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50년 7월 29일. "으앙" "할매. 숯 걸어 놓으소" 아기 낳는 걸 도와주던 산파가 서계특(당시 집나이 23세)의 시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아이고 잘됐구마"하며 기뻐한 시어머니는 짚새기에 숯을 엮어 대문 앞에 걸어 놓았다. 첫째가 아들(채성기)이니, 둘째는 딸(채순기)이어도 입이 귀에 걸렸다. 아들이면 고추를, 딸이면 숯을 대문에 걸어 놓던 시절이었다. 

하혈하며 남대구경찰서로 간 여인

이어 미역국을 끓이던 시어머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며늘 아가! 니 뭐하노?" "어무이. 도저히 집에 가만히 못 있겠어예. 성기 아버지(채병표, 1927년생)가 어떻게 됐는지 경찰서에 가보겠심더." "야가 무슨 말이고. 니 방금 아를 난기 아이가..." 아무리 말려도 서계특은 막무가내였다. "어무이. 야 좀 봐 주이소"라며 갓난아기를 시어머니에게 건넨 계특은 고무신을 신고 집을 부리나케 나섰다.

경북(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대일박 마을에서 남편이 구금된 남대구경찰서까지는 40리(16km) 거리였다. 그렇게 시골길을 걷다보니 땀이 삐질삐질 나왔다. 한여름이라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데, 방금 전 아기를 낳은 산모가 장거리를 걸으니 당연했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갑자기 주춤했다. 하혈이었다. 그런데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속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몸에서 기운이 모조리 빠질 무렵 남대구에 있는 용두방천이 눈앞에 나타났다. 용두방천은 대구 수성못과 수성교 사이에 있는 하천이었다. 주변을 살핀 그녀는 물 속에 들어가 하혈한 피를 씻어내고 몸을 추슬렀다. 남편이 걱정되어 그런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송아지 판 돈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증언자 채성기
 증언자 채성기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저기예. 유치장에 있는 사람 면회 왔는데예..." 서계특의 아래위를 쳐다보던 경찰은 귀찮다는 듯 한마디 툭 던졌다. "유치장에는 아무도 없는기라예." "그기 무슨 말이라요. 지 남편히 분명 있을낀데" "...." 경찰은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서계특은 어제 남편이 남대구경찰서로 끌려갈 때 뒤따라간 시아주버니가 생각났다. '시아주버님은 어디 가셨을까?'

그는 경찰서 근처의 국밥집에서 시아주버니를 발견했다. "아주버니요. 성기 아버지 어디 있는교?" 깜짝 놀란 채병철은 "제수씨 오셨는교. 글쎄요. 지가 쪼금 전에 올 때까지만 해도 경찰서에 있었는디요?"라고 했다.  결국 그는 중간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경찰서에 가봅시다"라며 앞장섰다.

다시 남대구경찰서에 갔지만 경찰서 정문까지만 갈 수 있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정문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계특은 작은 목소리로 곡을 했다. 채병철 역시 정신줄을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젯밤을 경찰서 정문에서 꼬박 새운 그가 아침에 잠시 밥을 먹으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 동생이 어딘가로 갔으니, 제수씨 볼 면목이 없었다.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라도 알면 제수씨한테 덜 미안했을 터이다.

어젯밤 경찰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동생 채병표를 연행했다. 채병철은 '송아지 한 마리 값을 경찰서에 갖다주면 풀려 난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그는 급하게 송아지 한 마리를 내다팔고 그 돈을 경찰관한테 주라고 지인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그의 고생에도 채병표는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에 끌려가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송아지 판 돈이 배달 사고가 난 것이다.

"울 집에 얘기 좀 해 주이소"

한국전쟁 전후로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에서 불법학살된 사람은 채병표만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발발 40일 전인 1950년 5월 15일 경북 청도군 매전면 지전리. 소년 예대만(1940년생)은 그날따라 배가 아파 학교에 결석했다. 엄마는 밭 메러 가고 아버지 예쾌명은 소죽을 쑤고 있었다. "이 집이 예쾌명씨 댁이요?" "그렇소만." "잠시 (경찰)서에 갑시다." 

