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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근대화를 '봉건 체제가 해체되어 사회가 자본주의로 이행해 가는 역사적 전개 과정이자 지향'이라 규정한다. 이는 해체된 수직적 계급구조가 수평화된 계급구조로 대체되었다는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봉건 체제는 다중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위를 허가나 관습, 전통이 아닌 이상 반란을 획책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근대화는, 수평화한 계급구성원의 일상적 회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찾아져야 한다. 상시화된 공연과 영화 상영, 대중강연은 물론 정치집회 등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가능해졌느냐가 그 척도다.

일상적 회합은 또한 도시문화, 지역문화의 탄생이 가능해졌다는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도시광장, 종교집회장, 학교, 공연장과 강당, 상업극장, 다중 경기 시설 등의 탄생과 변모다. 이는 생활 양태 변화가 일상에서 문화를 수용, 소비할 만큼 시민사회가 성숙 단계로 진입했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식민지에서 이런 시설은 일본인만을 위한 배타적 공간이었다. 조선인은 동화주의와 우민화라는 일제가 강제하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다. 뿌리내린 차별과 착취에 최소 생계유지도 버거웠다. 이들 시설이 과연 조선인이 일상으로 향유하고 소비하는 공간이었을까.
 
L자형 평면이 확인된다. 태평로에 면한 출입구 등이 사라져, 평면구성의 균형을 잃었다. 왼쪽에 나중에 증축한 건축물과 출입구가 있다.
▲ 부민관 조감 L자형 평면이 확인된다. 태평로에 면한 출입구 등이 사라져, 평면구성의 균형을 잃었다. 왼쪽에 나중에 증축한 건축물과 출입구가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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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은 제반 조건이 그나마 유리한 도시였다. 공연시설로 일찍이 YMCA회관(1908, 800명)과 경성공회당(1920, 765명) 같은 대형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외국 선교사단체가 세운 교회당과 규모 있는 학교, 그리고 대형 사설 극장과 음식점도 한 부류였다.

하지만 시설 이용에 민족과 계급 차별은 엄존했다. 경성부 부민이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었을까? 1934년 경성인구 중 일본인은 27.8%(109,682명)다. 이들의 요구와 필요가 규모 있는 집회, 문화시설이 생겨난 직접적 이유다.

친일과 항일의 공간

경성 거주 일본인은 섬나라 대비 문화시설이 열악하다는 점에 불만이 많았다. 특히 일류 가부키(歌舞伎) 극단 초청에 목말라 있었다. 몇몇 일본인 자본가가 대규모 공연장 건립을 시도하나, 한계를 보인다. 경성부청도 재정 여건이 여의치 못하다.

경성에서 전기공급과 운수를 독점하던 경성전기(주)가 기부금 1백만 원을 경성부에 기부(1933.06)한다. 50만 원은 경성부립병원 건립에 사용하고, 비용을 추가해 경성부민관 예산 62만 원을 확보한다.
 
시계탑 아래 주 출입구와 오른쪽 부 출입구가 태평로에서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높은 시계탑과 사각의 긴 창이 집의 수직성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 완공 직후 부민관(1936) 시계탑 아래 주 출입구와 오른쪽 부 출입구가 태평로에서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높은 시계탑과 사각의 긴 창이 집의 수직성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 출판회사 루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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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변 경성YMCA와 이왕직이 소유하고 있던 땅 5,885㎡(1,780평)를 사들인다. 착공(1934.07) 1년 반 만에 준공(1935.12)된다. 공공시설이란 한계로 수시 대관 체제로 운영했다.

일반 극장 입장료가 50전인데 반해, 부민관은 최고 1원 50전으로 비싼 편이었다. 그나마도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고서부터 공연 등이 뜸해지자, 중강당과 소강당을 결혼식장으로 대관하기도 한다.

