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03 11:45최종 업데이트 22.06.0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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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군인권센터로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규정을 알고 싶다고 할 때가 있다. 두발이나 복제 규정 같은 일상 규정에서부터 징계, 인사 관리 등에 이르기까지 필요에 따라 궁금한 것도 다 다르다. 그런데 군인들이 군 내부 규정을 민간단체에 묻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그만큼 군인들조차 복무와 관련된 법령규정과 지침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정부부처는 내부규정, 예규, 지침, 고시 등을 대부분 법제처가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공개하고 있고, 알려질 경우 공공복리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사항만 선별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데 육·해·공군·해병대 규정은 빠짐없이 전부 다 비공개다. 군내부망(인트라넷)에 공개되어 있을 뿐이다. 행정병이 아니고서야 병사들이 인트라넷에 접속할 일은 거의 없으니 규정을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각 군 규정은 상급 기관인 국방부훈령에 근거하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국방부가 각 군에 자율로 위임하고 있는 사항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내용이 훈령과 비슷하다. 국방부훈령은 군사비밀과 관련한 내용을 제외하곤 대부분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인사 관리, 징계, 공보, 사무 처리 절차 등 다른 부처가 공개하는 내용은 국방부도 마찬가지로 공개한다. 이런 것들은 숨길 까닭이 없다. 공개한다고 해서 적을 이롭게 하거나 작전·임무 수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다루는 각 군 규정은 전부 비공개다.

비공개된 국민과 장병의 알권리

군인권센터는 군이 마땅한 명분도 없이 국민과 장병의 알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판단으로 각 군 규정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했다. 2018년의 일이다. 일단 무슨 규정이 있는지 알아야 하니 규정 목록을 공개 청구했다. 목록을 받은 뒤엔 군사비밀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규정들을 추려 빼고 나머지 일반 규정들을 공개 청구했다. 그런데 육·해·공군은 공개 청구한 규정의 절반을, 해병대는 전부를 공개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비공개 된 규정이 너무 많아 모두 나열할 순 없지만 '장교·부사관·군무원 인사관리 규정', '건강관리 규정', '징계 규정', '정훈공보업무 규정', '감찰규정' 등 비공개 사유를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법률이 정한 사유에 의해서만 정보 비공개 처분을 결정할 수 있다. 각 군이 적용한 비공개 사유는 '감사, 인사관리 등에 관한 사항이나 의사결정 과정, 또는 내부검토 과정에 있는 사항 등으로서 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 등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정보', '국가안전보장, 국방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였고 내부 보안규정에 따라 비공개를 결정한 황당한 케이스도 있었다. 군이 임의로 만든 보안규정에 따라 법률이 보장하는 국민의 청구권을 제한한 건 당연히 위법이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규정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정보공개청구에 대한 비공개 사유가 뭉뚱그려 기재된 탓에 각각의 규정이 왜 비공개 되었는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행정심판을 걸었다. 그때서야 각 군은 개별 규정 하나하나에 대한 비공개 사유를 밝혔다. 물론 대부분 황당한 사유였다. 일례로, 육군은 징계양정기준을 비공개하면서 잘못을 한 사람에게 어떤 징계를 얼마나 줄지 가이드라인을 정해 둔 징계양정기준이 공개되면 공정한 징계 부과가 어렵다는 해명을 내놨다. 대법원도 양형기준을 홈페이지에 공개해둔 마당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징계양정기준이 비공개 된 것이 오히려 공정한 징계 업무 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며 징계 관련 규정을 모두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 밖에도 규정에 부대 명칭(사령부 명칭 등)이 들어가 있어 공개될 경우 편제가 적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식의 어이없는 비공개 사유 등도 모두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로 사령부급 부대 명칭은 이미 대통령령 등에 다 공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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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숨긴 까닭

군은 왜 이렇게 규정을 꽁꽁 숨기고 싶어 했을까? 나중에 규정을 받아 내용을 살펴보니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육군은 '정훈공보업무 규정' 상 '유형별 보도조치', '공보대응체제 및 조치'와 관련한 규정이 '내부검토 과정에 있는 사항'이라며 비공개했었다. 이미 만들어 둔 규정을 두고 내부검토 과정에 있다는 육군의 설명은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역시 중앙행정심판위원회가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렸는데, 나중에 내용을 들여다보니 비공개 되었던 부분은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의 언론 대응 방식, 지휘관, 법무, 군사경찰 등으로 구성된 언론대책반을 꾸리는 방법, SNS 모니터링 및 대응 요령 같은 것이었다. 보기에 따라 부대에 일이 터졌다고 이렇게까지 과잉으로 언론 대응을 해야 하는지 의구심을 가질 법한 내용들이었다. 군은 이처럼 밖에 내놓긴 껄끄럽지만 감출 명분은 없었던 규정들을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비공개했던 것이다.

군인권센터는 행정심판 결과 전부는 아니지만 다수의 규정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작전·임무수행과 무관한 행정사무 처리 관련 규정은 대부분 확보했다. 그러나 각 군 규정은 특성 상 수시로 내용이 바뀐다. 그렇다고 매 번 바뀔 때마다 정보공개청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언제 개정이 되는지도 알 길이 없다. 별 수 없이 번거롭지만 주기적으로 다시 정보공개청구를 하는 방법 외엔 길이 없다.

지나친 비밀주의는 우리 군의 병폐다. 숨길 필요가 없고, 숨길 이유도 없는 것들이 '군'이란 한 글자만 붙으면 모두 군사기밀 마냥 성역화 된다. 그러니 군인들이 민간단체에 전화해 자기네 규정을 질문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는 것이다.

군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나 자녀를 잃은 유가족이 군인들에게 뭘 묻거나 요구했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은 '규정에 따라 제한된다'다. 그러나 규정을 펴보면 그런 규정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아전인수로 해석된 경우가 많다. 폐쇄적인 조직 특성을 십분 활용해 피해자와 그 가족을 우롱하는 것이다. 국가기관의 불필요한 비밀주의가 빚어내는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제 각 군도 정보공개청구를 받았을 때 공개해야 하는 규정을 법제처 홈페이지에 공개 해둘 때가 되었다. 청구해서 받아볼 수 있는 정보를 미리 공시해두는 것도 국가기관의 책무다. 장병들도 자기들에게 적용 될 법령규정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복무해야 할 것이 아닌가. 뭐만 하면 은폐, 조작, 축소한다는 오명을 벗어나려면 불필요한 비밀주의부터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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