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24 06:00최종 업데이트 22.05.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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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싱가포르의 한 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반도체 공장이라고 하면 최첨단 시설의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세상의 온갖 가스와 화학제품을 이용하는 위험한 곳입니다.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사건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적이 있어서 이제는 그 위험성도 많이 알려졌고, 또 많은 개선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의 한 반도체 회사 공장 입구에 안전 상황판이 걸려 있습니다. 다양한 사고 사례를 함께 모아 놓고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 이봉렬

 
제가 다니는 공장 입구에 안전현황판이 붙어 있습니다. 지난 50일 동안 안전사고가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옆에는 예전에 발생한 안전사고 사례가 붙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져서 이틀간 병가를 써야 했다는 내용입니다. 화물 손수레에 부딪혀 엉덩이를 다친 사례도 있고, 문에 기대고 있다가 문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넘어진 사례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사고 사례로 만들어져서 모든 직원들에게 회람을 돌리고 교육을 합니다. 안전현황판에 부서별 사고 건수로 기록이 되고 회사 전체 무사고 날짜도 0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소한 일들까지 안전사고로 기록이 되다 보니 전체적으로 사고가 많은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의 큰 사고는 거의 없습니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이 드는 일입니다. 안전교육을 받지 않으면 공장 출입이 안 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이 제 때 들어오지 못해 일정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필요한 안전장구를 갖추고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것도 사람과 돈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한 비용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싱가포르의 안전보건 프로그램

싱가포르는 산업재해 감소를 위해 2006년부터 "BUS(기업감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중대 재해 또는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이나 안전사고 관련하여 누적 벌점이 높은 기업을 대상으로 작업장 환경개선을 강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대상이 된 회사는 BUS 프로그램 사이트에 이름이 공개가 됩니다. 2022년 5월 현재 27개 기업의 이름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이 올라가면 관급 공사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민간공사 입찰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개선 기간 동안 수시로 점검이 이뤄지고 문제가 발생하면 벌금에 작업 중지 명령까지 받을 수 있어 사실상 정상적인 회사 운영이 힘들어집니다. 안전보건 관리시스템을 갖추고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고 판단이 되어야 명단에서 이름을 뺄 수 있습니다.
 

안전관련 다섯 단계의 인증서를 발급하여 각 단계별로 기업에 혜택을 줍니다. ⓒ 싱가포르 WSH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징벌적 성격의 "BUS 프로그램" 말고 "bizSAFE (비즈세이프) 프로그램"이라는 안전 자격부여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기업의 안전관리 프로그램 참여 정도에 따라 다섯 단계로 인증서를 발행합니다. 기업의 안전담당자가 기본적인 안전 워크숍만 마치면 1단계 인증입니다. 반면에 공인인정기관으로부터 안전과 관련한 인증을 받고 노동부와 안전관리공단의 감사 보고서까지 받았을 때는 5단계 인증인 "비즈세이프 스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즈세이프 인증을 받으면 회사 홈페이지와 홍보물, 명함 등에 비즈세이프 로고를 쓸 수 있습니다. 관급 공사에서 안전 관련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어서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안전 관련 증명을 위한 추가 시간 및 비용을 아낄 수 있습니다. BUS 프로그램에 이름이 올라간 회사와 비즈세이프 최상위 인증을 받은 회사 중 어느 회사가 더 경쟁력이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비용이 들더라도 회사 내 안전을 위해 사람과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싱가포르의 안전관리체계는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자를 명확히 규정하는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발주사, 시공사, 하청업체, 노동자 등 관련된 사람 모두의 법적 의무가 명확합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받아야 하는 위험성 평가와 작업허가제도 안전하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보여줍니다. 시스템과 공무원의 역할을 중시하는 싱가포르답게 근로감독관에게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언제든 안전 관련 조사 및 감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되려는 싱가포르

지금까지 소개한 안전 관련 프로그램들은 2005년에 시작된 작업장 안전보건 발전계획인 "WSH 2015"의 여러 추진 항목 중 일부입니다. 2004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산재 사망 십만인율은 주요 경쟁국에 비해 높은 4.9였는데 이를 10년 안에 절반인 2.5로 줄이겠다는 게 WSH 2015의 핵심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 이미 3.0 이하로 줄어들면서 2018년까지 1.8로 더 낮추겠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담아 "WSH 2018"을 다시 내놓았습니다. 그럼 2018년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산업재해 사망자 수 41명으로 목표했던 1.8보다 더 낮은 1.2를 달성했습니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 내 놓은 것이 WSH 2028입니다. 향후 10년 안에 1.0 이하를 달성하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OECD 나라 중에 1.0 이하인 나라는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 독일 등 네 나라밖에 없습니다. 싱가포르는 새로운 목표마저도 달성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한 답을 찾을 만한 일이 얼마 전에 발생했습니다.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해 발생한 20명의 노동자 사망사건에 대해 "그 수가 너무 많고 용납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 리셴룽 총리의 페이스북

