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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선거 과정과 결과에 대해 여러 평가들이 나온다. 20대 입장에서 대선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흥미로운 화두 중 하나는 단연 '청년'이었다.

잇따른 논란과 내홍으로 지지도가 떨어지던 상황에서 윤석열 당선인은 '청년'을 통해 반전의 계기를 꾀했다. 1월 6일의 간담회에서 청년보좌역들은 윤석열 후보를 상대로 강도 높은 질책과 비판을 쏟아냈다. 이에 윤석열 후보는 "앞으로 청년 관련 행사는 당 간부들이 주도하지 말고 청년에게 다 맡겨라"고 주문하는 한편, 사퇴한 청년보좌역들을 다시 기용해 청년 표심 잡기에 나섰다. 

사상 최소 표차로 패배한 이재명 후보 역시 청년 표심 모으기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이재명 선대위에 영입됐던 박지현씨가 선거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공동비상대책위원장에 임명된 것은 큰 반향이다. 정치권의 청년 민심 청취는 선거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성 과업이 아닌, 당의 미래가 걸린 대업이 된 것처럼 보인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청년을 중심으로 정국이 짜여졌던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제국시대 일본의 경우,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체사상의 광풍과 거듭되는 대외전쟁 속에서 청년들이 꿈꾸던 새정치는 설자리가 없었다. 암울했던 전란의 시대에, 청년은 사회의 미래를 주도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저 국가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관련기사: 세상 바꾸고 싶었던 법학도 청년, 그 끝은 '인간어뢰').

그랬던 제국 일본의 사회에서도, 청년들이 '변혁'을 요구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2.26사건'이다. 1936년 2월 26일, 이른바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1486명의 병력을 동원해 궐기했다.
 
쿠리하라 야스히데 중위는 가장 적극적으로 궐기를 주장한 장교 중 한 사람이었다. 2.26사건 직후인 7월 12일에 사형되었다. 향년 28세
▲ 궐기 주동자 쿠리하라 야스히데 중위와 그의 부하들 쿠리하라 야스히데 중위는 가장 적극적으로 궐기를 주장한 장교 중 한 사람이었다. 2.26사건 직후인 7월 12일에 사형되었다. 향년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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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변을 두 차례나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군대의 궐기'는 결코 낯선 상황이 아닐 듯하다. 장성급 장교들의 권력 찬탈이 목표가 됐던 5.16군사쿠데타나 12.12군사쿠데타와는 달리, 젊은 위관급 장교들이 중심이 됐던 2.26사건의 경우는 일본 국가의 '변혁'을 지향해 벌어진 궐기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제국 시대 내내 일본의 민중은 빈곤에 허덕였다. 냉해가 쓸고 간 농촌과 살인적인 노동환경의 도시에서 생명을 잃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탈아입구'를 완성했다고 자축하던 제국의 지도층들은 스스로의 특권을 공고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군과 재계는 새로운 대외전쟁을 통해 출세의 기회를 노렸다. 이러한 사회모순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1918년의 '쌀 소동'으로 폭발했다. 쌀을 달라며 울부짖는 민중의 시위는 군경의 총검으로 진압됐다(관련기사: 정부와 싸우던 일본인은 어떻게 '황국신민'이 됐나).

학생과 지식인들은 경악했다. '신성한 천황의 군대'가 '천황의 자식'인 백성들을 폭력으로 진압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단단히 잘못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고,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며 변화의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특별고등경찰 등을 통해 이뤄진 강도 높은 사상탄압은 일본의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철저하게 지워버렸다(관련 기사: 잘 알려지지 않은 '오야코동'의 과거). 국가폭력의 그늘 아래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이러한 현실 위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은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들은 그 자신이 가난한 농촌 출신이거나 혹은 농촌 출신의 중대원들과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사회 현실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갖게 될 수 있었다.

청년 장교들은 자신의 생애에서 이뤄졌던 교육에 따라 천황을 '지극히 선하고 어진 존재'로 믿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부패한 간신과 재벌 집단을 제거하고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면 국가의 혁신이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기타 잇키(北一輝)의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은 청년 장교들에게 큰 영감을 줬다. 
 
기타 잇키의 국가 개조론은 2.26사건을 두조한 청년 장교들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사후에 기타 잇키 역시 반란의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되었다.
▲ 일본의 국가개조를 주장했던 기타 잇키 기타 잇키의 국가 개조론은 2.26사건을 두조한 청년 장교들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사후에 기타 잇키 역시 반란의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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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잇키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통해 귀족제도의 폐지, 조선인 등 식민지 신민들을 포함한 보통선거의 실현, 사유재산의 제한, 대자본 국유화, 8시간 노동제 및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노동자의 권리 향상, 언론의 자유, 인권 옹호 등 국가 변혁을 위한 구체적 방법과 구상들 제시했다. 이러한 진보성으로부터, 기타 잇키 평전의 저자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 레이타쿠 대학 교수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이 오늘날의 일본국 헌법과 비교했을 때 70%가 통한다고 평가한다.

