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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지금 나는 1884년 6월 2일 조선 왕국의 서울에 도착하여 한두 달 사이에 내 눈에 비친 조선의 편린을 되살려 보고 있습니다.

서울의 도심 바로 한가운데에 종각이라고 불리는 곳에  큰 종이 걸려 있었습니다. 매일 밤 여덟시 반 경이 되면 종이 서른 세 번 울립니다. '부우우우웅' 하고 길게 울려 도성 전체에 퍼지지요. 그 소리와 함께 성문은 닫히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리엔 인적이 거의  끊기는데 희한한 일은 이 시각으로부터 새벽 1시까지 여자들의 외출이 허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양가집 여성은 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낮에 하층계급의 여성을 볼 수는 있지만 모두 얼굴을 보자기로 덮고 있지요. 그들은 보자기에 난 구멍으로 빼꼼히 밖을 내다봅니다.

조선 여성의 치마는 일본과 중국 여성의 것보다는 서양 치마와 더욱 비슷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매우 특이합니다. 옷감의 색상은 보통 청홍색인데 허리 부근을 잘끈 묶고 어깨 밑은 조이는 것 같았습니다. 치마 폭이 매우 넓으며 앞뒤가 부풀려 있는 풍선 패션(baloon fashion)입니다.

치마 속에는 통이 넓은 속곳을 입는데 발목을 동여맵니다. 치마 위로는 저고리를 입는데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고리 소매는 매우 길어 팔을 다 덮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하단의 길이는 고작 10인치 밖에 되지 않아 가슴을 채 덮지 못합니다. 가슴은 저고리와 치마 사이로 드러나 있어 눈에 띄입니다.

머리는 보통 땋는데 매끈하게 뒤로 넘겨 목 뒤에서 쪽을 짓고 거기에 기다란 은비녀를 찔러 넣습니다. 나는 얼굴이 아주 예쁜 여자들도 더러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토담 벽 안에서 창백하게 살아갑니다.

고종 임금을 알현했을 때의 일입니다. 사방이 창호지를 바른 문짝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궁녀들이 문짝 뒤에서 우리 서양인을 엿보려고 안달하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매 1분 정도 마다 '푹!' 하고 창호지가 뚫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였어요.

엿보려고 구멍을 내는 것이었지요. '푹!'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에 침을 발라 창호지를 적신 다음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는 영리한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사방을 둘러싼 문짝에 뚫린 구멍 구멍 마다에서 까만 눈동자들이 빛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예고없이 변수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여인들이 차 모임 같은 걸 하고 있던 중이었나 봅니다. 부인과 소녀들의 수효가 여덟 내지 열 명 정도로 보였습니다.

불쑥 나타난 나를 본 여인들은 기겁을 하더군요.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문지방을 뛰어넘으면서 서로에게 넘어지고 엎어지지를 않나, 어린애들과 단지를 발로 밟지를 않나… 그런 요란 법석은 세상에도 없을 것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남편이나 가까운 친척 외에는 다른 남자를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외계 생물체 같은 서양 남자였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마침 변수는 그때 집에 없었는데 나중에 그 일을 말하자 그가 "내 집에서 큰 말썽을 부렸군요" 말하며 웃더군요.

길을 가다 보면 여성들이 나를 보고 달아납니다. 어쩌다 외출을 하는 여인들인데 모두 머리에 보자기를 둘러쓰고 있었습니다. 내가 눈에 띄었다 하면 그녀들은 어디 구석이나 골목, 가게 같은 곳으로 냅다 달아나 버리더군요. 그러고서는 한쪽 눈으로 나를 엿봅니다. 조선의 소년 소녀들은 매우 예쁘고 귀여웠습니다.
 
"조선의 소년 소녀들은 그지없이 예쁘답니다. 포동포동하고 하얀 피부에  양 볼은 붉고  눈동자와 얼굴은 밝으며 치아는 썩 하얗답니다. Korean boys and girls are just as pretty as they can be, plump, quite white with red cheeks, bright eyes and faces, and good white teeth." - 1884.7.2일자 편지에서 
 
 
한편, 길거리는 너댓 살 난 꼬맹이들로 늘 왁자지껄합니다. 옷을 벗은 꼬마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길가의 도랑에서 놀더군요. 꼬맹이들은 내가 어디를 가나 이렇게 소리칩니다.
 
"어머니! 어머니! 이 외인 보(아) O-moni! Omoni! ee wai-in po-o:Mama, Mama, see this outside man)" - 1884. 7.22 일자 편지
 
 
어른들은 대부분 완고했고 보수적이었으며 중국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지배층의 남자들이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중국 청나라가 그들의 자주 독립과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중국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앞길을 가로막는 그 어둠의 중심에 민영익이 있었습니다. 그는 민왕후의 조카로서 당대 최강의 실세였고 최초의 방미사절단의 수장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자였습니다.

당연히 조선의 개방 개혁에 앞장서야 했던 그는 그 모든 기대를 저버린 채 친청 사대주의의 선봉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는 조선에 오자마자 부모님께 이렇게 썼습니다.
 
"민영익 공이 잘 못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 놀라실 거예요. 그는 서양을 그렇게 견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 깊이 모화주의자입니다(a Chinese lover at heart). 그리하여 그는 실제로 나라의 진보 발전을 역행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가 그럴지는 예언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얼마 후에는 변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국왕과 동포들을 실망시킨 게 확실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 1884.6.15일자 편지
 
 
민영익은 운명적으로 수구파 세도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직 일신의 안위와 영달에 급급했고 그러한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는 늘 좋게 생각하고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내게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실망과 함께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민영익 , #치마 저고리, #조지 포크 ,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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