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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변신 직후인 1991년 10월 10일에 쓴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의 서문에서 "아아. 산다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가? 끝끝내 자유천지를 보지 못하고 나 역시 더러운 먹물 시궁창에서 굶주린 개처럼 허덕이다가 죽고 말 것인가? 별 뜨듯 꽃 피듯 살 날은 그 언제인가?" 라는 알 듯 모를 듯 한 심경의 일단을 던졌다. 고 신영복 선생은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일생에 들어가 있는 시대의 양(量)을 근거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대의 양'을 헤아리면서 '영욕'이 겹치는 우리 시대의 거인 김지하 시인의 족적을 찾아 먼 길을 떠나고자 한다.[편집자말]
2012년 11월 26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김지하 선생 초청 시국강연회'가 열리고 있다.
 2012년 11월 26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김지하 선생 초청 시국강연회"가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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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지하 시인이 작고하였다. 2022년 5월 9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빈소가 마련된 강원도 원주 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과 인연이 있었던 정치인ㆍ문인 등 각계 인사들이 찾아와 유족을 위로하며 함께 아픔을 나눴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 이명박·박근혜를 비롯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김부겸 국무총리,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황희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종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윤정모 (사)한국작가회의이사장, 김석종 경향신문사사장, 배우 최불암씨, 가수 조용필 씨 등은 근조화환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경향신문, 2022년 5월 10일)

가히 거물급 장례식장의 모습이다. 

그의 부음 기사는 "독재에 맞섰던 '투사 시인' 끝내 변절 오명 벗지 못한 채…"(한겨레), "독재정권과 싸운 '저항 시인', 김지하 별세, 1990년 이후엔 '변절' 논란도"(경향신문) 신문 제목이 요약했듯이, '저항'과 '변절'이라는 양면성을 보인 영욕의 생애였다. 

해방 후 한국문학인 중에서 그이 만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화제를 많이 남기고 굴곡진 삶을 이어온 문인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비바람과 구름을 몰고 다니는 문화계의 풍운아였다.
 
1975년7월20일, 지학순 주교(가운데 꽃다발 쓴 이)와 김지하 시인(지 주교 오른쪽)이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을 향해 가두행진 중이다.
 1975년7월20일, 지학순 주교(가운데 꽃다발 쓴 이)와 김지하 시인(지 주교 오른쪽)이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을 향해 가두행진 중이다.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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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가 광란의 칼춤을 추던 1970년대 그는 1급의 저항시인으로서 청년 학생과 양심적 지식인들의 대변자이고, 민주회복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부패 타락한 기득권 동맹체 5적들은 시인에게 무기형을 선고하고, 해외의 여론이 무서워 죽이진 못하고 긴 세월 감옥에 집어넣었다. 

무릇 진리와 정의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새끼를 친다고 했다. 그는 감옥에서 면벽을 통해, 수양하고 생명사상을 탐구하면서 거목으로 성장한다. 강한 자는 더욱 강하게, 약한 자는 허물어지게 만드는 곳이 감옥의 생리다. 감옥은 시인에게 고통과 함께 저항의 촉진제를 안겨주었다. 

젊은 문사 김지하는 청년·문인들의 우상이고 양심과 지성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본명 김영일이 아닌 필명 김지하는 1970~80년대 암울한 한국지성계의 '집합명사'였다. 금서가 된 그의 저항시 〈오적〉과 〈비어〉 등은 복제하거나 베껴서 은밀히 읽혔다.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되면서 한국인의 자부심으로 공유되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김지하 석방기도회를 열고, 외국지식인들이 한국 정부에 석방탄원을 진정하면서, 그는 국제적 명사의 반열에 올랐다. 연꽃을 상징하는 로터스상을 받을 때는 모두가 환호했다.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역사가 반동하는 암흑기에 그는 온 몸을 던져 군부독재와 싸웠고, 긴 세월 동안 개인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초와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도 시어(詩語)는 무뎌지지 않았으며 그의 존재는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원주민들'의 희망이고 로망이었다.

