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대정신이자 미래의 침로인 'ESG'가 거대한 전환을 만들고 있다. ESG는 환경(E), 사회(S), 거버넌스(G)의 앞자를 딴 말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세계시민의 분투를 대표하는 가치 담론이다. 삶에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실천하는 사람과 조직을 만나 그들이 여는 미래를 탐방한다.[기자말] |
▲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청 대강당에 마련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서 의료진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조제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2021.3.15 ⓒ 공동취재사진
대한민국 사람에게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품귀 현상하면 떠오르는 의약품이 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타이레놀'이라고 답할 것이다. 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자들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2021년 1~3분기에 501억 원의 매출을 기록해 전년 동기 181억 원보다 176.5%가 늘었다.
백신 접종 초기에 "발열 등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타이레놀을 복용하는 게 좋다"고 접종 대상자를 상대로 정부가 타이레놀 복용을 권고한 것이 특정 제품 홍보에 기여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 타이레놀과 타이레놀8시간이알서방정은 타이레놀 시리즈 중 아세트아미노펜 단일 성분으로 구성된 해열진통제로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다 [2].
위기 대응
정부까지 나서서 권유할 정도로 안전성을 인정받은 타이레놀이 한때 독극물 투입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 1982년 9월 29일 미국 시카고에서 존슨앤드존슨의 대표 상품인 캡슐형 타이레놀 '엑스트라 스트랭스 타이레놀 Extra-Strength Tylenol' 제품에 들어간 독극물(청산가리) 때문에 10월 1일까지 타이레놀을 복용한 시민 7명이 숨졌다 [3]. 사고 직후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진통해열제 시장에서 타이레놀의 시장점유율은 35.5%에서 7%로 폭락했다 [4]. 주가 역시 사건 발생 후 9일 동안 29%인 약 23억 달러나 하락했다 [5][6].
존슨앤드존슨은 연방수사국(FBI), 시카고 경찰, 식품의약국(FDA)과 공조하여 사건을 추적했다. 범인이나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7]. 조사 결과 문제의 캡슐은 펜실베이니아와 텍사스의 두 곳에서 제조됐으며, 판매용 매장 선반에 제품이 배치된 후 캡슐이 변조되었음이 밝혀졌다 [8].
사건 발생 이후 존슨앤드존슨은 흔히 위기에 처한 기업이 그러듯 해명이나 변명을 일삼지 않았고, 사건의 진상이 다 드러나기도 전에 아는 대로 해당 사실을 알리는 선제 조치에 나섰다 [9].
존슨앤드존슨의 자회사이자 타이레놀 제조 회사인 맥닐사(McNeil Consumer Products)는 사건 발생 다음날인 9월 30일 로트번호(같은 재료이기 때문에 같은 제품의 특성을 갖는다고 인정되는 제품에 부여되는 부호) MC2880 타이레놀 캡슐 9만 3000병(470만 캡슐)과 로트번호 1910MD 17만 1000병(850만 캡슐)의 리콜을 발표했다. 제임스 버크 회장은 타이레놀 캡슐 생산 라인을 즉시 폐쇄하고, 타이레놀 광고를 중지했고 [10][11]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전국 모든 매장의 엑스트라 스트랭스 타이레놀 제품 회수 조치에 들어갔다.
맥닐사의 경영진은 ABC 방송사의 나이트라인 등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타이레놀 제품의 변조 방지 포장재가 마련될 때까지 타이레놀 캡슐 제조 판매를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모든 캡슐 형태의 타이레놀 제품을 정제형으로 교환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미국 전역에 배포되었다고 추정된 2200만 병은 약 8000만 달러어치였다. 이후 실제로 존슨앤드존슨이 회수한 타이레놀은 3100만 병으로 폐기에 들어간 비용은 1억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12].
우리의 신조
이 사건 이전에 존슨앤드존슨은 외부에 나서거나 미디어의 뉴스거리가 되는 것을 되도록 삼가는 홍보 전략을 취했다 [13]. 그러나 사건이 발생하자 언론 취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실시간으로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다. 존슨앤드존슨은 즉각 최고경영자(CEO)인 버크 회장을 비롯하여 임원진 7명으로 위기대응팀을 구성했다.
요즘과 달리 특별한 위기관리 매뉴얼이 없던 당시 존슨앤드존슨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회사의 철학이 담긴 '우리의 신조(Our Credo)'를 기준으로 삼았다 [14]. '우리의 신조'는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은 환자, 의사, 간호사와 아버지와 어머니들 그리고 우리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15][16].
존슨앤드존슨의 창립 멤버이자 1932~1963년 회장을 지낸 로버트 우드 존슨이 존슨앤드존슨이 상장 기업이 되기 직전인 1943년에 '우리의 신조'를 직접 만들었다. 존슨앤드존슨의 신조(Credo)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훨씬 전에 CSR을 선취한 사건으로 언급된다. 신조는 소비자에 대한 책임을 시작으로 비즈니스 파트너, 직원, 지역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명시하고 마지막으로 주주에 대한 책임으로 끝난다.
