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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한국의 '대장부' : 건장하고 씩씩한 사내라는 의미로 '사내대장부'라고도 한다
중국의 '남자한(男子汉)' : 용감하고 정의로운 남자

  
중국 처세술 책  <증광현문>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반드시 대장부를 찾고, 다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반드시 상대방이 어려움에 빠졌을 경우에만 도와줘야 한다(求人须求大丈夫,济人须济急时无)'는 글귀가 있다. 중국에서는 어떤 사람을 대장부라고 할까?

한국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대장부를 '건장하고 씩씩한 사내'로 정의하고 비슷한 말로 '장부'라고 제시해놨다. 중국 사전에서는 대장부를 '신체가 건강할 뿐 아니라 패기와 기개가 있어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잘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지칭한다.

'대장부'라는 단어는 맹자가 처음 사용했다. 공자는 도덕 인(仁)을 만들고, 맹자는 공자의 인(仁)을 실제로 행하기 위해서는 의(義)가 필요한데, 인(仁)을 의(義)롭게 행하는 사람을 '대장부'라고 했다.

시대마다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사람을 호칭하는 용어가 달랐다. 공자는 '군자'라 했고 맹자는 '대장부'라고 했고 순자는 '성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 '대장부'는 도덕책에 나오는 단어로 보통 사람들은 평소에 잘 사용하기 어려워하는 단어다. 왜냐하면 대장부는 주위에 있는 사람 누구라도 어려움에 빠지면 모두 도와줘야하기 때문이다. 대신 중국인은 남자답다고 말할 때 '남자한(男子汉, 한나라 남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중국에서 '남자한'이라는 용어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남자'라는 의미로 한국 사내대장부와 비슷하다. '남자한(男子汉)'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2000년 전 한나라 시대 남자라는 뜻이다. 중국인이 왜 전형적인 중국 남자 모습을 '남자한(男子汉)'이라고 하는지 알아보자.

중국에게 한(漢)이란
 
중국 함양 한나라 한무제 무덤 기념관
 중국 함양 한나라 한무제 무덤 기념관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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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다수의 중국인은 현재의 중국과 중국인의 모습이 한나라 시대에 완성됐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한족'이라 칭하고, 글자를 '한자', 시를 '한시', 학문을 '한학' 중국 남자를 '남자한(男子汉)'이라고 한다. 중국엔 한족 말고도 55개의 소수민족이 있으나, 인구 중 압도적 다수가 한족으로 분류된다.

그러니까 현재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생활 모습이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중국인은 '한나라 시대 문화는 한 줄기 강물처럼 지금도 중국 대륙에 흐르고 있다(漢是一條河)'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2015년 중국 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에서 '우리는 한나라에서 왔다(我從漢朝來)'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프로그램 제목을 의역하면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은 모두 2000여 년 전 한나라 시대에서 비롯됐다'는 의미다.

이 프로그램은 중국인의 생활 방식을 알아보는 '가족이란' '조상이란' '중국 남성의 삶' '중국 여성의 삶'이란 주제로 4편 그리고 중국인의 세계관과 중국인이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가치관을 알아보는 '중국에서 신선이란' '중국에서 어린이 교육 모습'이란 주제로 2편, 총 6편으로 제작해 방송했다.

프로그램 제목대로 현대 중국인이 살아가는 생활 모습과 2000년 전 한나라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비교해 보면서, 외부적으로 보이는 생활 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내면에 흐르는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중국 함양 한나라 한무제 무덤
 중국 함양 한나라 한무제 무덤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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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 공영 방송국에서 왜 이런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중국 국민에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중국인이 어떻게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또 중국인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바람직한지 그 근원을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프로그램 '중국 남성의 삶' 편에서, 한나라 시대 남자(男子汉)는 '젊어서는 협객으로, 중년에는 공무원(봉급생활자)으로, 늙어서는 신선으로 살았다(少年遊俠,中年遊宦,老年遊仙)'고 소개한다. 그러니까 이 프로그램에서 중국의 전형적인 남자 모습 '남자한(男子汉, 한나라 시대 남자)'이 한나라 시대 '협객'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소개했다.

