 '尋牛莊' 현판은 사라지고 나중에 다시 달았다. 가운데 두 칸을 지금은 방으로 꾸려 전시공간으로 활용 중이나, 본디 대청마루로 추정된다.

맨 오른쪽이 부뚜막 겸 주방이다. 뒤로 늘어진 한 칸에 마루를 놓아 식사가 가능한 공간을 두었다. 우리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그리 좁지 않은 마당은 아담하고 내리쬐는 볕은 따사롭다. 대문 옆에 늙은 소나무는 굽어 운치를 더하고, 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는 곧아 우뚝하다.
 
북동으로 향한 집 전면에 한낮인데도 긴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 대문 옆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마당 햇볕이 따사롭다.
▲ 심우장 전경 북동으로 향한 집 전면에 한낮인데도 긴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 대문 옆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마당 햇볕이 따사롭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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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당한 김동삼(金東三) 선생께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1937)한다.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독립투사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시신을 손수 수습해 모셔온다. 심우장에서 5일 장을 치르는 사이, 문상객은 겨우 수십에 불과하다. 이때 통곡하는 만해 모습은 유일무이했다고 전해진다. 집 이름이 전하는 뜻을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을 듯하다.

3.1운동 주도

만해는 충청도 홍주(홍성)에서 조선이 위급에 처한 시기(1879)에 태어난다. 고향에서 동학혁명과 연이은 을미 의병 패퇴를 지켜본 청년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길을 나서 백담사에서 불교에 입문한다.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과 영환지략(瀛環志略)을 읽고 비로소 서구문물에 눈을 뜬다. 해삼위(海參崴,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에서 곡절을 겪는다. 일본에 건너가 측량술을 배워 기기를 들여와 얄팍한 수법에 토지를 빼앗기는 백성을 돕기도 한다.
 
만주에서 첩자로 의심한 독립군 청년들 총격에 입은 총상으로 고개가 흔들리는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 감.
▲ 만해 한용운 만주에서 첩자로 의심한 독립군 청년들 총격에 입은 총상으로 고개가 흔들리는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 감.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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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는 만해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구부정하다. 나라 잃은 후 만주를 방문한다. 이때 김동삼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 독립운동하는 청년들 의심으로 총격을 당한다. 이때 받은 총상에 머리가 흔들리는 장애를 평생 안고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만해의 사진은 늘 고개를 모로 틀고 있다.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비롯한 불교개혁 서적을 쉬지 않고 간행한다. 대중 강연도 이어간다. 7년 시간, 혼신 노력을 다한다. 지친 심신을 이끌고 오세암(五歲庵, 1917)에 든다. 자기 본성을 깨닫는(見性) 체험을 한다. 선사(禪師) 만해가 투사이자 지사(志士) 만해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듬해 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대중불교와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선다.

이 힘이 3.1운동으로 이어진다. 때를 기다리던 지도자들이 민족자결주의에 힘을 얻는다.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이 뜻을 같이한다. 만해와 최린 등은 종교지도자 위주로 200명을 규합, 거국적 궐기로 독립선언을 구상한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 유교가 중심이다. 일제 탄압으로 정치지도자들은 씨가 말랐다. 심지어 구 왕족과 대한제국 고위 관료, 친일파에 재력가까지 설득해 보지만 허사다.

