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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시대다. 소수자 권리 신장과 차별 철폐를 외치는 수많은 구호들이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뒤흔드는 것을 지켜보며, 어떤 시대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단 한순간도 진심으로 소수자 담론에 공감했던 적이 없었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일부러 외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현안에 따라서는 나 역시 분노나 슬픔, 안타까움을 느끼며 여러 주장들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누군가가 차별과 배제 안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로부터 나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때로는 범람하는 담론들에 피로감을 느끼며 '저 정도면 피해망상 아닌가' 하는 거친 생각마저 떠오르기도 했다. 왜였을까. 나 자신이 소수자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제 아무리 감수성을 발휘한다한들 당사자들의 절박함에 이입하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라고 돌아본다. 소수자 문제는 어디까지고 '남의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다소 예스런 표현을 빌려 농담처럼 나는 주변인들에게 스스로를 '무산계급'의 자제라고 자칭하곤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불우했다. 우리 가족이 발 붙일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고 치열하게 살아도 삶의 여유를 찾지 못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나는 이 세상이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한인 유학생으로 소수자의 처지가 되어 보니
 
필자는 일본군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구술사를 중심으로 전쟁사회학 연구를 시도해왔다.
▲ 일본군 출신자 어르신을 상대로 인터뷰를 전행하는 필자 필자는 일본군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구술사를 중심으로 전쟁사회학 연구를 시도해왔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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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가 몇 년 전 일본으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소수자'의 처지가 되었다. 한국인인 내가 일본 사회로 들어오게 되면서 나는 분명히 사전적으로 소수자의 의미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라는 인간은 분명히 다른 '주류' 일본인들과 제도적/문화적으로 구분되었으므로.

그러나 내가 소수자로서의 비애를 느낄 일은 거의 없었다. 주변의 일본 사람들은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학교생활과 연구는 만족스러웠다. 나는 '소수자'라기보다 손님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소수자가 되었음에도 소수자 담론에 당사자로서 공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랬던 나였기에 처음으로 '소수자'로서 배제되었다는 경험은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배제의 경험은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찾아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연구를 위해 인터뷰 대상자를 물색하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년병으로서 자살특공대에 배치되었던 어느 어르신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어르신께 연락드릴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날을 발로 뛰었던 나는 마침내 연락처를 손에 쥐게 된 기쁨과 긴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신호가 아득하게 느껴질 즈음 수화기 너머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분이었다. 나는 긴장으로 꼬이는 문장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씀을 올렸다.

"저는 오사카공립대 박사과정 박광홍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지난 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의 체험을 정리해서 논문을 집필 중에 있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어르신의 전쟁체험 이야기를 접하고서 크나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말 실례가 되는 줄은 알지만 허락해주신다면 어르신 댁을 방문해서 말씀을 여쭈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어르신의 대답은 알아듣기 너무나도 난해하게 느껴졌다. 다만, 마지막 문장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분명하게 나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일본인이라면 몰라도 외국인한테 말하기는 싫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던 인터뷰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아쉬움, 그 이상의 충격이 전신으로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나는 격하게 흔들리는 스스로의 감정선을 겨우 붙잡고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십니까. 정말 실례했습니다."

어르신은 대꾸없이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서 내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곱씹어보았다. 그것은 '배제'였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속성 중 하나로 인해 배제된 것이다.

머리로는 어르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외국인에게 자신의 삶에 크나큰 상처로 남은 전쟁 경험을 선뜻 들려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그러나 머리로 이루어지는 이해와는 별개로 마음의 상처는 어찌할 수 없었다.

'관망'해 온 타인의 몸부림이 부끄러웠다

일본 사회에 애정을 갖고 여러 일본인들과 우애를 다지며 어쩌면 일본의 젊은이들 이상으로 일본의 전쟁사에 열정을 가져왔는데,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는 게 참 서럽게 느껴졌다. 내가 일본인이었다면 얻게 되었을 귀중한 기회가 일본인이 아니기에 박탈되었다는 것은 크나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한 시간쯤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기에 받았더니 뜻밖에도 어르신의 아드님이었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가 박 선생님께 엄청난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며 연신 사과하셨다. 아드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어르신께서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이래 사고방식도 변하고 인지능력도 떨어져 가족들과도 제대로 소통이 안 된다고 한다.

예기치 못한 정중한 사과를 받고서 상당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배제의 경험'이 남긴 상흔으로부터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오늘 내가 처음 겪고서 가슴 아파했던 이 '배제'가 누군가에는 일상적이고도 반영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현실에 생각이 미치니 소름이 돋는 듯했다.

외국인이라서 싫다는 말을 듣고 내가 상심한 것은 인생 속에서 어쩌다 한번 겪은 '사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배제의 경험이 없었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에 자주 마주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으므로.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에게 배제는 사고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어떤 속성 때문에 배제되는 아픔을 겪고 있을 것 아닌가. 배제는 물리적 불편이나 제도적 불이익을 넘어 인간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상처받는 존재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법이다.

내가 멀찍이 떨어져서 세월 좋게 '관망'해 왔던 수많은 몸부림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태그:#배제, #차별, #소수자, #유학생,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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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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