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5 06:03최종 업데이트 22.04.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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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프랑스 대선 1차 투표 집계 결과가 스크린에 표시되고 있다. ⓒ AP=연합뉴스

 
지난 10일 열린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다수의 예상대로 현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후보가 나란히 1, 2위를 차지해 결선 투표로 향했다. 향후 5년 프랑스를 이끌 차기 대통령은 2주 후 24일 열리는 결선 투표에서 최종 결정된다. 이번 선거는 현재 프랑스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전후 프랑스를 이끌어온 드골주의-사민주의 체제가 크게 균열하고, 다양한 대안 정치 세력들이 저마다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그들의 함량은 여전히 국민 눈높이에 미달한다. 그렇다고 기존 정치 구도에 국민 신뢰가 다시 돌아갈 가능성도 요원하다.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 정치뿐 아니라 지구촌 민주주의 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현실을 반영한 결과라는 평가도 나온다.

민주주의의 위기

공식 결과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가 1차 대선 투표에서 전체 투표수의 27.85%를 얻어 선두를 차지했고, 2위 마린 르펜 후보가 23.15%를 얻어 역시 결선에 합류했다. 3위는 21.95%를 얻은 진보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장 뤽 멜랑숑 후보에게 돌아갔다. 물론 3등에게 결선행 티켓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20% 이상을 얻은 멜랑숑 후보는 마크롱, 르펜과 함께 3강 구도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밖에 극우 성향 '재정복'을 이끄는 에리크 제무르(7.07%), 온건 전통 우파 '공화당'의 발레리 페크레스(4.78%), 진보 성향 '녹색당'의 야니크 자도(4.63%), 온건 우파 '저항하자'의 장 라살(3.13%), '프랑스 공산당'의 파비앵 루셀(2.28%), 드골주의 우파 니콜라 뒤퐁에냥(2.06%), '사회당'의 안 이달고(1.75%), 그리고 두 명의 트로츠키주의자 필리프 푸투(0.77%), 나탈리 아르토(0.56%)가 뒤를 잇는다. 
 

프랑스 대선후보들. 왼쪽부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극우 지도자 마린 르 펜, 보수당 후보 발레리 페크레세, 극우 무소속 후보 에리크 제무르. ⓒ AP/AFP=연합뉴스

 
다른 나라 대선 출마자 성적을 굳이 모두 알 것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몇몇 포인트는 주목해볼 만하다.

우선 사회당 후보가 얻은 1.75%는 1969년 이래 최악의 결과에 해당한다. 불과 5년 전까지 집권당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공산당보다 뒤진 이번 성적으로 사회당은 해체에 준하는 근본적 대수술이 불가피하게 됐다.

온건 진보 계열 가운데 녹색당이 선두에 선 결과는 향후 진보 정치의 방향성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최근 수년간 선거 결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독일의 경우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독일 녹색당은 현재의 집권 세력 내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임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보수 정권에마저 적지 않은 정책적 영향을 미쳤다. 유럽적 진보의 가치는 이제 한 세기만에 계급투쟁에서 환경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전통 우파 공화당이 얻은 성적 또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샤를 드골과 함께 시작된 제 5공화국 체제에서 공화당은 늘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집권 중에도, 야당일 때도 이들은 프랑스 가치를 가장 잘 대변한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거둔 성적은 5공 이래 최악에 해당한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미 이들의 손을 놓아버린 듯하다.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국가 경영의 전략도, 리더도,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보수는 어디로 가나

프랑스의 보수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마린 르펜(국민연합), 에리크 제무르(재정복) 등 유력 극우 세력이 1차 투표에서 얻은 득표수를 산술적으로 합치면 이미 30%를 넘어선다. 2차 투표에서 기타 보수 지지세의 일부, 그리고 진보 진영의 일부 반세계화 목소리가 합류하면 프랑스 정치사에서 최초의 극우 대통령 탄생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이들은 이미 제도권 정치의 불문율로 돼 있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내버린 지 오래다. 인간 개인 사고들의 깊은 내면에 있을 수 있는 인종, 종교, 성별 등에 근거한 차별의식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용인할 수 없다는 암묵적 동의가 이들에게는 위선으로 전락해 버린다.
 

