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4 05:41최종 업데이트 22.06.14 05:41
  • 본문듣기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우승은 한국 야구계를 흥분시켰다. 야구는 1970년대 들어 국내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떠올랐지만 그것을 통한 '국위선양'이 곤란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었고, 한국야구의 실력도 기껏해야 아시아 3위권을 맴도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훌쩍 뛰어 넘어 전해진 세계대회 우승 소식은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대한야구협회는 1977년 12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야구연맹(AINBA) 총회에 대표를 파견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유치 의향을 전달했다.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는 비인기종목이었던 야구에서 세계선수권대회의 위상은 높았지만 관심은 낮았기에 특별한 유치경쟁은 없었고, 이듬해인 1978년 한국 정부의 지원 의사를 확인한 국제야구연맹 총회의 결정을 거쳐 유치가 확정됐다.

그리고 1980년 4월 17일, 대회 개최를 위해 잠실에 새 야구장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동대문의 서울야구장에 비해 두 배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관중석과 미국 메이저리그의 정식 경기장과 맞먹는 좌우 100m, 중앙 125m의 광활한 그라운드를 갖춘 야심찬 설계가 적용된 야구장. 세계인의 눈 앞에 한국야구의 위상을 과시하고자 하는 야심의 투영이었다.
 

한일전, 그리고 결승전 1982년 9월 14일,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우승자를 가리는 최종전이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이어졌다. 2대 0으로 뒤지던 4회 말이다. ⓒ 국가기록원

  
여러 모로 준비는 순조로왔다. 하지만 대회 유치가 결정되고 야구장이 지어지기 시작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사이에 대한민국은 가장 극적인 정치적 격동을 경험해야 했고, 그 여파는 야구장으로도 전해졌다. 또 한 번의 군사정변을 통해 들어선 새 정부는 한 편으로는 전 정권에서 시작한 국제대회 유치 작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전 정권이 억제했던 프로스포츠의 창설 작업을 오히려 주도했다. 5공화국이 '스포츠공화국'이라 불리게 된 이유였다.

그 첫 번째 가시적인 성과가 1981년 9월 30일에 전해졌다.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와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인 끝에 19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확정된 것이다. 이제 1982년 9월에 치러지게 되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올림픽 개최를 예비하는 거국적인 사전행사로서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과 두어 달의 간격을 두고 두 번째 움직임의 성과 역시 세상에 알려졌는데, 다름 아닌 프로야구의 창설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소식이 만들어낸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비 작업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정책을 추진하던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문제였지만, 프로스포츠와 아마추어 국제대회의 준비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당시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와 세계선수권 우승, 두 마리 토끼를 쫓다

1981년 1월 13일 야구협회는 54명의 국가대표 예비엔트리를 발표했다. 이선희와 최동원이 이끄는 투수진과 포수 심재원으로부터 김봉연, 배대웅, 김재박, 김용희로 이어지는 내야진, 그리고 김일권, 이해창, 장효조의 외야진까지 실업야구의 슈퍼스타들이 뼈대를 이루고 한대화와 선동열 등의 대학 선수들이 후보 자리를 다투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발.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우승과 19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던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중심이 되고 대학선발팀 1진들이 가세한 명단이었다. 잠실에 새로 지어지는 매머드급 야구장과 더불어 역대 최강의 국가대표팀 구성은 세계 무대의 중심에 한국 야구를 세우는 화려한 의식의 가장 중요한 준비과정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 1981년 9월 30일 밤 10시,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서울은 일본 나고야를 52대 27로 누르고 올림픽 유치 도시로 결정됐다. 그리고 그 결정은 1년 앞으로 다가온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예비 올림픽'이라는 의미를 더했다. ⓒ 국가기록원

 
하지만 1981년 11월 5일 청와대 교육문화비서실의 주도 아래 이용일과 이호헌이 작성한 '프로야구 창립계획서'에 대한 대통령 결재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다시 한 달 뒤인 12월 11일에는 프로야구 창립총회가 치러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2월까지 6개의 프로팀이 창단되고 3월에는 개막전이 치러진다는 일정이 공개되었다.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하필 1982년에 시작되게 된 것이다.

