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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찍힌 9명 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단 한 명 뿐이었다.
▲ 인간미사일 "오카" 특공대원들 사진에 찍힌 9명 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단 한 명 뿐이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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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 해군항공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 태평양 함대를, 말레이 해전으로 영국 동양함대를 깨뜨린 일본 해군항공대는 스스로의 실력이 세계 제일에 다다랐음을 자부했다. 눈부신 전과에 국민들은 열광했고, 청소년들은 앞다퉈 해군비행예과연습생에 자원했다.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당국의 선전에 세뇌됐던 이들은 하늘을 날며 조국과 '동양평화'를 지킨다는 동경심에 매료됐다(관련 기사: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그러나 일본군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을 잃으며 대패한 일본 해군은, 이후 과달카날 해역에서의 소모전을 겪으며 완전히 열세로 돌아서게 됐다.

특히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의 재앙적 결과는, 일본의 항공전력이 더 이상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해 반드시 유지해야 할 방어선으로 설정되었던 이른바 '절대국방권'은 붕괴됐다(관련 기사: "흥폐가 너희 어깨에 달렸다" 일본군 '노오력' 신화의 침몰).

특공병기 '오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오직 자폭만을 위해 설계된 오카는 적 함대로 격돌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만을 갖추었다. 한번 출격하면 살아서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 미군측에 의해 묘사된 오카의 구조도 오직 자폭만을 위해 설계된 오카는 적 함대로 격돌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만을 갖추었다. 한번 출격하면 살아서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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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몰락의 길을 밟고 있던 일본군으로서는 전세를 뒤집을 획기적인 계기가 절실했다. 일부 고급장교들은 일본과 마찬가지 처지로 유럽전선에서 밀리고 있던 나치 독일이 영국 도시들에 대한 제트로켓 공격으로 반전을 꾀하고 있다는 소식으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독일군이 적 지역으로 제트로켓을 쏘는 것처럼, 일본 본토를 향해 쇄도해오는 미 해군 함대를 향해 제트로켓을 쏠 수 있다면 패전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점점 커지게 됐다.

그러나 원격으로 조작되는 무선유도의 로켓 추진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 측으로부터 제트로켓 기술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기도 했지만, 신무기의 개발과 상용화를 기다리기에는 전황 악화가 너무나도 빨랐다. 고정된 지상표적을 노리는 독일의 제트로켓과 달리, 일본이 개발하고자 하는 로켓은 움직이는 함대를 표적으로 한다는 점 역시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한계 아래서, 급기야는 '일발필중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즉 무선유도가 아닌 사람이 조종하는 미사일을 투입시킨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미사일을 조종하는 사람이 살아돌아올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 극단적인 인명경시는 일선의 기술자들마저 당황시켰지만, 쿠로시마 카메토 소장을 비롯한 해군의 결정권자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무엇을 못할쏜가'라며 반대의견들을 거칠게 일축했다(관련 기사: '소년 자폭공격' 추진한 일본 군인의 기막힌 결말). 인간 미사일의 개발과 배치는 그렇게 강행됐다. 이 새로운 특공병기에는 벚꽃을 뜻하는 오카(桜花)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식육상공격기가 적 함대에 접근한 뒤 미사일 개념으로 오카를 투하하는 '특공'이 실시되었다. 육중한 오카를 싣고서 불안정하게 비행하던 일식육상공격기는 적 요격기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 일식육상공격기에 탑재된 오카 일식육상공격기가 적 함대에 접근한 뒤 미사일 개념으로 오카를 투하하는 "특공"이 실시되었다. 육중한 오카를 싣고서 불안정하게 비행하던 일식육상공격기는 적 요격기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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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가미카제 특별공격'은 오카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였다. 가미카제 특별공격에 투입된 항공기들은 애당초 전투기로 만들어진 기체들이었기에 폭탄을 싣고 자폭하는 임무에는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반면 오카는 처음부터 자폭만을 위해 만들어진 미사일이었으므로 일단 성공만 한다면 단 한 번의 타격으로 적의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오카가 자랑하는 강력한 위력에 이목이 집중되는 사이, 탑승원의 생명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관련 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는 오로지 특공대원들 개인이 외롭게 감내해야 했다. 새로운 특공대 편성을 위해 각지의 해군항공기지로부터 모집돼 온 그들은 자신들이 조종해야 할 인간미사일의 자태를 마주하고 아연실색했다. 착륙 장치조차 없는, 좁디 좁은 오카의 기체는 그들에게 '관'과도 같았다. 일단 출격하면 보통의 비행기처럼 스스로 기지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오카 출격은 100%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숙명 앞에 선 특공대원들의 심정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카가 탑재되는 '일식육상공격기'의 조종사였던 칸노 젠지로(菅野善次郎)씨는 2010년 NHK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고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17살. 17년을 살고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하고. 인생이란, 17살 이후에는 어떤 기쁨과 괴로움이 있는 것일까 하고..."