우리에게는 앞선 문사들의 아픈 사력이 남아 있다. 위암 장지연,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이 대표급이다. 〈시일야방성대곡〉,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을 각각 집필한 그들의 변신을 기억한다. 아울러 다른 위치에 선 단재 신채호, 이육사, 심산 김창숙과 대비된다. 단재의 〈조선혁명선언〉, 육사의 〈광야〉, 심산의 〈죽으면 죽었지 욕되게 살수는 없으리〉를 기억한다. 단재는 여순감옥, 육사는 베이징감옥에서 옥사하고 심산은 성주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문사와 지사는 고난 속에서 더욱 빛을 발휘한다.

김지하는 '시인'으로 묶기에는 거대한 지식의 총람이었다. 문ㆍ사ㆍ철ㆍ시ㆍ서ㆍ화에 이어 창(唱)과 판소리ㆍ탈춤에 조예가 깊었다. 박학다식하여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쉴새없이 바람에 일렁이는 바닷물결처럼, 활활타는 장작불처럼, 그는 물결치며 불결 속에서 살았다. 

그가 마주한 시대의 파고가 너무 거세었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화중생연(火中生蓮) - 활활 타는 불길 속에서도 청초하고 향기로운 연꽃이기를 바랐다. 대중은 폭압과 반 이성의 시대에 누군가 제물이 되어주길 원한다.(자신은 빼고) 하지만 '희생양'은 서럽고 비통하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낭떠러지, 아니면 변신의 줄타기 - 그래서였을까. 
 
1991년 4월 명지대 강경대의 죽음 이후 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르자 시인 김지하는 5월 5일 <조선>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글을 게재, 학생운동을 비판했다.
 1991년 4월 명지대 강경대의 죽음 이후 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르자 시인 김지하는 5월 5일 <조선>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글을 게재, 학생운동을 비판했다.
ⓒ 조선일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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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세력이 기피하는 신문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반독재 투쟁의 젊은 넋들을 거칠게 비판하고, 이어서 여성 대통령이 등극하면 모권이 회복되고 후천개벽의 세상이 된다면서 독재자의 딸을 지지하고, 민주진영의 인사들을 공개비난하고, 통합진보당을 해체하라고 포문을 열었다.

"'지식인은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이나 군주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는 자신을 버린 옛 운동진영을 비판해왔고, 자신을 찾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보수세력의 품에 안겼다. 보수세력이 돈과 권력과 위세와 여유 모든 것을 쥐고 있는 한국 땅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똑똑한 지식인의 변신은 87년 이후 지금의 뉴라이트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왔고, 그의 변신도 그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김동춘,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 한겨레 2012. 12. 4)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 〈타는 목마름으로〉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자유〉에서 영향 또는 표절이라는 비판이 없는 바 아니지만, "1970년대 말에 선연한 핏빛 서정으로 아우성치는 첫 시집 <황토>"(최재봉, <한겨레>, 2022. 5. 9) 등은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작품이다.  

"시인 김지하, 한 때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1970년대 지상은 유신독재의 세상이었지만 지하는 김지하가 지배하고 있었다. 한 시대의 정신이었다. 김지하의 시는 체념과 절망을 베어버렸다."(김택근, 〈네 죽음을 기억하라〉)

"그가 죽도록 고생하고 출옥했을 때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운동세력의 좁은 품에 한탄스럽다. 그리고 늙어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 한 사람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척박한 정치현실을 한탄한다."(김동춘, 앞의 글)

일찍이 <지조론>을 쓴 문인은, "글을 업(業)으로 삼으려고 마음 먹는 날 천애의 고독과 빈한을 함께할 절조란 것이 싹을 트리라. 그러나 그 싹이 끝까지 지켜지느냐 부러지느냐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를 결정할 문제이다."(조지훈, 〈영원과 고독을 위한 단상〉)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지하, #시인김지하평전, #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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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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