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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출격했던 일본 해군 제2함대가 규슈 남방 해역에서 미 해군의 공습을 받고 궤멸됐다. 1944년 이래 급격하게 가속화된 제국 일본의 몰락을 상기한다면 이날의 참패 역시 양측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는 결과였으리라.

문제는, 이날 궤멸한 제2함대가 사실상 일본 최후의 해상 전력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작전에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함대가 쓰러지면서, 일본 해군에 의한 해상 작전은 더 이상 불가하게 됐다. 일본 해군의 존재는 그 전략적 의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제2함대의 궤멸은 단순히 일본 해군의 실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격침된 함선 목록에서 단연 돋보이는 '전함 야마토(戦艦大和)'는 제국 일본이라는 국가의 실패,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관통해오던 총력전 체제의 실패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길이 263.8m, 주포 구경 46cm, 배수량 7만2809톤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전함으로 명성을 떨치던 야마토는, 미군에게 유효타를 입히지도 못한 채 무력하게 수장됐다.

전함 야마토, 탄생부터 예고됐던 전쟁... 러시아 다음은 미국이었다
 
일본에서 2019년 개봉한 영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은 전함 야마토를 건조하고 이를 발판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벌이려는 일본 해군 내 과격파들의 음모를 주제로 하고 있다.
▲ 영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에 묘사되는 전함 야마토의 침몰 일본에서 2019년 개봉한 영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은 전함 야마토를 건조하고 이를 발판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벌이려는 일본 해군 내 과격파들의 음모를 주제로 하고 있다.
ⓒ 영화 공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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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야마토는 탄생부터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예고했다. 미국과 영국, 일본의 해군 전력 보유량을 제한했던 워싱턴 군축 조약과 런던 군축 조약이 파기된 이후, 일본해군은 1937년부터 전함 야마토의 건조에 돌입했다. 규모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함 야마토의 건조는 일본의 국력에 부담이 되는 사업이었지만 해군 내 주류세력은 완강하게 전함 야마토 건조를 추진했다. 전함 야마토의 건조는 장차 다가올 미국과의 결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에서 숙적 러시아 해군을 대파했다. 러시아 해군이 더 이상 일본 해군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일본 해군은 새로운 가상적국으로서 미국을 설정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미국과의 대치는 일본 해군이 제국의 지도부 내에서 그 존재 의의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즉 언젠가는 다가오게 될 미국과의 싸움을 전제할 때야 비로소 일본 해군의 팽창과 예산확보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해군 내 온건파들과 민간 정치인들은 일본의 국력이 미국, 영국과의 무제한 군비경쟁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봤으므로 군축 조약을 추진했다. 이에 해군 내 과격파들은 '천황이 해군 군령부에 위임한 통수권을 내각 따위가 침범할 수는 없다'는 논리로 강경하게 반발하며 정치적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본 내부의 소요, 국제질서의 혼란 속에서 결국 군축 조약은 휴짓조각이 됐다.

물론 다년간 미국에 대해 연구를 거듭해왔던 해군의 주요 장교들은 자신들이 가상적국으로 설정한 미국의 국력이 일본의 국력을 아득히 상회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더욱 야마토와 같은 거함거포 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격파한 쓰시마 해전의 결과가 러일전쟁의 승전으로 이어졌던 과거의 교훈이 미국과의 싸움에서도 적용되리라 봤다. 즉 객관적 국력이 열세에 놓여 있다 해도, 미 해군 주력함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전쟁의 흐름 자체도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결정적 함대결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더 크고 강력한 전함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있어 그 전함 건조를 제한하는 군축 조약은 일본의 승전 가능성을 잘라버리는 매국 행위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가상적국인 미국과의 함대결전에서 승리하고자 했던 일본 해군의 지도자들은 사상최대 규모의 거함거포 전함을 건조하고자 했다.
▲ 전함 야마토의 건조 가상적국인 미국과의 함대결전에서 승리하고자 했던 일본 해군의 지도자들은 사상최대 규모의 거함거포 전함을 건조하고자 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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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증강의 족쇄가 사라진 현실 위에서, 일본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거함거포 전함의 건조에 매진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거함거포 전함 야마토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 16일에 취역한 전함 야마토는 일본 해군의 지도자들로부터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결과를 좌우할 최종병기로 믿어졌다.

언젠가는 벌어질 함대결전을 위해, 해군의 지도자들은 전함 야마토와 그 자매함 전함 무사시(戦艦武蔵)의 출격을 자제했다. 이들은 러일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역시 미 해군이 일본 근해로 진격해오는 과정에서 손실과 피로가 누적됐을 때 비로소 결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쓰시마 해전을 뛰어넘을 그 결전의 날에 다다를 때까지, 최종병기 야마토급 전함은 반드시 아껴둬야 했다.

일본 해군의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여겨지던 야마토와 무사시의 출전이 유예되면서, 그 공백은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하는 기동부대가 채우게 됐다. 진주만 공습에 투입된 일본의 항공모함들은 전함을 주축으로 한, 미 태평양 함대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마찬가지로, 전함을 주축으로 하던 영국 동양 함대 역시 일본 해군기의 공습을 받고 말레이 해전에서 허무하게 궤멸됐다.