▲ 미국 뉴저지주 존슨앤드존슨 본사 사옥 돌판에 새겨진 '신조' ⓒ 존슨앤존슨
'우리의 신조'에 근거해 존슨앤드존슨은 핫라인을 설치해 언론과 소비자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면서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17]. 언론과 긴밀한 공조 체제를 구축해 소비자가 추가적인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실제로 존슨앤드존슨이 사건 발생 후 바로 모든 캡슐을 수거한 덕에 추가적인 인명피해를 막았다. 수거한 캡슐을 검사한 결과 독극물이 함유된 타이레놀(캡슐)을 추가로 75개 발견했다 [18].
사태가 진정되고 난 후 비슷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존슨앤드존슨은 새로운 포장재 개발에 나섰다. FDA와 협력하여 1982년 11월 11일 존슨앤드존슨은 타이레놀 소매 판매용으로 변조 방지 포장재(병)를 새로 출시했다. 새로운 포장재는 3중 밀봉의 변조 방지 병이었다. 또한 소비자들이 집에 보유한 타이레놀 캡슐을 가져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무료로 교체해 주었다.
존슨앤드존슨은 독극물 사건 이후 출시된 타이레놀 제품 구매 시 2.5달러 상당의 쿠폰을 제공한다는 신문 광고를 냈다. 당시 액체형을 제외한 타이레놀 제품 한 병의 가격은 2.5달러 미만이었다. 존슨앤드존슨이 발행한 쿠폰은 4000만 개로, 약 1억 달러 규모였다. 새로운 변조 방지 포장재를 도입함으로써 한 병당 제조비용이 2.4% 증가했다. 초기에 경보를 발령하고 타이레놀 캡슐을 회수한 뒤 캡슐을 검사하고 폐기하는 전 과정에 이미 1억 달러의 비용을 지출한 상태였다. 타이레놀 시장을 복원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부담한 셈이다 [19].
모범 사례
존슨앤드존슨의 변조 방지 포장재 개발은 1년 후 미국 의회에서 식품 및 의약품 포장을 변조하는 것을 연방 범죄로 규정하는 '타이레놀 법안(Tylenol Bill, 1983년)' 통과를 이끌었다. 이에 따라 식품 및 의약품 포장의 변조를 시도한 자는 최소 2만 5000 달러에서 최대 10만 달러의 벌금과 최대 10년의 징역, 상해 피해자 발생 시 최대 20년의 징역, 사망 피해자 발생 시에는 최대 무기징역에 처해지게 됐다 [20].
당시 존슨앤드존슨의 철저한 대처는 좋은 평가로 이어졌다. 사건을 은폐하고 무마하기보다는 정직하게 그리고 적기에 발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대중과 언론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타이레놀의 진통제 시장점유율은 사건이 발발하고 7%로 하락한 후 약 8개월 만인 1983년 5월에 종전 수준인 35%를 회복했다 [21].
1986년 2월 존슨앤드존슨은 또 다른 사망 사건에 직면한다. 이번에는 미국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용커스에서 청산가리가 든 타이레놀 캡슐을 먹고 한 여성이 사망했다 [22]. 82년 사건으로 변조 방지 포장재(병)을 만들었지만, 타이레놀 캡슐이 변조 방지 병에 투입되어 소매점으로 배송되기 전에 독극물이 주입된 사건이었다.
버크 회장은 다시 한번 대규모 리콜을 단행했다. 사건이 발생한 웨스트체스터 전역의 모든 타이레놀을 회수하고 전국 소매점에서 타이레놀 판매를 보류했다. 전국의 소비자에게 갖고 있던 캡슐 타이레놀을 반품하면 정제 알약이나 코팅 정제 알약으로 교체 허가나 전량 환불해 줄 것을 약속했다 [23].
▲ 타이레놀 캡슐과 포장병 ⓒ 안치용
존슨앤드존슨은 차제에 위험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캡슐 형태의 제조를 전면 중단했다 [24]. 정제 알약(tablet 형태)은 1976년, 코팅 정제 알약(caplet 형태)은 1983년에 이미 출시돼 캡슐과 병행 유통되었는데, 1986년 두 번째 청산가리 투입 사건으로 캡슐 형태 제조를 전면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독극물이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을 막는 근본적인 조치였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의 타이레놀이 탄생했고, 우리가 모르는 캡슐은 두 번의 사건 너머로 사라졌다. 존슨앤드존슨의 타이레놀 사건 대응은 3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정제분말을 넣은 캡슐형태의 타이레놀 제품 제조를 전면 중단한 존슨앤드존슨은 1988년에 'Extra Strength TYLENOL Gelcaps'라는 캡슐 형태 제품을 재출시했다. 그러나 이 제품은 코팅되지 않은 정제형 타이레놀 제품을 목 넘김이 쉽도록 젤라틴으로 코팅한 제품(젤캡슐)으로 이전에 독극물 투입 사고가 일어났던 (분말)캡슐하고는 다르다. 2005년에는 섭취 후 더 빠른 효과를 위해 고안된 'TYLENOL Extra Strength Rapid Release Gels'를, 2008년에는 캡슐에 액체 약물을 넣은 'TYLENOL PM Rapid Release Gels'을 출시했다. 자동화 등으로 과거와 같은 독극물 투입 사고를 원천 차단했기에 가능했다.
글: 안치용 ESG코리아 공동대표, 김민주 바람저널리스트, 이윤진 ESG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