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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걸린 작품만이 아니라 우표, 화폐, 크리스마스 실(seal) 등에 들어가는 그림이나 사진을 유심히 본다. 왜냐면 일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궁금해서다.

일상의 작은 갤러리인 이 사각형 안에는 각각의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 들어 있곤 한다. 유럽의 화폐가 유로화로 통일되기 전 독일 500마르크 지폐에는 한 여성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 1647-1717)이다.

5만 원권 지폐에 신사임당 얼굴이 새겨지면서 아마도 한국 화폐를 사용하는 외국인 중에는 신사임당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늘어났을 것이다. 여왕이 아니고서 여성의 얼굴이 화폐에 남겨지기란 얼마나 드문 일인가.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독일 생물학자이며, 곤충과 식물 세밀화가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 출신의 판화가이자 출판업자였다. 메리안 가문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스위스 바젤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심으로 정치, 금융, 출판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집안이었다. 마리아의 아버지가 설립한 출판사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출판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마리아가 세 살 때 아버지 마테우스 메리안이 사망했고, 마리아의 어머니는 당시 세밀화가이자 판화가였던 야콥 마렐과 재혼했다. 친부와 의붓아버지 모두 예술과 출판계에서 활동한 덕분에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미술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특히 의붓아버지 야콥 마렐은 마리아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딸에게 미술교육을 시켰다. 

마리아는 어릴 때부터 작은 애벌레를 지켜보며 그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과정을 관찰했다. 나아가 이를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십대 초반부터 수채화와 동판화로 식물 세밀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리아의 세밀화는 주로 수채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당시 남성 중심의 견고한 길드 체제가 여성 화가에게 유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성 화가들은 소재만이 아니라 재료 사용에 있어서도 제약이 따랐다. 그래도 세계를 관찰하는 그의 눈을 막지는 못했다. 
 
구아바 나뭇가지 위에 거미, 개미, 벌새 Spiders, ants and hummingbird on a branch of a guava, 1705
 구아바 나뭇가지 위에 거미, 개미, 벌새 Spiders, ants and hummingbird on a branch of a guava, 1705
ⓒ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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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며 생물학자, 박물학의 선구자

여전히 여성이 과학에 참여하기 어려운 조건의 사회였으나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는 이들은 늘 존재한다. 비록 여성이 생물학자가 될 수 있는 문은 좁았으나 생물학 연구에 필요한 세밀화가가 되는 문은 상대적으로 열려 있었다.

예를 들면 마리아보다 조금 앞세대인 마가리타 데 에르(Margaretha de Heer, 1603–1665)처럼 17세기 네덜란드에는 곤충과 식물 세밀화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화가들이 있었다. 마리아의 차별성은 자신이 그리는 대상을 철저히 과학적으로 연구, 수집, 분류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세밀화가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생물학자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의 연구 중에서 특히 수리남 곤충 연구가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다. 마리아는 1699년 곤충 연구를 위해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남미의 수리남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수리남은 유럽인들에게 낯선 곳이었는데 특히 여성으로서는 더욱 드물게 찾는 여행지였다.

그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올 때까지 수리남을 탐험하며 그곳의 동식물을 관찰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705년 역사적인 삽화집 <수리남 곤충의 변태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를 출간했다. 이 책은 마리아 사후에도 꾸준히 재발행 될 정도로 식물과 곤충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리아가 책을 발간한 지 30여 년이 지난 후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에 의해 본격적으로 분류학이 시작되었다. 당시 마리아의 연구가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마리아는 수리남에서 원주민을 착취하는 네덜란드인의 모습을 목격했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냈다.  
  
《수리남 곤충의 변태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1705) 삽화 중에서
 《수리남 곤충의 변태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1705) 삽화 중에서
ⓒ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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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는 미술사에서 공예와 함께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덜 평가되는 분야였다. 삽화는 글을 보조해주는 그림 정도로 여겼다. 삽화와 공예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대체로 여성들이 참여했던 분야라는 점이다. 공예가 노동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면, 식물과 곤충 삽화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작업이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처럼 생물학자이자 세밀화가로 활동한 존재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생물학자로서 마리아의 집요한 관찰은 곤충을 단지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당대의 시각을 크게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나아가 꽃과 곤충의 관계까지 세밀하게 보여주어 식물과 곤충이 연결된 생태계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왔다. 화가이면서 과학자로서 그가 기록한 '작은 세계'는 우리에게 무한히 크고 넓은 세계를 열어주었다. 

마리아는 수리남에 갈 때 둘째 딸인 도로시아 마리아 그라프(Dorothea Maria Graff)와 동행했었다. 그라프 역시 훗날 어머니를 이어 18세기 세밀화가 및 교사로 활동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사망 이후 그라프는 어머니의 작품을 출판하는 등 그의 작업 세계를 정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덧붙이는 글 |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2년 5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문의 02-723-4251


태그:#칼럼 ,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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