 
지난 9일,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해 작업장에서 사망한 노동자 수가 20명이나 된다면서 이 숫자는 너무 많고 용납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This is far too many, and not acceptable") 그러면서 노동부, 직장안전보건위원회 등 관련 단체에 2주 동안 안전을 위한 특별점검을 지시했습니다.

글의 말미에 "우리는 현지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든 노동자를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덧붙였습니다. 4개월 동안 발생한 20명의 사망자 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외국인 노동자까지 포함해서 모든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자는 총리가 있는 한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되자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WSH 2028 보고서 중 일부입니다. 2004년 산재 사망 십만인율은 4.9였는데 2018년에는 1.2를 기록하여 OECD 국가와 비교하면 7번째로 낮은 사망자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싱가포르 WSH 2028 계획서

 
주 120시간 일하게 하자는 윤석열 정부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아래 표는 2019년, 싱가포르가 자국의 3년 평균 산업재해 사망자 수를 OECD 국가와 비교해서 만든 것입니다. 조사대상 37개국 가운데 싱가포르는 7위, 한국은 35위입니다. 한국 뒤에 있는 나라는 멕시코와 터키뿐입니다. 1위 네덜란드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10배에 가깝습니다.
 

싱가포르 노동부에서 자국의 산업재해 사망자 수를 OECD 국가와 비교하여 순위를 매겼습니다. 싱가포르는 7위, 한국은 전체 조사대상 37개국 가운데 35위를 차지했습니다. ⓒ WSH 2028 계획서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2021년 산재 사고 사망자 수는 828명으로 이를 십만인율로 변환하면 4.3입니다. 같은 해 싱가포르의 1.1에 비하면 거의 4배 정도입니다. 어떤 숫자를 가져 와도 한국의 산재 사고 사망자 수는 월등히 높은 수준입니다. 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일하다 죽는 노동자 수가 더 많은 걸까요?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사업체 특성별 산업재해 현황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보면 주 52시간 이상 일을 하는 사업장이 40시간 미만인 곳보다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4배 이상 많다고 합니다. 보고서는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산업재해 발생위험이 그만큼 산술적으로 증가할 뿐 아니라, 작업자의 체력 및 주의력의 저하, 졸음 등의 생리적 현상을 발생시켜 보다 직접적인 산재위험을 불비례적으로 증가시키는 등, 대체로 장시간 노동은 산업재해 발생의 위험요인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주당 노동시간별 산업재해율입니다. 주 52시간 이상 일을 하는 사업장이 40시간 미만인 곳보다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4배 이상 많습니다. ⓒ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인물들은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쉴 수 있어야 한다"(윤석열 대통령)거나, "생산직은 주 52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이 있다"(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현장에서는 일률적·경직적 규제로 소득감소 등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으로 안다"(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등 주 52시간제도마저도 폐지하고 노동시간을 되레 늘이려는 입장입니다.

거기에 더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경영자가 해야 할 각종 안전 확보 의무를 제한하자는 내용을 담은 중대재해법 개정 요구 건의서를 윤석열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정부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늘리려고 하고, 경영자들은 안전 확보 의무를 면제해 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사망 사고가 줄어들기를 기대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12월 25일 공개된 유튜브 경제전문채널 삼프로TV ‘[대선 특집] 삼프로가 묻고 윤석열 후보가 답하다' 편에서 주52시간제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 삼프로TV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가 올해 사망자 20명이 너무 많다며 대책을 지시하던 지난 9일, 공교롭게도 <오마이뉴스>에는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달, 73명의 노동자가 죽었습니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노동자의 사망 소식에 정부가 먼저 나서서 대책을 마련하는 싱가포르, 더 이상 일하다 죽지 않도록 해 달라는 노동단체와 언론의 호소에 아무 대답이 없는 한국. 이 차이가 네 배나 더 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요?

"나는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노동자니까 다행이야"하고 말기에는 내 나라 한국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렇게 기사를 쓰는 겁니다. 내 나라의 노동자들이 더 이상 일하다가 죽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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