흔히 '국제야구연맹'으로 불리던, 대회를 주관하는 AINBA의 정확한 명칭은 '국제 아마추어 야구 협회'(Association International Baseball Amateur)였다. 당연히 프로 선수들은 관할 대상이 아니었고, 그 단체가 주관하는 대회의 출전 자격도 물론 없었다.

프로야구단 창단을 결정한 시점부터 불과 4개월 안에 개막전을 치를 준비를 마쳐야 하게 된 6개의 대기업들은 선수 영입 작업에 열을 올렸다. 물론 최우선 대상은 실업야구무대에서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20대 중후반의 선수들이었지만, 창단 초기에는 특히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가능한 한 많은 선수를 확보하고 싶었던 기업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세 소년부터 이미 야구장에서 사무실로 활동 중심을 옮겨가고 있던 30대 초반의 노장들까지도 찾아 다니면서 돈가방을 열어 보였다.

그 중에서도 '현역 국가대표급'이라면 최고의 몸값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A급'으로 지칭된 그들의 계약 기준은 '계약금 1500만원과 연봉 1800만원'이었다. 1982년 대통령의 월급이 127만 원이었으니 대통령보다 많은 연봉이 보장되었던 셈이다. '최저연봉'을 받을 수 있는 'F급'의 선수들도 계약금 200만원과 연봉 6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역시 직업공무원 중 최고위직인 차관의 월급 58만원보다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야구선수들이라면 누구나 프로팀 입단을 선택하게 할 만한 강력한 유인이었고, 국가대표 예비명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선수들이라면 거의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야구협회였다. 대회의 성공적인 운영과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대중이 받아들이고 정부가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분리될 수 없었다. 대표팀의 좋은 성적 없이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강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업야구 최고 스타 김재박 1977년 실업야구 공격부문을 휩쓸며 7개의 개인상을 독차지한 실업야구 최고 스타 김재박. 너무 뛰어난 실력 탓에 프로 입단이 1년 미뤄진 그는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차원이 다른 수비 실력을 과시했지만 타격에서는 의외로 부진했다. 하지만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번트 하나로 그 대회의 상징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 국가기록원

 
그래서 야구협회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다면 프로야구 창설을 한 해 미루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국가대표 주력 선수들의 프로팀 입단만이라도 한 해 미루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세계선수권대회 준비 역시 국가적인 관심사였지만 청와대가 직접 구상하고 추진해온 프로야구 창설 작업에 비하면 우선순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야구협회의 요구는 '대통령의 뜻'을 등에 업은 야구위원회의 기세에 가로막혔고, '다소간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잘 극복해줄 것으로 믿는다'는 청와대의 메시지 앞에서 주저앉아야 했다.

그런 표류와 난관 끝에서 맺어진 결론이 '7인의 유보조치'였다. 전력의 핵심이 될 9명 정도의 선수를 국가대표팀에 양보한다는 취지 아래, 어차피 군 복무 중이라 프로팀 입단이 불가능했던 장효조와 김시진을 제외한 7명의 실업선수들을 국가대표팀이 선발하면 1년간 프로팀 입단을 막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선정된 것이 투수 최동원과 임호균, 포수 심재원과 유격수 김재박, 그리고 외야수 김일권, 이해창, 유두열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김일권이 국가대표팀 숙소를 탈출해 해태 타이거즈와 계약하고 야구협회로부터 영구제명 당하는 소동이 일어나면서 균열이 생겼고, 결국 '재발방지'를 약속한 양대 야구기구의 약속 속에서 나머지 6명만 '국가를 위해'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태극마크를 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첫 우승이 목표인, 역대 최약체 국가대표팀

1982년 9월 4일, 대회가 시작되었고 한국대표팀은 '기필코 우승'을 외치는 안팎의 기대와 달리 선수단 구성의 한계를 드러내며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최약체 이탈리아와의 개막전에서 긴장한 듯 주루사와 병살타가 빈발하며 뜻밖의 역전패를 당했고, 대학 1학년생 선동열의 호투로 우승 경쟁자 미국과 대만을 잡아내며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파나마, 도미니카와의 경기에서도 고전 끝에 아슬아슬한 승리를 이어갔다.