함대결전을 위해 전함 야마토를 아끼던 일본 해군의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그토록 집착하던 함대결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더 강한 거함거포 전함을 보유한 세력이 아니라, 더 강한 항공전력을 보유한 세력이 앞으로 바다를 지배하게 된다는 전쟁사적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미 해군이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절치부심한 것과 대조적으로, 정작 그 전환을 직접 이뤄낸 일본 해군은 여전히 함대결전 사상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 대가는 파국이었다. 1944년 이후, 일본 해군 항공대는 더 이상 미 해군 항공대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뒤늦게 보충된 일본 해군의 항공전력은 제 역할을 해낼 수 없었다. 일본군의 방어선은 붕괴됐다(관련 기사: "흥폐가 너희 어깨에 달렸다" 일본군 '노오력' 신화의 침몰).
 
전함 야마토는 전쟁 내내 그 투입이 자제되었고, 일부 제한된 참전에서조차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거함거포 전함의 효용성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 미 해군기의 뇌격을 피해 회피기동하는 전함 야마토(시부얀 해전) 전함 야마토는 전쟁 내내 그 투입이 자제되었고, 일부 제한된 참전에서조차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거함거포 전함의 효용성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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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야마토와 전함 무사시는 미군에게 유효타를 입힐 마지막 기회였던 1944년 10월의 레이테 만 해전에서조차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후 전함 무사시는 격침됐고, 전함 야마토는 이른바 '본토결전' 대비를 위해 본국에 정박하게 됐다. 최종병기로 여겨졌던 거함거포 전함들은 결국 세금만을 빨아들였을 뿐, 전쟁의 향방에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분명해졌고, 일본 해군이 고대하던 함대결전의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애물단지가 돼버린 전함 야마토가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그대로 종전을 맞았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으리라. 1945년 4월 1일,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 시작되면서 전함 야마토는 건조 당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처참한 결말로 빨려 들어가게 됐다.

오키나와의 다음은 일본 본토가 될 것이었으므로, 일본 육해군의 지도자들은 오키나와 사수에 사활을 걸었다. 이들은 천호작전(天号作戦)을 발령하고 모든 가용 전력을 오키나와에 쏟아부을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도합 2천 여기의 가미카제 특공기가 오키나와의 바다로 내몰렸다.  
 
미군은 전함 야마토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자매함 무사시의 격침 사례를 참고해 작전을 기획했다.
▲ 1945년 시점의 전함 야마토를 묘사하는 미군측 자료 미군은 전함 야마토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자매함 무사시의 격침 사례를 참고해 작전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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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로 점철된 저항 속에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전함 야마토를 비롯한 일본 해군의 잔존 수상함대에 쏠리게 됐다. 항공전력들도 '특공'에 총투입되고 있는 마당에 수상전력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문제제기가 일본 해군의 내부에서 불붙게 됐다. 일본 연합함대 참모로서 종군했던 치하야 마사타가 전 중좌는 저서 <일본해군의 전략발상 : 패전 직후의 통한의 반성>(1982)에서 당시의 기류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설사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다 해도 조금이라도 전투력이 있는 것이라면 전장으로 투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야마토 등을 본토결전용으로 남겨놔 봤자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없지 않은가. 항공부대가 특별공격을 실시하고 있는데 수상부대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꽁무니를 빼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는 목소리가 군령부 내에서 갑자기 커졌다. 그것은 이미, 작전이라기보다는 정신론에 지나지 않았다."(273p)

야마토를 비롯한 잔존 함대를 모두 투입해 봐야,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해군의 지도자들 모두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야마토 출격의 전략적 의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오키나와 사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는 정신론에 경도돼 아무런 가망도 없는 죽음의 작전으로 야마토를 몰아세웠던 것이다. 야마토를 출격시킬 연료마저 부족하자, 심지어는 '어차피 생환 가능성이 낮으니 편도 연료만을 채우자'는 극단론까지 튀어나왔다.

믿었던 '최종병기'의 결말, 4000명 넘는 해군이 목숨을 잃었다
 
불침전함으로 여겨졌던 전함 야마토는 미군기의 공습으로 허무하게 격침되었다.
▲ 미군의 공격을 받고 폭발하는 전함 야마토 불침전함으로 여겨졌던 전함 야마토는 미군기의 공습으로 허무하게 격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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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야마토는 왕복 연료를 확보하고서 출격할 수 있었지만, 이미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야마토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개죽음'에 몰린 야마토 승조원들 사이에서는 불안과 동요가 퍼졌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지인 오키나와에 채 닿기도 전에 미 해군의 공습에 마주하게 됐다.

거함거포 전함이 항공전력 앞에 무력하다는 것은 일본 해군 스스로가 개전 초에 증명한 바 있다. 한때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최종병기로 믿어졌던 전함 야마토는 일방적으로 뇌격을 얻어맞으며 무력하게 수장됐다. 이날 야마토를 비롯해 경순양함 한 척, 구축함 4척이 격침됐고 4044명의 일본 해군 수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미 해군이 잃은 것은 13기의 함재기뿐이었다.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삼았던 일본 해군의 야망은, 제국 일본의 전쟁은 야마토와 함께 그렇게 비참하게 침몰했다(관련 기사: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가상적국의 존재로 일본 해군은 스스로의 존재 당위를 설명하며 힘을 기를 수 있었고, 전함 야마토는 그 팽창의 가장 대표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야마토가 건조된 이유였던 미국과의 전쟁 역시 현실에서 벌어지게 됐다. 일본 해군의 지도자들은 야마토가 그들에게 승전을 안겨주리라 믿었지만, 말로는 파멸이었다.

가상적국의 설정, 이에 최적화된 무기체계의 확보와 운용이 마치 상식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과거 허망하게 수장된 야마토와 그 승조원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태그:#일본군, #아시아 태평양 전쟁, #전함 야마토, #오키나와 전투, #특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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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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