독립선언서 작성에 직간접으로 관여한다. 여러 설들이 분분하나, 최남선 초(草) 일부를 뜯어고치고 '공약 3장'을 직접 추가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름도 올리지 못하는 최남선의 비겁에서 절대 공약 3장 같은 명문이 태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과정에서 '선언이냐 청원이냐'를 두고 이상재를 비롯한 개량주의자들과 마찰은 피할 수 없는 한계다. 우여곡절 끝에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33인 대표가 꾸려진다. 거창에서 합류하려던 유교 대표 곽면우는 불가항력을 만나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33인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태화관 모임에서 한 만해의 독립선언 연설은 민족사에 전환점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그곳에서 검거되어 재판을 받으며,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다. 형무소 생활은 고문을 비롯한 고난의 연속이다.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찍은 수형카드. 형형한 눈빛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연상됨.
▲ 한용운 수형카드(3.1운동)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찍은 수형카드. 형형한 눈빛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연상됨.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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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는 '3불 원칙'을 실천한다. 일신 구금의 두려움에 울음 짓는 인사에겐 분뇨를 던지며 호통친다. 감옥에서도 펜을 들어 많은 문학 작품을 남긴다. 3년 형을 받아 옥살이하다, 2년 9개월 수감 생활 후 출소(1921.12)한다.

님의 침묵

오세암에서 불후의 시집(1925.08.29) 한 권이 태어난다. 독립운동과 대중운동에 쉼 없이 몸을 소진한 후 맞은 고단한 감옥생활에서 오히려 높은 '정신의 힘'을 얻었을 개연성이 커 보인다. 3.1운동 옥살이를 '님의 침묵' 탄생 디딤돌이라 유추하는 이유다.
 
심우장 방안에서 마당을 향해 놓인 좌탁으로, 만해가 집필하던 모습이 연상됨. 1925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쓴 시집 '님의 침묵'이 놓여 있음.
▲ 심우장 방안 심우장 방안에서 마당을 향해 놓인 좌탁으로, 만해가 집필하던 모습이 연상됨. 1925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쓴 시집 "님의 침묵"이 놓여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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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를 이루는 시는 무척 중의적이다. 사랑이기도, 그리운 연인이기도, 나라이기도 하다가 독립으로 옮겨와서 다시 '혁명'이다. 민중이, 부처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에서 공존과 평화로 옮아오는 해방이다. 하나의 길에서 여럿으로 나뉘고, 여러 갈래에서 다시 하나로 모이는 융합의 세계다. 하지만 무엇보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붓는' 윤회다. 이 모두는 우주이기도, 절대자에 대한 복종이기도 하다. 순리다.

3.1운동은 무장 독립투쟁과 사회주의 확산을 가져온다. 아울러 기만적 문화통치는 참정권과 자치제 수용이라는 수구집단 반동도 같이 가져온다. 만해는 신간회 창립(1927.02)에 관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을 맡는다. 신간회의 비타협적 운동 노선이 수구에 맞설 유일한 힘이며, 좌우합작으로 항일 투쟁 노선 일관성을 이뤄 민족 통합이 가능하리라는 이유에서다.

광주에서 학생의거(1929.11)가 일어난다. 신간회는 이 기화로 '대 연설회'를 기획한다. 하지만 일제의 사전 검거로 많은 인사가 구속되고 신간회는 압수 수색당한다.
 
신간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찍힌 수형카드. 형형한 눈빛과 표정에서 당당하고 굳은 의지가 읽힘.
▲ 1929.12월 수형카드 신간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찍힌 수형카드. 형형한 눈빛과 표정에서 당당하고 굳은 의지가 읽힘.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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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살이 후 만해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극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된다. 신간회는 일제 강압과 회유 속에 해체(1931.05)의 길을 걷는다. 심혈을 기울이던 잡지 '불교'는 정간당하고, 만해가 우두머리이던 불교 비밀결사체 '만당(卍黨)'이 와해된다. 최린 등이 변절한다. 유일한 생계 수단이던 기고마저 막혀버린다. 심우장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만해는 선사이자 계몽가였으며, 혁명가이자 문학가다. 일의 성패보다 옳고 그름을 먼저 분변하라 말한다. 옳은 일이라면 용감하게 맞닥뜨리라 한다. 가시밭길이거나 설령 칼날에 올라서는 일일지라도 물러서지 말라 한다. 변절자는 끝까지 외면했다. 심우장에서 생(1944.06)을 다한다. 고즈넉한 심우장이 쓸쓸해 보인다. 작금 우리는 어느 칼날을 밟고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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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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