마운드는 그럭저럭 버텨볼 만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우승과 1980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왼손 에이스 이선희가 빠지고 그 다음 순위의 투수들로 꼽혔던 최동원과 김시진이 예상 밖으로 부진했지만, 신예 선동열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준 데 더해 임호균이 제 역할 이상을 해준 덕이었다.
 

떠오른 태양, 선동열 고려대 2학년생 선동열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미국, 대만, 일본전을 모두 완투해 3승을 거두며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에이스로 등극했다. ⓒ 대한체육회

 
하지만 야수진의 공백은 생각보다 더 컸다. 1980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도루와 득점 부문 1위와 타격 3위에 올랐던 것을 비롯해 지난 몇 년간 국제대회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해준 김일권의 이탈이 가장 뼈아팠고, 배대웅과 김용희가 빠진 2루와 3루도 공수 양면에서 허전했다. 특히 2루수 정구선과 박영태가 모두 빈타에 시달렸고, 그나마 동국대의 유격수 한대화가 이선웅 대신 3루수로 기용되며 2개의 실책을 기록하긴 했지만 대만전에 홈런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좋은 공격력을 선보이며 대안으로 떠오르는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그 대회 한국팀의 팀타율은 .256에 불과했는데 전체 10개 팀 중에서 8위에 해당했다.

대회 9일째인 9월 13일에 치러진 호주전은 모든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가장 큰 고비였다. 2회와 3회 유두열과 이해창의 홈런으로 먼저 앞서갔지만 에이스 최동원이 4회 초에 갑자기 흔들리며 집중타를 맞고 5실점하면서 역전을 허용했다. 최동원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한국대표팀의 에이스였지만 간혹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약점이 있었고, 그 단점이 그 날 다시 드러났던 것이다.

공격에서도 부족한 경기 경험과 매끄럽지 않은 호흡이 이어졌다. 초반에는 추가득점의 기회마다 박영태의 견제사와 장효조의 주루미스가 이어지며 맥이 끊어졌고, 역전을 허용한 뒤로는 기세가 꺾이며 공회전이 반복됐다.

그나마 오영일과 김시진까지 투입하며 총력전을 벌이고도 3점 차까지 벌어지며 기울었던 경기는 8회와 9회 한대화와 장효조의 극적인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며 연장으로 이끌었고,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이미 경기시간이 3시간 30분을 넘어서면서 대회 규정에 따라 연장전은 다음 날로 넘겨졌다.

뜻밖의 큰 고비, 호주전

그 날 밤 대표팀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호주를 가볍게 제압한 뒤 다음 날 있을 일본과의 최종전을 준비한다는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선발투수 3명을 한꺼번에 소진해버린 상황에서, 선동열을 일본전 선발투수로 남겨둔다면 그 일본전에 우승의 기회를 남겨놓기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호주와의 연장전은 어떤 투수에게 맡겨야 할지 난해한 문제였다. 게다가 충격적인 난타를 당한 선발투수 최동원이 숙소에서 말없이 사라지면서 동료 선수들이 수색에 나서는 소동마저 벌어졌고, 분위기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이튿날인 1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다시 시작된 연장 10회 초에 마운드에 오른 것은 임호균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빠른 공을 가지지 못했지만 신기에 가까운 제구력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대표팀에서도 가장 위험한 순간에 투입되는 해결사였다. 이미 파나마전과 도미니카전에서 각각 1이닝과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패배 직전의 팀을 구하는 2세이브를 기록했던 임호균이 다시 10회부터 15회까지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주었고, 여전히 덜컹거리며 빈공에 시달리던 타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15회 말 1사 후 유두열이 띄운 희생플라이로 간신히 결승점을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채 반 나절도 쉬지 못한 채 그 날 저녁 6시 30분부터 대회 마지막 경기를 치러야 하는 힘겨운 상황이 남아있었다. 선발투수로 선동열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흔들릴 경우 뒤를 받칠 투수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전날 던지지 않은 투수는 박동수와 박노준 뿐이었지만, 최종전에, 특히 결승전에, 혹은 한일전 마운드에 올려보낼 만한 선수들은 아직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날 치러야 하는 최종전은 공교롭게도 풀리그 방식으로 치러진 그 대회에서 한국과 꼭 같은 9승 1패를 기록한 일본과의 경기였고, 그 경기에서 이긴 팀이 우승을 하게 되는 조건이었다. 간신히 한 고비 넘겼다는 안도감보다 몇 배 무거운 피로감과, 부담감을 안고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최악의 상황 속, 결승 한일전 
 