"왜 이러십니까? 내가 뭔 죄가 있다고 이러는교!" 발끈한 예쾌명에게 경찰들은 몽둥이 찜질을 가했다. '아이쿠' 예쾌명의 비명에도 몽둥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입과 코, 귀에서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 예대만은 부들부들 떨며 울기 시작했다. 아들의 울음소리에도 경찰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예쾌명의 몸이 축 늘어졌다. "당신 이리 와!" 경찰은 예쾌명의 이웃 최수식을 지목했다. 그렇게 해서 최수식은 기절한 예쾌명을 들쳐업고 경찰을 따라갔다. 매전지서를 경유해 청도경찰서에 구금된 예쾌명은 며칠 후 경찰서 GMC트럭에 올라탔다. 그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땅'으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비포장도로를 달린 트럭은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에 멈췄다. 트럭에서 내린 예쾌명은 산골짜기로 이동하면서 트럭운전수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짧게 이야기했다. 그 운전수는 청도경찰서 소속이었지만 예쾌명과는 안면이 있었다. "보이소. 대만이(장남), 정만이(차남), 창만이(삼남)가 내를 찾으러 오거들랑 (여기서 죽었다고) 얘기 좀 해 주이소." 짧은 부탁이었지만 운전수는 무슨 얘기인지 알아차렸다. 무언의 끄덕거림이 오갔다.

얼마 후 예쾌명의 행방이 궁금했던 가족들은 청도경찰서를 찾아 이곳저곳에 문의를 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실망한 가족들에게 트럭 운전수가 다가와 말했다. "가창골로 가 보이소." 그렇게 해서 가창골로 간 예쾌명의 가족은 어렵지 않게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증언자 예대만(예쾌명의 아들)
 증언자 예대만(예쾌명의 아들)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종로 경찰들이 죽였다" vs "강원도 경찰이 죽였다"

"죄 없는 사람들을 와 이리 많이 죽였노?" 1960년 도윤기는 청도경찰서 매전지서 경찰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는 10년 전 경북 청도군 청도읍 곰티재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그런 도윤기에게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그기 우리가 한 게 아이고... 종로경찰서 경찰들이 와 한 기라예." 도윤기는 서울 종로경찰서 경찰들이 청도 곰티재에 내려와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한 그 말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과연 사실일까? 다른 지역 경찰이 와서 사람들을 죽였다는 얘기는 충북 지역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006년 필자는 어렵사리 6.25 당시에 청주경찰서 사찰과에 재직한 김덕수(가명)를 찾을 수 있었다. 김덕수에게 보도연맹 가해자 집단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보도연맹원들을 총살한 사람은 청주경찰서 경찰들인가요?"

"뭔 소리여! 우리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당시에 현장에 동원된 동료들 말에 의하면 강원도 경찰들이 와서 죽였다고 하더만."

순간 고개가 갸웃했다. '정말 그런 건가'하며 관련 자료를 뒤졌다. 하지만 충북 청주에 강원도 경찰이 잠깐이라도 왔다는 기록은 없었다. '강원도 경찰' 이야기는 비단 김덕수만의 말이 아니었다. 청주형무소 간수(현재의 교도관)였던 윤필수(가명)도 마찬가지였다. 강원도 경찰이 와서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정치사상범을 청원군 남일면 분터골로 끌고 가 헌병의 지휘 하에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경찰과 간수 들이 입을 맞췄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도 당시 민간인학살사건의 가해자를 해당 지역에 주둔한 군인과 경찰이라고 진실 규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찰과 교도관들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사건에서 치부를 숨기고자 가해자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경우회(전직 경찰들의 모임)나 교정동우회(전직 교도관들의 모임)가 역사적 전쟁범죄를 조직적으로 은폐시키려는 시도를 행한 것으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 장례식에 대한 아쉬움

23세에 남편 채병표를 잃은 서계특은 1남1녀의 자식을 키우느라 평생을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했다. 둘째를 낳은 날 남편을 찾으러 하혈을 하며 16km를 걸은 그녀는 악착같이 살았다.

그랬던 서계특은 지난 2021년에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런 엄마의 고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채성기(1948년생,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고 싶었다. 하지만 장례식은 코로나 때문에 약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채성기의 마음 한켠에 쌓인 또 하나의 한이다.

태그:#남대구경찰서, #한국전쟁, #가창골, #경찰, #민간인학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