기타 잇키는 자신의 주장이 권력자들과 재벌들의 거수기에 불과한 기존의 정당정치로는 실현될 수 없다고 봤다. 적극적으로 당시 일본의 정당정치와 대의제를 부정한 기타 잇키는 천황의 권위를 도구로 삼아 '대일본제국 헌법'을 정지시키고 나라를 뿌리부터 뒤집는 급진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찍이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경험으로 농민들이 품고 있는 혁명적 잠재성과 관군의 동참이 혁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목도했던 기타 잇키는 국가개조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으로 '순수하고 젊은 군인'들을 지목했다.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으로부터 변혁에 목말랐던 일부 청년장교들은 국가를 구할 수 있는 주체가 오직 자신들 뿐이라는 사명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들은 1936년 2월 26일 새벽 국가 개조를 위한 무력 행동에 나서게 됐다. 청년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병영을 나선 궐기군은 총리 이하 주요 인사들을 습격하고 육군대신 관저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궐기군에 의해 살해된 것은 총 9명으로, 여기에는 전 총리대신, 전 조선총독, 대장대신(한국의 기재부 장관에 해당), 교육총감 등 거물급 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청년 장교들이 지휘하는 궐기군은 주요 정부 청사들을 장악했다.
▲ 내무성 청사 앞에 전개한 궐기군 장병들 청년 장교들이 지휘하는 궐기군은 주요 정부 청사들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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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도쿄는 훌떡 뒤집혔고 제국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궐기군은 이른바 '쇼와 유신'을 요구했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 대장 등 이른바 '황도파' 지도자들은 최초의 충격이 지나가자 이내 반색하며 적극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동안의 군 내 파벌 싸움에서 수세에 몰려있던 황도파 지도자들에게 있어 청년 장교들의 궐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역전의 기회였다.

황도파 지도자들은 청년 장교들을 방문해 궐기 취지에 공감을 표했고,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해 사태를 수습한다는 안이 거의 기정사실화됐다. 급변사태에 놀란 비황도파 고위 장교들이 눈치만 보고 있는 사이 궐기는 거의 성공에 다가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청년 장교들이 기대를 걸었던 쇼와 천황의 반응은 냉담했다. 천황은 자신이 아끼는 중신들이 습격 당한 사실에 진노했고, 궐기군을 역적으로 규정했다.  토벌을 명령하는 천황의 뜻은 강경했다. 처음에는 천황의 의지를 외면하면서까지 줄타기를 벌이던 고위 장교들 역시 생각을 고쳐먹고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 장교들의 궐기를 이용해 집권을 눈앞에 두었던 황도파 지도자들의 태도도 일순간에 변해버렸다. 급기야 그들은 청년 장교들에게 자결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청년 장교들이 살아남아 재판이 열리게 된다면, 그들의 궐기에 편승해 집권을 노렸던 자신들까지 반란방조로 심판 받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청년 장교들에게 공감을 표했던 마사키 대장은 진압 방침이 굳어지자 태도를 바꿔 자신과 궐기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후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그는 도조 히데키 수상과 통제파를 실각시키고자 하는 민간 정치인들과 협력해 거듭 스스로의 총리 취임을 시도했다..
▲ 2.26사건을 통해 집권을 꾀했던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 청년 장교들에게 공감을 표했던 마사키 대장은 진압 방침이 굳어지자 태도를 바꿔 자신과 궐기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후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그는 도조 히데키 수상과 통제파를 실각시키고자 하는 민간 정치인들과 협력해 거듭 스스로의 총리 취임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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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장교들은 자신들이 '어른'으로 믿었던 존재들에게 버림받았다. 더 이상 길은 없었다.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안도 데루조(安藤輝三) 대위는 최후의 훈시를 마치고서, 자신의 자살을 만류하는 병사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언젠가 자네가 내게 농가의 상황을 중대장님은 알고 계시냐고 따진 적이 있었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하지만 자네가 걱정하는 농촌도 끝내 구원하지 못하고 말았군."

자살하지 않고 법정투쟁에 나선 주동자들은 신속한 사형으로 철저하게 엄벌됐다. 청년 장교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 기타 잇키 등 역시 반란의 수괴로 지목돼 사형에 처해졌다. 반면, 청년 장교들의 궐기를 이용해보고자 했던 황도파 지도자들은 일부가 현역에서 예편되는 선에서 법적 심판을 피했다. 이들은 오히려, 이후의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에 주요 각료나 지휘관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2.26사건은 경직된 제국 체제 아래서 기형적인 형태로 표출된 청년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민중항쟁이나 정당정치로 이루지 못한 국가 변혁은 쿠데타라는 뒤틀린 방법으로 시도되기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청년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자 했고, 판세가 기울자 주저없이 그들을 버렸다.

얄궂게도, 청년 장교들이 바랬던 국가 개조는, 그들을 버린 어른들이 국가를 잘못 인도하여 패전을 초래하고 나서야 외세의 강요로 실현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구하는 청년들의 열망은, 이용되거나 버림받는 일 없이 온전히 이어질 수 있을까. 청년정치를 생각하며, 새삼 2.26사건의 비극을 곱씹어본다.

덧붙이는 글 | 유죄를 선고받았던 2.26사건 관계자들은 일본 패전 후 정치범 사면 조치에 따라 1946년에 전원 사면 복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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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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