한일 열전의 배경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졌고, 극에 달한 반일감정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간의 결승전에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사진은 1982년 7월 30일에 열린 일본역사교과서왜곡문제 공청회. 신용하, 정원식 교수 등이 참석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마지막 날 경기의 상황은 굳이 자세히 복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은 예상했던 만큼의 피로감과 부담감을 드러내며 2회 초 연속안타와 실책, 희생플라이를 허용해 2점을 먼저 내준 반면, 공격에서는 일본의 선발 스즈키에게 7회말 까지 단 1개의 내야안타 밖에 뽑아내지 못하며 끌려갔다. 하지만 전설적인 8회 말에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선두 심재원의 중전안타와 대타 김정수의 2루타로 한 점을 만회했고, 조성옥의 희생번트로 1사 3루의 동점 기회를 만든 데 이어 여전히 그 의도와 맥락이 미궁에 빠진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가 튀어나오면서 동점 성공. 그리고 이해창의 안타가 이어지며 만든 1사 1, 3루의 역전 기회에서 장효조의 내야땅볼이 나왔지만 일본 2루수의 잘못된 선택으로 병살 위기를 모면한 직후 터져나온 한대화의 장쾌한 석 점짜리 결승 홈런.

결국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일본에게, 경기 초반 끌려가다가 막판에 극적인 방식으로 뒤집어내면서 얻은 5대 2의 승리와 우승. 그 뒤로 40년의 세월 동안 숱한 한일전에서, 혹은 굳이 한일전이 아니라도 어느 팀의 승리를 간절히 비는 수많은 야구팬들의 기억과 마음 속에서, 저물어가던 희망과 집념을 되살려내는 주문으로 소환되고 떠올려져 또한 수많은 극적인 역전극으로 재현되어온. 그래서 흔히 '약속의 8회말'이라 불리게 된 그 순간.

그 우승은 그 해 시작된 프로야구가 봄과 여름 내내 이어지며 만들어낸 숱한 이야기들 위에 찍은 커다란 마침표가 됐고, 여전히 야구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삶에 마저 깊이 새겨진 전설이 되었다. 10년 이상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아온 야구가 '국민스포츠'로 비약한 것은,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개구리번트 2대 1로 뒤진 8회 말 1사 3루. 스퀴즈를 경계한 일본 배터리는 공을 하나 멀리 뺐고, 그것을 예상한 어우홍 감독도 스퀴즈 사인을 거두어 들였으며, 그에 따라 3루 주자도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타자 김재박은 공을 향해 뛰어오르며 번트를 댔고, 공격과 수비와 관중을 모두 경악시킨 그 타구는 3루 선상을 따라 흐르며 주자와 타자를 모두 살리는 동점 적시타가 됐다. 그리고 공수주를 갖춘 야구천재 김재박은 그 날 이후 번트로 좀더 유명한 이름이 됐다. ⓒ 대한체육회

 
'약속의 8회'에 '국민스포츠'가 태어나다

스포츠는 아주 촘촘히 한계지어진 공간과 규칙 속에서 승부를 가른다. 하지만 그 좁은 영역에서 출렁이는 승기와 패색의 흐름은 때로는 수천만, 혹은 수억의 가슴 속으로 전해져 거대한 파동을 만들고 끝내는 수십 년을 흘러 역사에 녹아들기도 한다.

1982년 9월 14일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몇 개의 사건 중 하나였고, 그것이 오늘도 저녁 6시 30분이면 수백만의 눈길을 그라운드로 향하게 할 것이며, 또 8회가 되면 응원하는 팀의 짙어가는 패색에 지쳐있던 이들이 주술에라도 걸린 듯 반전의 희망을 되살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 희망이 현실이 되는 순간, 어떤 이들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 속에서, 어떤 이들은 눈으로 귀로 전해진 전설 속에서 그 원형의 순간을 잠시나마 떠올릴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