이 집을 상징하는 높이 43.6m 시계탑은 단순성과 수직성을 상징한다. 가히 욱일승천하는 군국주의 일제의 침략성을 선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평양전쟁(1941)을 전후하여 부민관은 전혀 엉뚱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대표적 친일극단인 현대극장이 이곳에서 '흑룡강'이란 공연으로 창단(1941.03)한다. 전쟁이 격화되자 모윤숙, 이광수 등이 이곳에서 청년들의 자발적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강연회를 열기도 한다.
 
성공회성당과 부민관, 호텔로 이어지는 지금의 태평로 모습이다.
▲ 부민관 일원 태평로 성공회성당과 부민관, 호텔로 이어지는 지금의 태평로 모습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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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김동환, 윤치호 등이 황도 정신 선양과 전시체제 국민 생활 쇄신을 추진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명분으로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한다. 이 단체 출범식(1941.10.22)이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때 낭독된 선서문이 '2천4백만 반도민 모두 일치 결속하여 성전 완수를 통해 황국의 흥융(興戎, 전쟁을 일으킴)을 기할 것을 맹세한다'였다.

전시체제에서 동원예술과 정치집회는 도를 더해간다. 친일파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이 이곳에서 개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1945.07.27)'에 조선과 중국, 만주국을 대표하는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한다. 대회가 한창일 때 항일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단' 소속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대회장에 폭탄을 터뜨린다. '부민관 폭파 의거'다. 패망 직전의 일제를 향한 마지막 항거다.
 
서울시의회로 사용 중인 집 주출입구 부위다. 영욕의 현대사를 떠 안으며, 그나마 비교적 잘 보존된 경우다.
▲ 변형된 출입구 서울시의회로 사용 중인 집 주출입구 부위다. 영욕의 현대사를 떠 안으며, 그나마 비교적 잘 보존된 경우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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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의 명암

부민관은 단순한 입면에 긴 창으로 수직성을 강조했다. 본관과 별관으로 나뉜다. 본관엔 대강당, 집회실, 특별실을 별관엔 중강당, 소강당, 부속실, 특별실 및 식당과 이발실 등을 두었다.

설계는 두 일본인이 주도했다. 해외 곳곳의 문화시설을 시찰하고, 권위 있는 건축가를 초빙해 자문을 얻기도 한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건평 5,676㎡(1,717평), 대강당 1,800석, 중강당 400석, 소강당 160석 규모다.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 당시 드물게 냉·난방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출입구는 태평로에 면해 있었다. 출입구 앞에 계단을 두고 차량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다. 부민관 평면은 땅 모양에 순응한 'L'자다. 가로(별관)와 세로(본관)축이 만나는 부위에 현관홀을 두었고, 동서 방향에 계단실이 두었다. 높다란 시계탑은 현관홀 서쪽 계단실 부분이다.

1∼3층 통으로 되어 있는 대강당은 현관홀에서 세로축, 본관에 배치되었다. 보조석 200석에 입석까지 포함하면 3,000석이고 밀집도를 높이면 3,500명 수용 가능했다.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액자 모양의 건축구조(Proscenium)를 적용했다.
 
L자형 평면은 부지와 지형에 순응하여 결정되었다. 세로축 본관의 대강당과 가로축 별관 중강당 등의 평면 구성을 볼 수 있다. L자 왼쪽 맨 아래가 시계탑이다. 대강당은 액자무대라 부르는 프로시니엄(Proscenium) 설계다.
▲ 부민관 1층 평면도 L자형 평면은 부지와 지형에 순응하여 결정되었다. 세로축 본관의 대강당과 가로축 별관 중강당 등의 평면 구성을 볼 수 있다. L자 왼쪽 맨 아래가 시계탑이다. 대강당은 액자무대라 부르는 프로시니엄(Proscenium) 설계다.
ⓒ 출판회사 루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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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개관식 때 5대 권번 기생들이 총출동된 기념공연이 있었다. 하지만 초기는 대중성이 떨어지는 서양음악과 독창회, 무용 발표회와 연극이 주를 이뤘다. 공공시설의 한계다.

운영적자도 고려해 운영의 확장성을 가져올 필요가 생겼다. 점차 조선 민중이 선호하는 공연을 늘려나간다. 남도소리나 명창대회가 열리고, 신파극단이나 악극단, 각종 기예단 공연도 수시로 열린다.