'우리는 한나라에서 왔다(我從漢朝來)'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중국 남성의 삶' 편에서 협객을 설명하며, 자객 '형가'를 소개한다. '형가'는 2300년 전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바로 직전, 진나라 왕 정(후에 진시황제가 된다)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이다. 중국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왜 자객 '형가'를 중국의 대표적인 협객 모습으로 그렸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사기> 자객열전  

약 2000년 전 한나라 시대 사마천이 중국 최고 역사 기록물 <사기>를 썼다. <사기>는 총 다섯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본기'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역사 기록이고, '열전'은 의롭게 행동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고 기회를 살려서 살아간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열전'에 실린 사람들이 반드시 정의롭거나 칭송할 만한 인물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열전'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 학자, 문인, 군인, 관리, 기업가뿐만 아니라 협객(유협열전), 자객(자객열전) 같은 사람들의 기록도 있다.

중국 최고 역사서라고 칭송받는 <사기>를 쓴 사마천이 왜 역사책에 협객과 자객 이야기를 기록했을까?

아마도 사마천은 그 당시 중국인의 일상생활을 기록하면서 중국인이 '협객'이나 '자객'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아니면 중국인이 '협객'이나 '자객'을 단지 특별하고 유별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중국인이 일상생활에서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 열전 70편 중 두 편을 '유협(협객)열전'과 '자객 열전'으로 할애하여 역사에 전해 내려오는 유협(협객)과 자객의 활동 내용을 기록해 남겼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사마천이 중국 민간 질서(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바탕이 되는 협객의 사고방식을 인정하고,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유학적 명분이나 이념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다고 한다.

'협객'이라는 단어는 사마천이 쓴 '유협열전'과 '자객열전'에서 '유협'과 '자객'의 뒷글자를 합쳐서 만들었다. 그래서 협객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자객'과 '유협'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자객열전'에는 자객 5명이 나온다. 자객 다섯 명 중 4명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다른 사람을 죽인다. 나머지 한 사람 자객이 '형가'다. <사기> '자객열전'에서 나머지 네 사람 자객 이야기는 간단히 소개하는 데 그쳤는데, '형가' 이야기에는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래서 협객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형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중국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우리는 한나라에서 왔다 - 중국 남자의 삶' 편에서도 총 50분 방영 분량 중 '형가' 이야기를 5분 이상 다뤘다.
 
진왕 정(훗날 진시황제)을 습격하는 자객 형가(오른쪽). 한가운데에 진무양이 있고, 아래에는 상자에 담긴 번어기의 목이 보인다.
 진왕 정(훗날 진시황제)을 습격하는 자객 형가(오른쪽). 한가운데에 진무양이 있고, 아래에는 상자에 담긴 번어기의 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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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가는 2300년 전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바로 직전, 진나라 왕 '정'(훗날 진시황제)을 암살하려고 했던 자객이다. 진시황제를 죽이라고 부탁한 사람은 연나라 태자 '단'이다. 당연히 연나라 태자 단과 진나라 진시황제는 원수지간이다.

그런데 자객 형가는 진나라 진시황제와도 연나라 태자 단과도 어떤 인연도 관련도 없다. 연나라 태자 단이 원래 생각했던 자객은 '전광'이었다. 그런데 태자 단이 전광을 만나보니 그는 이미 늙어서 자객으로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광이 태자 단에게 형가를 소개한다. 형가는 이미 오랫동안 전광을 선생님으로 모시면서 알고 지내던 사이다. 그러니까 형가와 전광 선생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신뢰를 쌓았던 것이다.

그래서 형가는 진나라 진시황제와 원수진 일도 없고, 연나라 태자 단이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전광 선생이 부탁해 진시황제를 암살하러 떠난다. 형가가 진시황제를 죽이려고 결심한 이유는 단 한 가지 평소 신뢰를 쌓으며 지내던 전광 선생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신뢰하며 지낸 사이면, 신뢰하는 사람이 부탁하는 일이 나와 전혀 관련이 없어도, 신뢰하는 사람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꽌시 관계인 자기사람이 어떤 일을 부탁하면,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어도,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게 피해가 발생해도, 그 일이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자신도 상대방에게 부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물론 한국인도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의 부탁은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사람은 그 부탁이 도덕과 법률,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면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중국 서안 진시황제 병마용 무덤
 중국 서안 진시황제 병마용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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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진시황제, #한무제, #한나랍, #진나라,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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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사람이야기>,<중국인의 탈무드 증광현문>이 있고, 논문으로 <중국 산동성 중부 도시 한국 관광객 유치 활성화 연구>가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의 근저에 있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중국인과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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