에리크 제무르 프랑스 대선후보가 지난 22일(프랑스 현지시각) 파리 메종 드 라 라디오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2.2.22 ⓒ AFP=연합뉴스

 
특히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롤모델로 한다는 에리크 제무르 후보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저서 <프랑스의 자살>에서 '프랑스는 이민자와 동성애 문제로 자살의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린 르펜 후보가 집권 가능성을 높이면서 점차 중도의 색깔을 덧칠하는 사이, 제무르는 오른쪽 끝 빈 공간을 확실하게 자신의 영역으로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그도 기존 정치 틀이 아닌 보수 매체, 소셜미디어 등을 이용해 발언을 늘려갔으며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정치적 올바름'과 '모범생 시민'에 숨이 막힌다는 유권자들을 단숨에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만드는 놀라운 웅변력을 보여줬다. 한때 마린 르펜을 훌쩍 넘는 지지를 얻기도 했고 올해 초까지도 르펜과 비슷한 세력을 과시했으나 지지층의 사표방지 심리로 르펜 후보에 점차 밀려 결국 한자리 수 지지율로 떨어졌다.
 
어떻든 2주 후 열릴 결선 투표에서는 5년 전에 이어 마크롱 현 대통령과 르펜 국민연합 대표 간에 또 한 번 한판승부가 벌어진다. 프랑스 대선에서 같은 후보 두 명이 두 번 연속 결선에서 만나는 일은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후보 간의 리턴 매치 이후 41년만의 일이다.

26.31% 기권표의 함의

프랑스 정치의 지각변동 속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마크롱과 극우의 목소리 르펜 간의 라이벌 구도가 굳어지는 듯 보이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아울러 프랑스 정치에서 진보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평가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렇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특히 이번 1차 투표에서 26.31%의 기권표는 2002년 이후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 이들의 기권이 함의하는 정치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여전히 프랑스 유권자들은 중도-극우라는 새로운 양강 구도를 그들의 정치적 기본 토대로 인정하는 데 유보적이라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프랑스 정치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중앙과 지방의 밀착관계가 꼽힌다. 중앙무대의 유력 인사 상당수가 지방 행정의 단체장을 맡고 있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 한 도시의 시장을 겸임한다든지 장관 또는 총리가 도지사를 겸임하는 식이다.

사회당 이름으로 대선에 출마한 안 이달고 후보는 파리 시장이다. 대선 출마를 위해 시장 직을 내려놓지 않았다. 물론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시장 직을 내려놓겠지만 그 전까지는 시장 직을 유지하면서 선거를 치를 수 있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이러한 중앙-지방 겸직 또는 밀착 관계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정치 환경에서 볼 때 프랑스의 지방정치 무대는 여전히 기존 정치 세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전국 16개 광역단체장 가운데 9개 지역을 진보 세력이 차지했다. 그 중 사회당 출신 광역단체장은 5명. 보수 단체장의 구성도 중앙정치와는 딴판이다. 6개 보수 지자체장 가운데 극우는 한 명도 없다. 반면 공화당 출신 지자체장은 절반인 3명이다.
 

한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파리 8구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을 지나가고 있다. 2020.5.27 ⓒ 연합뉴스

 
이런 결과는 분명 이번 대선에서 보이는 중앙정치 판도와는 다른 양상이다. 말하자면 신진 정치세력은 그들이 차지하는 중앙 무대의 비중에 비해 여전히 지방 권력까지 깊이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도를 표방하는 마크롱 대통령이나 극우의 르펜 후보가 공히 안고 있는 고민이 바로 이 점이다. 프랑스 정치는 큰 파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심연까지 근본적으로 주류 세력을 바꾸지는 못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여전히 추이를 관찰 중이다. 때로는 신진 세력에 투표를 함으로써, 때로는 투표소에 가지 않는 방식으로 기존 정당에 경고를 보내는 것 뿐이다. 그들의 근본적 변화를 기다리면서. 어느 시대, 어느 정치 무대에서도 중도가, 극우 또는 극좌가 안정적 국정을 장시간 이끈 일은 없었다. 정치는 균형을 맞춘 좌우가 대립과 견제를 통해 그 중간을 도출하는 행위다. 그것이 결과로서의 중도이지 결코 정치 행위자가 중도를 표방한다고 중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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