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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실시된 3월 24일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2022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실시된 3월 24일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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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가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들었던 고등학교 교내 동아리들이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신청한 고1 아이들이 아예 없어 끝내 문을 닫은 동아리도 있다. 수십 년 전통을 지닌 학교의 대표적인 동아리들인데,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걸 보면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반대로 가입 경쟁이 치열한 동아리도 있다. 적잖은 아이들이 면접에서 떨어진 뒤에도 담임교사 등을 찾아가 가입시켜 달라고 통사정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곳도 있다. 이름조차 생소한 걸 보면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신생 동아리가 대부분이다. 

근래 들어 동아리의 수와 분야가 크게 줄어든데다 수명마저 짧아졌다. 한두 해 반짝 활동하다 사라진 곳도 허다하다. 분야와 상관없이 학년 단위로 나누어 운영하는 동아리도 많을 뿐더러 같은 반 친구들보다 훨씬 끈끈했던 선후배 사이의 관계도 예년만 못하다. 

올해 축구와 농구 동아리의 몰락은 가히 충격적이다. 축구 동아리는 간신히 회원 수를 채웠지만, 농구 동아리는 끝내 고1 신입생의 외면 속에 해체를 결정했다. 한때 실력 테스트를 거치는가 하면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회원을 모집할 만큼 기세등등했던 동아리들이었다.

축구 동아리의 경우, 워낙 숫자가 많아 인근 근린공원까지 빌려서 활동할 만큼 대단한 인기몰이를 했다. 공식적인 유니폼이 이어져 내려왔고, 해마다 다른 학교의 축구 동아리와 정기적인 시합을 열기도 했다. 선후배 사이의 '군기'는 웬만한 군대 뺨칠 정도였다.

농구 동아리의 몰락은 더욱 안타깝다. 한때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국 단위의 농구대회를 열었던 학교여서다. 나름 지명도가 높은 대회여서 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선수들로 교정이 시끌벅적하기도 했다. 전국체전의 경기장으로도 사용된 체육관은 학교의 자랑이었다. 

록밴드와 통기타 동아리의 침체 역시 눈에 띈다. 화려한 조명 아래 학교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록밴드는 늘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돼왔다. 그런가 하면,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 통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들은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그랬던 록밴드는 한 달이 지나도록 세션을 꾸리지 못하고 있다. 보컬과 기타 주자 한 명씩만 가입 신청을 한 상태다. 드럼과 베이스 기타, 키보드를 담당한 고1을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급기야 동아리 대표가 고1 교무실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읍소할 지경이다. 

통기타 동아리는 끝내 방과 후 수업의 한 꼭지로 흡수된 모양새가 됐다. 통기타를 전공한 음악 교사가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이라 동아리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다음 학기에는 또 다른 아이들이 신청할 테니 선후배 관계가 맺어지기도 어렵다.

대입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운동과 음악 등 예체능 관련 동아리가 몰락한 이면엔 이른바 '학술적인' 동아리의 급성장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인문 사회과학 분야는 아예 없다시피하고 죄다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를 다룬 동아리들이다. 로봇과 드론, 인공지능, 블록체인, 메타버스 등과 관련된 것들이 다수다. 

그중에도 생명과학 관련 동아리는 가장 경쟁이 치열했다. 오랜 전통을 지닌 곳도 아닌데다, 지금껏 내로라하는 활동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도 가입 신청이 폭주해 동아리 담당 교사조차 의아해했다고 한다. 마치 월드컵 기간에 불어닥친 축구 열기처럼 느껴지더라는 거다.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는 동아리들의 인기몰이가 낯설다. 불과 한두 해 전에 생긴 곳들이라 귀감이 될 선배들도 없고 지도교사도 해마다 바뀌는 통에 전문성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생명과학 동아리가 가장 인기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유행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떡상한' 생명과학 동아리의 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시나 열쇠는 대학 입시가 쥐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 동아리 활동이 대입에 직접적 도움이 되는지를 우선 꼼꼼하게 따져본다고 말했다. 학교생활의 꽃이라는 동아리 활동도 대입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거다. 

생명과학 동아리에 가입한 아이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이 최상위권이다. 공부 잘하는 그들의 흥미와 적성이 죄다 생명과학 분야에 꽂혔을 리 없건만 참으로 공교롭다. 탈락한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또 다른 생명과학 동아리를 새로 만들려는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다. 

순식간에 궁금증이 풀렸다. 하나같이 의치대를 지망하는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의치대 입시 전용 생활기록부를 위해서는 동아리 활동조차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교과 1등급 아이들끼리의 경쟁이라면 동아리 활동은 '전공 적합성'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3년간 축구나 농구 동아리 활동을 했다면, 생활기록부에 뭘 써줄 수 있을까요? 기껏해야 체력을 키우고 팀워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정도겠죠. 생명과학 동아리라면 어떨까요? 활동 내용이 무엇이든 일편단심 의치대 진학을 준비해왔다는 걸 어필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학교생활은 과연 뭘까

학년 초 아이들이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보고 알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흥미와 적성은 몰라도 장래 희망은 한결같이 의사였다. 중학교의 내신 성적이 얼추 20% 안에 드는 아이들은 서로 보고 베끼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 다른 반에서도 '의사 아홉에 약사 하나'가 공식이었다.

눈에 띄는 건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성적 분포에 따라 두 종류로 획일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사를 꿈꾸거나, 아직 꿈을 정하지 못했거나. 얼마 전 아이들과 진로 관련 상담을 한 외부 전문가는 진로 탐색 활동이 무의미할 정도로 의치대 선호가 두드러졌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아이들 모두 의사를 꿈꾸도록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성장해온 결과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성적만 되면 무조건 의치대에 가고 싶다고 선선히 말하는 아이들 앞에서 적성과 흥미도 검사 결과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다. 언젠가부터 진로 탐색 활동은 중하위권 아이들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전락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입이 교육과정을 손에 쥐고 흔들어대더니, 경제적 양극화와 취업난이 맞물리면서 이젠 아이들의 꿈조차 획일화되고 있다. 여태껏 서울대, 연고대에 진학하기 위해 애면글면했다면, 지금은 의치대를 향한 무한경쟁의 시대다. 내로라하던 서울대 공대보다 '지잡대' 의치대가 백 배 낫다는 건 이제 고1 아이들에게도 상식이다. 

생명과학 동아리에 들어가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던 한 아이는 벌써 고2와 고3 때 선택해야 할 과목을 줄줄 꿰고 있었다. 어떤 과목이 의치대 진학에 필요하고 표준점수 환산에 유리한지를 정확히 간파한 셈이다. '대입은 지략 대결'이라는 그에게 학교생활은 과연 뭘까 싶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해서 교사가 되어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마 선생님이 마지막 세대일 걸요?"

고1 전체 225명 중에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겠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못내 서운하다고 했더니, 한 아이가 대꾸하듯 내뱉은 말이다. 사학과는 '루저'들이나 가는 학과라는 거다. '문송하다'는 말 듣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는 그의 바람 역시 '성적만 되면 의치대'였다.

태그:#의치대 선호 현상, #동아리 활동, #학벌 구조, #진로 탐색 활동, #문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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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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