오카 특공대원이었던 도모토 요시하루(堂本吉春)씨는 출격을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 방황하던 중 인근의 절을 찾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스님께, '실례합니다. 근처 비행장의 특공대원입니다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폭탄이 터지면 저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물고기밥이 될 텐데, 저희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만,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고 여쭤보니,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혼이 있습니다. 저희 승려들이 그 혼을 영원히 애도할테니, 안심하고 가십시오'라고 하더군요.

그 말씀을 듣고 '저희들은 특공으로 사람을 죽이게 될지도 모르고, 지금까지의 공중전에서도 사람을 죽여왔습니다. 우리들은 사람을 죽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셈입니다. 저세상에는 지옥과 극락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을 죽이고서도 극락에 갈 수 있습니까?' 하고 다시 여쭤봤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나라를 위해 특공을 나가시는 것이니 절대 지옥에 가실 일은 없습니다'라고 단언하시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울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납니다. 정말이지, 제가 그때 죽은 전우들보다 3, 4배를 더 살았잖아요. 미안하다는, 참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이 자꾸만 듭니다. 저도 원래는 이들 중 한 명으로 출격해서 죽게 되었을텐데..."
▲ 오카 특공대원이었던 사에키(佐伯)씨 (2010년 인터뷰) "울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납니다. 정말이지, 제가 그때 죽은 전우들보다 3, 4배를 더 살았잖아요. 미안하다는, 참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이 자꾸만 듭니다. 저도 원래는 이들 중 한 명으로 출격해서 죽게 되었을텐데..."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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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청년들의 처절한 고뇌가 무색하게, 죽음의 나날은 차례차례 찾아왔다. 대형폭약을 장착한 탓에 그 무게가 2톤을 넘어가는 육중한 오카를 탑재하고서, 불안정하게 장거리를 비행하는 일식육상공격기는 적 항공기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적 함대까지 닿기 위해서는 호위기의 충분한 엄호가 필수적이었지만, 이미 상당한 항공전력을 상실한 일본군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시 진행 중이던 오키나와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출격했던 오카 특공대의 대부분은 목표로 한 적 함대와 만나지도 못한 채, 도중에 미군기의 요격을 받고 허무하게 전멸당했다.

일본 해군은 오카의 전과를 과장하며 오카 특별공격을 10차례에 걸쳐 전개했다. 일본군의 요란한 선전이 무색하게, 미군 측 자료에 따르면 오카 특공대가 격침시킨 미군 함선은 구축함 단 한 척에 불과하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카, 일식육상공격기, 호위기 탑승원을 합해 430명이 넘는 어린 청년들이 특공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참으로 허망한 결과다.

살아남은 오카 특공대원들은, 감당할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을 안고서 여생을 살아가야 했다. 전사한 전우들이 감내해야 했던, 또한 자신들이 감내해야 했던 그 끔찍한 나날들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 어떤 설명이나 사죄도 없었다. 지나간 전쟁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무관심, 혹은 일부 극단세력에 의한 맹목적인 찬양, 그 양극단 위에서, 지난 날 고뇌 속에서 쓰러져간 젊은이들의 절규는 여전히 태평양의 수면 아래를 헤매고 있는 듯 하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나라를 위한 숭고한 희생'의 상징으로써 오카를 비롯한 특공병기들이 전시되고 있다.
▲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된 "오카"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나라를 위한 숭고한 희생"의 상징으로써 오카를 비롯한 특공병기들이 전시되고 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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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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