경성 5대 공연시설인 단성사, 제일극장, 우미관, 명치좌, 약초극장은 주로 상업영화 상영에 치우쳤고, 주로 일본인 소유로 조선인 대관도 힘들었다.

부민관 존재는 가난한 조선인 예술가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특히 유치진이 주도한 '극 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춘향전(1936.09)은 대강당이 꽉 들어찰 정도의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김해경)과 소설가 김유정의 합동 추모식도 부민관에서 열렸다.
 
해방되던 해 부민관과 주변 태평로 모습이다. 왼쪽 뒤로 경성방송국 전파시설이, 오른쪽으로 1930년대 지어진 조선일보 사옥이 보인다.
▲ 부민관 주변(1945) 해방되던 해 부민관과 주변 태평로 모습이다. 왼쪽 뒤로 경성방송국 전파시설이, 오른쪽으로 1930년대 지어진 조선일보 사옥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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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민관은 일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주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연극인 통제뿐만 아니라 문화통치 도구의 하나로 '국민연극경연대회'를 세 차례나 개최한다. 내선일체와 전시 동원체제에 순응하는 다양한 활동이 이 공간 위주로 기획된다. 황국신민화와 대동아공영권 등을 선전하는 국책 연극 공연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해 간다.

부끄러운 입법 공간

집은 해방 후 국립극장으로 쓰이다가 한국전쟁 후부터 국회의사당이 되었다. 냉전과 반공을 앞세워 권력을 오로지 한 자유당 내 친일파가, 이 공간을 빌어 친미파로 탈을 바꿔쓴다.

4.19 도화선은 시위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 깡패가 이 집 앞에서 테러하면서 불붙는다. 5.16쿠데타 세력은 이 집을 군사정권 부속품으로 전락시켰다.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사건 때는 '오물투척(1966.09)' 사건이 벌어진다.
 
태평로 확장(1980) 때 길에 면해 있던 부민관 시설물(900㎡)이 잘려 나갔다. 이로 인해 주출입구 등 평면 일부 변형이 불가피했다.
▲ 잘려나간 부민관 태평로 확장(1980) 때 길에 면해 있던 부민관 시설물(900㎡)이 잘려 나갔다. 이로 인해 주출입구 등 평면 일부 변형이 불가피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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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3선개헌(1969.09)이 의사당이 아닌 별관에서 날치기로 통과된다. 제4별관 외무위원회에서 3분 만에 통과된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안(1971.12.27)'은 독재자 협박에 의회가 굴복한 부끄러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절정은 '유신헌법(1972.10.27)'이다. 국회를 해산하여 허수아비로 만들고, 전격 결행된 최악의 헌법개정이었다. 이 헌법으로 국회는 독재자를 보좌하는 부속품으로 전락, 독재자의 조종에 충실히 따르는 거수기 역할뿐이었다. 시민을 억압·탄압하는 악법 생산공장으로 취급, 기능하였다.

의사당 이전(1975.09) 후 잠시 시민회관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생기자 별관(1976)으로 사용된다. 태평로 확장(1980)으로 900㎡가 잘려 나가 옛 모습을 잃는다. 지방자치제가 부활(1991)하고 서울시의회로 사용 중이다.

국회로 대표되는 우리 의회 정치를, 흔히 '삼류'라 자조적으로 평가한다. 여의도라는 정치 공간에 들어가면, 천재가 바보 되어 나온다는 말도 회자한다. 회합의 자유가 상징하는 근·현대화가 극단으로 왜곡되어 삼류로 전락한 공간이다. 이 공간지형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우리 미래는 결코 담보하기 어려워 보인다.
 
길을 넓히면서 튀어나온 건축선과 시설물 조정으로, 부민관과 체신부 건물이 잘려나갔다.
▲ 태평로 확장(1980) 길을 넓히면서 튀어나온 건축선과 시설물 조정으로, 부민관과 체신부 건물이 잘려나갔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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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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