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에 삽입된 모든 사진에는 대체 텍스트를 넣었습니다.

내 책상 앞엔 손때 묻은 고서적이 하나 꽂혀 있다. 푸른색 전통 문양이 그려진 신비로운 표지 위에 <다산자치실록>이라는 제목이 세로로 자리 잡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나 볼 법한 정갈한 글씨체다. 그런데 여기엔 반전이 있다.

첫째, 사실은 발간된 지 겨우 3년 된 책자다. 둘째, 책자를 집필한 사람들은 발간 당시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셋째, 한 왕조의 역사가 아니라 한 학생자치회의 역사가 담겨 있다. 
 
[사진] 책상 위에 <다산자치실록> 책자가 올려져 있다. 표지에는 푸른색 전통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진 끝]
 [사진] 책상 위에 <다산자치실록> 책자가 올려져 있다. 표지에는 푸른색 전통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진 끝]
ⓒ 김도현

관련사진보기


그렇다. <다산자치실록>은 내가 수원다산중학교 학생자치회의 부회장이었던 시절, 1년간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발간했던 책자다. '실록'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끌어왔을 만큼 그때 우린 정말이지 학생자치회에 진심이었다.

우선 교내 소식을 공유하는 '동네방네' 게시판을 설치해 학생들 간 소통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다산신춘문예'라는 이름의 유머러스한 글쓰기 대회를 만들었다. 기존에는 동아리 단위로만 부스를 운영할 수 있었던 축제에 '자율부스' 코너를 신설해 원하는 누구나 부스를 운영할 수 있도록 장소와 예산을 지원했다.

그뿐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교내 콘서트,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어록과 사진으로 꾸민 전시회까지… 사업이 매달 최소 2개씩 있는 바람에 우린 방과 후에도 학교에 살다시피 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역시 '일일매점'이다. 운동회 날 학생들이 교문을 넘어 편의점에 가지 않도록 아예 학생회가 매점을 운영하고 수익금을 기부하겠다는 기획이었는데, 할 일은 왜 그렇게 많던지.

전교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돌려 원하는 간식 종류를 파악하고, 예산을 짜서 물품을 구매하고, 학교 지하를 매점으로 꾸미고, 고객 동선과 질서 유지 계획까지 세워야 했다. 이제 돌아보면 참 서툴렀다 싶고, 또 후회되는 부분도 많지만 어쨌든 그건 내 생애 첫 대형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가 나를 키웠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나는 수업에서 배우기 힘든 여러 가지 역량을 쑥쑥 키웠다. 우선 기획안을 쓰는 법을 익혔고, 여러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듣고 적절히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했다(당시 교장 선생님은 탄산음료 판매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우리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무엇보다, 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외부 자원과의 연결을 꾀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일일매점 수익금을 어디에 기부할지 고민하다가 유니세프에 연락을 취했고, 유니세프로부터 포스터와 배너 등을 제공받게 된 것이다. 우리 계획을 유니세프 측에 공유하고 기부 방식 등을 조율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일일매점은 유니세프와 우리 양쪽에 '윈윈'이었다. 우리는 일일매점이라는 기회를 빌려 학생들에게 아동권리의 중요성을 알릴 수 있었고, 유니세프 입장에선 후원금과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일매점 당일, 한 학생은 음료값을 내밀고선 좋은 일이니 거스름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고, 이건 우리의 기획의도가 완벽히 통했음을 보여주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일일매점을 기획해 본 경험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밑천이 되어주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과 노하우를 쌓고 나니 더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해 볼 의지가 생긴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퀴어·페미니즘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취지가 비슷한 다른 고등학교의 동아리와 연합해 공동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자를 함께 엮어서 온라인으로 판매했고, 아예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나가서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미리 신청서를 내고 선발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는 학교 안에서 행사를 열고 수익금을 외부에 기부하는 데서 그쳤다면, 고등학교 때 한 프로젝트는 학교 밖으로 더 힘차게 뻗어 나가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진] 퀴어문화축제에 나가기에 앞서 우리 부스를 꾸미는 데 쓸 포스터를 만드는 모습. 책상 위에 하얀 전지가 펼쳐져 있고, 색연필을 든 동아리 부원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종이에는 다양한 스타일과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그 사람들의 발 밑에는 성소수자들을 향한 여러 혐오표현이 낙서처럼 빼곡히 쓰여 있다. [사진 끝]
 [사진] 퀴어문화축제에 나가기에 앞서 우리 부스를 꾸미는 데 쓸 포스터를 만드는 모습. 책상 위에 하얀 전지가 펼쳐져 있고, 색연필을 든 동아리 부원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종이에는 다양한 스타일과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그 사람들의 발 밑에는 성소수자들을 향한 여러 혐오표현이 낙서처럼 빼곡히 쓰여 있다. [사진 끝]
ⓒ 김도현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이 동아리와는 별개로, 아예 한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게 되면서 나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이때부터는 내가 수행해야 하는 프로젝트의 규모 자체도 굉장히 커졌고, 무엇보다 중고등학교 때 조금씩 시도하던 '외부 자원과의 연결'이 필수적이었다.

