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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마음속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크고 작은 욕구와 욕망들에 늘 줏대없이 휘둘렸다. 마흔을 넘어서자, 마흔을 '불혹'이라 칭한 공자님 말씀이 살짝 기대가 되었다. 이제 나도 하찮은 욕망쯤은 곧잘 넘기고 덜 후회하며 살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50이 코 앞이지만, 욕망에 초연한 담백한 일상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오늘도 투항합니다
 
   두뇌회전이 빨라지고 집중력이 높아져 커피를 약 삼아 마신다
  두뇌회전이 빨라지고 집중력이 높아져 커피를 약 삼아 마신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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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가 도대체 뭘 쓰고 싶은지 갈피를 잡지 못해 답답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이 제격이다. 커피를 마시며 가지는 여유로움 때문이 아니라 커피의 강력한 각성효과에 갈급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커피의 맛과 향에 찬탄하지만, 사실 나는 커피를 약 삼아 마신다.

마시고 나면 두뇌 회전이 빨라지고, 1시간도 어려운 집중을 2시간, 3시간 가끔은 4시간까지 가능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보약 같은 커피를 애용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마시는 잔의 수가 늘어날수록 자꾸 밤잠이 얕아지는 것이다. 안 그래도 갱년기 불면증이 있는데, 커피까지 더해지니 대책이 없다.

계속 마셔대는 커피는 급기야 과민성 장염으로 이어졌다. 몸에 탈이 나니 아쉽지만 커피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대, 이십 대 때는 아무리 마셔도 탈은커녕 물배가 차서 더 졸리기만 하더니... 반갑지 않지만, 나이 들며 나타나는 신체적 제약에 도리가 없다. 

커피를 끊겠다고 마음먹으니 커피의 유혹이 더 강해져 불시에 덮친다. 집중할 일을 앞에 놓고 '이번 딱 한 잔만!'을 굳게 다짐하며 마신 커피에 가차 없이 장염이 또 도진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서야 '그래, 이젠 도저히 안 되겠다. 몸이 안 받는구나! 커피 끝! 끝!' 결심한다. 그러다 어느 틈엔가 또 유혹에 사로잡히고 자책하기를 반복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배달앱을 뒤져 음식을 시킨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배달앱을 뒤져 음식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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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리는 대상은 커피뿐만이 아니다. 막무가내인 식욕도 그렇다. 뭔가 꽉 막혀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차오를 때, 소박한 집 밥은 성에 차지 않는다. 급격히 팽창된 식욕에 분별력은 이미 급속도로 사라진다. 언제부터인지 밀가루만 먹으면 부대끼는 속도 잊어버리고, 충격적으로 증가하는 체중에 대한 두려움도 잠시 자취를 감춘다. 

손은 어느새 배달앱을 뒤져 달달한 초콜릿 케이크나 느끼한 파스타와 피자들을 충동적으로 시키고 있다. 달고 기름진 것들이라도 위장에 채워 넣어 정신적 불만을 상쇄해 보겠다는 뜻일 터이다. 버젓이 후회할 줄 알면서도 충동적 욕구에 순순히 투항하고야 만다. 

음식이 주는 찰나의 위로가 쏜살같이 지나가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긴 시간이 온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더부룩한 속으로 끙끙대며 언제부터 소화가 이리 안 되었는지 따져본다. '마흔셋 되던 해가 처음이었나, 아니 그보다 일찍 30대 말이었나?'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을 더듬다 유혹에 한없이 약한 의지를 탓한다.

쓰디 쓴 반성 끝에 '다시는 식욕에 휘둘리지 말아야지!' 결심을 해 보지만 별 수 없다. 유리 같은 내 평정심을 깨는 일은 도처에 널렸고, 자극적인 음식들은 배달앱 속에 늘 대기 중이니 말이다. 앞뒤 재지 않는 이 충동적 식욕에 언제까지 휘둘리려나 한숨이 내쉬어진다. 

나이듦에 따라 신체적 제약이 생기는 이유
 
몸이 버겁다 신호를 보내고, 끊임없는 자책과 후회에 괴로워하면서도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몸이 버겁다 신호를 보내고, 끊임없는 자책과 후회에 괴로워하면서도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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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흔드는 게 어디 커피와 식욕뿐일까. 건강검진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걱정이 되면서도 야식에 마음이 동하고, 이젠 무리인 줄 알면서도 화제가 되는 드라마라면 밤새 몰아보기를 무릅쓰기도 한다. 신체적 제약은 점점 늘어가는데, 뭔가를 탐하는 욕구와 욕망은 나이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오랜 세월 욕구와 욕망을 따르고 난 후, 몰려오는 자괴감의 후폭풍이 쌓이다 못해 진절머리가 날 때쯤, 어느 순간 '아, 내가 참 어리석구나!'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몸이 버겁다 신호를 보내고, 끊임없는 자책과 후회에 괴로워하면서도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이제 그만 어리석고 싶었고, 의미 없는 자책과 후회로부터 훌훌 헤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미묘한 마음의 변화가 슬며시 일어났다. 그 작은 마음이 점점 분명해지더니 신기하게도 욕구에 휘둘리지 않는 일이 간간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커피 효과가 절실해도 허브차를 선택할 때가 한두 번 늘어나고, 식욕이 회오리처럼 일어나려 하면 슬며시 산책으로 관심을 돌리는 연습도 시도해 보곤 한다.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욕구와 욕망을 비껴가는 법을 천천히 익혀가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욕구와 욕망을 알아차리는 힘도 제법 생기는 듯하다.

돌이켜 보니, 공자님이 말씀하신 '불혹'의 의미를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 마흔이 되었다고 저절로 유혹에 강해지는 게 아니었다. 수많은 유혹들에 끝없이 넘어가 셀 수 없는 자책과 좌절의 성찰 끝에 얻어지는 '마음의 중심잡기'가 '불혹'이고, 이것이 가능해지는 때가 공자님이 살던 시대에는 마흔쯤이었다는 의미인가 싶다.

50이 다 된 나이에야 마음의 중심잡기를 의식하고 연습하게 되다니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수명이 100세로 늘어난 시대임을 감안하면 10년 정도 늦어도 괜찮지 않을까. 결국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제약들이 자꾸 생기는 건, 이런 저런 욕구와 욕망에 휘둘려 심신을 혹사시키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잡고 겸허하게 살아가라는 몸의 신호이렸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50대의 신체적 제약, #불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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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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