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1 14:46최종 업데이트 22.04.0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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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의 졸업식 ⓒ 박철현

 
얼마 전 장남의 일본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첫째 딸과 둘째 딸도 이 학교를 졸업했으니 세 번째 졸업식이다. 넷째도 이 학교 3학년이기 때문에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학교에 신세를 좀 더 져야 한다. 문제는 여전히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들의 친구, 학부형, 선생님들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초등학교를, 그래도 이래저래 열 몇 번은 방문한 것 같은데, 인사를 나눌 때마다 '아, 소문으로만 듣던 누구누구 아빠구나'라는 멋쩍은 시선이 느껴진다.

이리 된 건 우리 아이들 잘못도 있다. 큰 딸, 작은 딸, 큰 아들, 작은 아들 모두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졸업식에서도 어김없었다. 6학년 졸업생이 80여 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한 명씩 30초 정도의 졸업 스피치 동영상을 미리 촬영해 본 행사 전에 틀어 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중학생으로서의 포부, 그리고 부모님 혹은 초등학교에 대한 감사인사다. 다른 친구들은 무난한 내용, 이를테면 "중학생이 되면 공부나 스포츠를 열심히 할게요, 지금까지 잘 키워주신 부모님,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정도로 스피치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달랐다. 처음엔 자연스러웠다. 중학생이 되면 엄마 말을 더 잘 듣고, 공부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참, 사실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참, 사실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 박철현

 
내 본업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부모들로 가득 찬 학교 체육관은 금세 폭소의 도가니로 빠져 버렸다. 첫째와 둘째는 4년 전과 2년 전 치마저고리를 입고 졸업식에 참석해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더니만, 셋째는 세상 다시없을 환한 얼굴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아이들조차 이러니 다른 사람들도 헷갈릴 수밖에 없다. 현재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고, 간혹 라디오에 출연하며, 책도 몇 권 써 냈으니 당연히 나를 작가나 저널리스트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칼럼을 통해 내 이름은 알고 있지만 실물을 처음 보는 한국 분들은, 명함을 건네는 순간 십중팔구 깜짝 놀라며 반문한다.

"공무점? 아니 인테리어 하시는 분이셨어요? 와..."

그렇다. 내 본업은 한국식으로 보자면 인테리어 업종이다. 하지만 순수한 인테리어는 아니다. 수도, 전기, 가스 등 각종 설비 공사에 페인트, 방수 공사도 하니 익스테리어도 포함된다. 창고 정도는 직접 지으니까 건설업에도 한 발짝 걸쳐 있다. 사람과 관련된 공간에 관한 일은 거의 다 한다고 보면 된다. 2018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매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시국을 맞이해, 우리와 사이즈가 비슷한 다른 소규모 공무점들이 휴폐업을 하는 와중에도 우야든동(어쨌든) 버텨냈다.

사실 우리 공무점의 장점은 일본 현장과 한국 현장의 괜찮은 부분을 섞은 것이었다. 일본 업체의 견적은 기본적으로 단가가 세고 공사기간이 길다. 그 대신 상대적으로 매우 세밀한 마감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즉 완성도를 매우 중시한다. 반면 우리는 단가가 싸고, 공사기간도 짧은 반면 마감은 일본 업체만큼 세밀하게 따지지 않는다. 보통이라면 높은 완성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공사를 하다보면 쓸데없는 완성도가 존재한다. 카운터 바 테이블의 곡선 각도나 구배 경사 1도 차이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 가게 손님은 물론, 심지어 일을 맡긴 클라이언트조차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공무점 창고를 방문한 아이들. 창고까지 보여줬는데도 여전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다니! ⓒ 박철현


누구는 이런 모습을 일본의 장인정신이라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정작 일을 맡기는 클라이언트 생각은 다르다. 마감을 빨리 끝내고 하루라도 빨리 영업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아니 사실 그런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게 안 됐다. 왜냐면 우리와 비슷한 규모라 할 수 있는, 연 매출 1-2억 엔 정도의 소규모 일본 공무점들은 마치 카르텔이라도 맺은 양 거의 대부분 비슷한 공사금액과 기간을 그들에게 제출했던 것이다. 전부 다 그러하니 공사는 당연히 그러한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그 틈새를 파고 들어가 싼 금액과 단축된 공기로 영업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완성도가 형편없다는 건 아니다. 그들이 100점이라면 90점 이상은 했으니까. 10점 적게 받는 대신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선택지를 제시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90점을 원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지난 4년간 성장할 수 있었다.