예를 들어, 성공적인 행사를 열려면 무조건 기자들한테 연락해서 취재를 부탁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진이나 보도자료를 제때 보내주어야 했다. 또, 행사에 우리가 원하는 연사를 모시려면 행사 취지를 간략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줄 알아야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 때로는 버거웠지만,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을 익힌 것도 이때였다. 일(프로젝트)과 학교 공부를 저글링 하는 나날이 괴롭고도 즐거웠다.

학교와 세상을 연결하는 '리얼 월드 러닝'

이런 나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 건 아주 최근이다. 바로, '유쓰망고'를 발견하고 나서부터다. 유쓰망고는 학생이 주도성을 가질 수 있는 공교육 환경을 만드는 비영리단체다. 주로 하는 일은 교사 연수인데, 일방적 지식전달형 수업을 벗어나서 학생들의 관심사에 기반한 프로젝트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학생주도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교실 안에서 배움을 얻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 혹은 외부 단체/전문가들과 적극 협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들은 실제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지식이 교과서 밖의 현실 세계에서 가지는 맥락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쓰망고에선 이걸 '리얼 월드 러닝(real-world learning)'이라고 부른다. 

유쓰망고가 말하는 '리얼 월드 러닝'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프로젝트와 수업은 늘 서로 분절된, 양 극단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젝트도 하고 학교 수업도 들었지만, 그걸 동시에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려면 진도를 빼야 하고, 교과서 내용은 넘쳐나고, 프로젝트를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 많은 품이 들 테니까.

결정적으로, 그렇게 프로젝트에 기반한 수업을 할 만큼 의지를 갖춘 교사들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유쓰망고에서는 그런 교사들을 배출하기 위해 연수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도권 교육의 틀 안에서도 혁신적인 수업 사례를 조금씩 만들어나가고 있는 게 놀라웠다.
 
[사진] 유쓰망고에서 2021년 7월에 진행했던 '리얼 월드 러닝' 수업 공유회 모습. 공유회에 참여한 교사들의 얼굴이 줌 화면에 떠 있고, 상단에는 '세상과 연결된 수업 기획하기'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끝]
 [사진] 유쓰망고에서 2021년 7월에 진행했던 "리얼 월드 러닝" 수업 공유회 모습. 공유회에 참여한 교사들의 얼굴이 줌 화면에 떠 있고, 상단에는 "세상과 연결된 수업 기획하기"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끝]
ⓒ 유쓰망고

관련사진보기


내가 방과 후에 애써 시간을 내고 두 배의 노력을 들여서 했던 프로젝트들이, 애초에 수업의 일부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니 좋은 점들이 마구 떠올랐다. 물론 청소년이 꼭 학교에만 매여있을 필요도, 학교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할 필요도 없지만, 대다수 청소년이 학교 진도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기존 수업을 프로젝트식으로 바꾸는 것이 괜찮은 대안 같아 보였다.

따로 나처럼 학생회나 동아리나 시민단체에서 활동할 여력이 안 되는 학생들도 최소한 수업에서는 프로젝트의 묘미를 경험해볼 수 있으니까. 무언가 직접 해 봄으로써 자신의 관심사나 진로를 찾아 나가는 힘이 자연스레 길러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원할 경우 학교와 별개의 공간에서도 프로젝트를 능숙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유쓰망고 인턴 도전기

유쓰망고라는 단체를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여기서 직접 일해보면 어떨까?' 인턴을 정기적으로 뽑는 곳도 아니었고 관련 공고도 일절 없었지만, 이메일이라도 한번 보내보자 싶었다. 노트북을 열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며 흰 여백을 채웠다. 그렇게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완성하고는 이메일을 썼다.

"김하늬 대표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유쓰망고에서 인턴으로 일해보고 싶어서 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도움이나 협업을 요청하는 연습을 오래전부터 해 왔기에, 이번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진심은 대체로 통한다'는 확신을 담아 이메일 발송 버튼을 눌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유쓰망고의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이면 LA에 사는 하늬커*와 한국에 사는 내가 줌(zoom)으로 만나 회의를 하고, '리얼 월드 러닝'을 한국에 확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나눈다. 이 연재 역시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다.

앞으로 석 달 간, 우리가 말하는 '리얼 월드 러닝'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차근차근 소개하려 한다. 이미 '리얼 월드 러닝'을 전면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일부 교사들의 사례도 소개해 드릴 예정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 앞으로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반짝이는 힌트로 봐 주시면 좋겠다.
 
[사진] 필자 본인과 유쓰망고의 김하늬 대표가 화상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활짝 웃고 있는 줌 화면을 캡처했다. [사진 끝]
 [사진] 필자 본인과 유쓰망고의 김하늬 대표가 화상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활짝 웃고 있는 줌 화면을 캡처했다. [사진 끝]
ⓒ 김도현

관련사진보기

 
*유쓰망고에서는 일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의 이름 뒤에 '커'를 붙여 부른다. 함께 사회변화를 만드는 '체인지메이커'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나이와 상관없이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유쓰망고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https://blog.naver.com/youthmango)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배우고, 글 쓰고, 목소리 내는 사람. 유쓰망고 인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