위기
 

일본 도쿄 증시의 대표 지수인 닛케이225 평균주가가 급락한 7일 도쿄 시내의 증시 전광판 앞으로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닛케이 지수는 이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국제 유가 급등 영향으로 장중 900포인트가 넘게 하락했다. 2022.3.7 ⓒ 연합뉴스

 
하지만 이 버팀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가장 큰 문제는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자재 값이 너무 올랐다. 1000엔 하던 0.5평짜리 합판 한 장이 1800엔이 됐고, 400엔 하던 20㎏짜리 시멘트 한 포대는 500엔이 됐다. 그나마 이런 자재들은 구할 수는 있지만 반도체가 들어가는 제품들, 예를 들어 리모트 컨트롤 시스템의 변기 비데는 아예 구할 수가 없다. 주문하면 3-4개월은 기본으로 걸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발생한 가솔린 가격 및 석유화학 제품의 가격 상승도 발목을 잡았다. 공사를 하면 차로 이동해야 하는데 가솔린 가득 채우면 작년까지 8000엔 하던 게 지금은 11000엔까지 올라 버렸다. 공사 의뢰를 받을 경우 이런 자재 인상분을 감안해 견적서를 써야 한다. 당연히 견적 금액이 올라간다. 우리의 장점 중 하나였던 공사 가격에서의 경쟁력이 사라진다.

물론 다른 일본 업체들도 가격이 비싸지지만, 문제는 이렇게 되면 처음에 공사를 맡기려고 마음먹었던 클라이언트들이 "좀 참지 뭐..."라고 아예 버텨 버린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물류대란, 원활하지 못한 반도체 수급,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TV 에서나 보던, 남 이야기라고 느꼈던 뉴스들이 도쿄 변방 조그마한 공무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또 웃긴 게, 그렇게 몇 개월을 버티다 보니 3월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공사의뢰가 서너건 연속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공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무실 운영비, 인건비 정도는 나오는 규모의 공사인데, 클라이언트가 견적서 협상을 전혀 안 한다. 솔직히 좀 비싸게 썼는데도 무조건 오케이를 외친다. 시간과의 승부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그렇게 3월 들어 일주일에 하나씩 뚝딱뚝딱 완성시키고 있는 공사는, 바로 도쿄도가 전액 보조금을 지급하는 '무료 PCR 검사장'이다.
 

우리가 3월 내내 공사한 무료 PCR 검사장들. 도쿄 내에만 세 군데를 만들었고 현재 네 군데째를 만들고 있다. ⓒ 박철현

 
반전

지금 일본은 2월 5일 일일 확진자 10만 5603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확진자 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지만 그래도 일 5만 명은 기록하고 있다. 특히 3월 28일부터 다시 증가추세다. 도쿄의 경우 전주 대비 20% 포인트 이상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30일엔 9520명을 기록해 일일 확진자 1만 명을 다시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병원이나 클리닉, 보건소가 PCR 검사를 전담할 경우 의료 시스템이 또 붕괴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의사면허를 가진 사람을 책임자로 앉히고 그가 검체 회수 등을 책임진다는 가정 하에 일반인이 PCR 검사장 분원 개설을 신청할 수 있도록 임시조치를 취하고 있다. 2월 28일이 마감이었는데, 들리는 말로는 이 개설 신청 건수가 엄청났다고 한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만들어준 검사장의 운영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료로 하는데, 검체 하나당 도쿄도로부터 1만 1500엔을 지급 받는다. 사업자 검사비용으로 8500엔, 운영 인건비로 3000엔. 검사비용에 검사 키트 가격과 송료 등이 포함돼 있고, 인건비는 검사 받으러 온 사람들 안내하고 검체 키트 받는 운영직원들에게 할당된 몫이지만 직원들은 일당제로 고용되기 때문에 검사 한 건당 3천엔이 아니라 하루 일당 1만엔 정도를 지불한다. 계산해보니 하루 다섯 건 이상만 하면 무조건 남는다. 검사 받으러 오는 사람들도 돈이 하나도 안 드니까 그냥 지나가다가 들어온다. 증상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다. 하루에 50명만 받아도 50만 엔이 넘는다. 그러니 다들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또 "신청 기간 끝났으니 말하는 건데, 이거 해서 3억 엔 정도 번 곳도 있다"며 "일단 도쿄도는 이 제도를 6월말까지 한다고 하는데 이 추세로 계속 코로나 확진자 수가 나온다면 아마 연기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일견 세금낭비처럼 보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일리 있는 정책이다. 시민들 입장에선 PCR 검사를 공짜로 받을 수 있고, 도쿄도 등 지자체는 의료시스템 붕괴를 막을 수 있다. 일본도 1, 2차 백신 접종률은 80%에 달하기 때문에 백신 접종자들에게 오미크론 감염 증상이 나타날 경우 당사자는 물론 밀접접촉자들까지 일일이 병원, 보건소, 클리닉 등에서 PCR 검사를 받는 건 비효율적이다. 검사장 운영자에게 지급하는 보조금도 시민들이 낸 걸 복지 차원에서 돌려주는 거라 생각하면 별로 아깝지도 않다. 적어도 시민들 눈에 보이는 세금 지출이니까.
 

무엇보다 이들이 검사장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해 준 덕분에 나도 몇 달 더 버틸 수 있게 됐다. ⓒ 박철현


무엇보다 이들이 검사장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해 준 덕분에 나도 몇 달 더 버틸 수 있게 됐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영업은 기본적으로 힘들다. 본인의 방만한 경영방침 때문에 업장이 망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번처럼 한낱 자영업자가 어찌할 수 없는 여러 문제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동시다발로 터진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무조건 버텨내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엔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막내가 어엿한 사회인으로 독립하는 모습은 지켜봐야 하니까. 모든 자영업자들의 '버팀'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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