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1 05:55최종 업데이트 22.06.2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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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왜 프로야구를 해야 할까요? 1년에 수백억씩 적자를 감수해가면서 말이죠. 홍보 효과가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물론 우승을 하면 좋겠죠. 그룹 임직원 사기도 올라가고, 기업 이미지도 좋아지고. 하지만 만약 꼴찌라도 하면? 오히려 욕먹고, 마이너스 효과 생기고. 원래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도 아닌데 말이죠."

프로야구의 연간 관중이 400만에도 미치지 못하던 지난 2000년대 중반 무렵, 어느 대기업 계열 프로야구단의 고위 인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그 얼마 뒤부터 프로야구의 인기가 급상승해 관중이 두 배 이상 늘어나고 새 구단 창단 경쟁까지 벌어지면서 잠잠해졌지만, 최근 그 흐름이 한풀 꺾이면서 비슷한 이야기들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정말, 한국의 기업들은 왜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걸까? 그리고 애초에 왜 프로야구단을 만든 것일까?

기업은 왜 프로야구를 할까?
 

프로야구 출범식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의 서울야구장에서 프로야구 출범식과 개막전이 열렸다. 첫 시구자는 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한 대통령 전두환이었다. ⓒ 국가기록원


"프로야구의 탄생은 제5공화국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국민에게 건전한 오락과 화제를 제공, 흩어진 민심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근본 취지였다. … 그 어느 기업도 선뜻 나서질 못한 채 정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프로야구를 창단할 경우 선수단 계약금과 연봉 및 구단 운영비와 경상지출 등을 합치면 연간 7억 원 이상의, 당시로서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데다 프로야구의 흥행도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 이런 시점에서 삼성의 프로야구 참여 결정은 정부 쪽에 힘을 실어주는 촉매제가 됐다."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내 '구단 히스토리')

1982년 원년부터 프로야구에 참여하고 있는 명문 구단 삼성 라이온즈의 설명이다. 프로야구의 창설을 주도한 것은 5공화국 정부였으며 삼성은 그 취지에 공감하고 힘을 실어주는 차원에서 프로야구단을 창단했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프로야구란 경제적 타산과는 무관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기업은 단지 정부의 의지와 그 사회적 의미에 공감해 사회적 기여 활동의 일환으로 참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삼성만이 아닌,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가진 기본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제안되고 그해 가을 이용일과 이호헌에 의해 작성되어 대통령의 결재를 얻은 '한국프로야구창설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계획서를 작성한 이들이 창설 실무 작업을 맡았으며, 그들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며 힘을 실어준 것은 당연히도 대통령과 그의 비서관들이었다. 제안자와 설계자, 실행자와 배후의 실권자가 분명한 실체를 가진 과정이었던 셈이며, 누가 주도하고 누가 협조했는지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협조했다는 기업들의 설명에는 잘못이 없다.

하지만 '협조' 차원에서 프로야구에 참여한 일이 기업들에게 과연 '울며 겨자먹기'였는지, 아니면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일이었는지는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전자라면, 그나마 내키지 않는 일에 나서고도 40년 동안이나 꾸준히 적지 않은 적자를 감수하며 프로야구단을 운영해온 기업들에게 적어도 야구팬들만이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라면, 기업들 역시 자신들의 능동적인 경영활동의 일부인 프로야구단 운영에 대해 좀 더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지역연고제와 대기업 중심 창설 계획

1976년 재미사업가 홍윤희와 실업야구연맹 인사들이 추진하다가 좌초된 '직업야구 창설계획'의 뼈대는 5년 뒤 이용일과 이호헌이 작성한 '프로야구 창설계획'에 그대로 활용되었다. 그 핵심은 지역연고제였고, 각 지역에 연고를 가진 민간기업이 해당 지역 출신 선수들을 모아 팀을 창설하게 함으로써 애향심을 매개로 국민적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 계획에 따라 전국이 서울, 인천-경기-강원, 부산-경남, 대구-경북, 호남, 충청의 6개 권역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에 연고를 가진 대기업들에게 프로야구팀 창단을 제의했다.

창설준비팀은 각 지역마다 1순위와 2순위 후보 기업들을 정해두고 있었다. 서울은 1순위 MBC(문화방송)와 2순위 두산. 인천-경기-강원은 1순위 한국화장품과 2순위 한진. 부산-경남은 1순위 롯데와 2순위 럭키금성. 대구-경북은 1순위 삼성과 2순위 포항제철. 호남은 1순위 삼양사와 2순위 해태였으며, 충청은 1순위 한국화약과 2순위 동아건설이었다.
 

창단식 1982년 1월 5일, 6개 구단 중 최초로 OB 베어스가 창단식을 치렀다. 청와대 교육문화비서실의 주도로 작성된 '프로야구 창립계획서'에 대통령의 결재가 이루어진 지 꼭 2개월만이었다. ⓒ 두산 베어스


결국 서울과 부산-경남, 대구-경북은 1순위 후보 기업이, 호남은 2순위 기업이 참여를 결정했고 충청과 인천-경기-강원은 후보에 없던 기업들이 창단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구체적인 창단 제안이 이루어진 시점으로부터 2개월 내에 창단이 이루어지고 3개월 내에 개막전이 치러져야 했을 만큼 촉박한 일정이었기에, 그 모든 과정 역시 순탄하게만 흘러갈 수는 없었다.

절반의 지역에서 1순위 대상 기업은 정부의 제안을 거부한 셈이고, 각 지역의 1순위 후보로서 창단한 MBC와 롯데, 삼성 역시 이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진통들은 기업들이 '내키지 않는 겨자를 먹으며 눈물 흘리는' 과정이었을까?

정부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기업들

하지만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1982년 프로야구단 창단을 둘러싸고 기업이 난감함을 드러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6개 중 3개의 기업이 정부보다도 오히려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나머지 3개의 기업도 약간의 이견 표출이 있긴 했지만, 창단 자체가 아니라 창단 방식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롯데와 MBC는 청와대보다도 먼저 프로야구단 창단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미 1970년부터 일본에서 프로야구단 도쿄 오리온즈(현 치바 롯데 마린스)를 인수해 운영해온 롯데는 그 경험을 살려 1975년 한국에서도 실업야구팀 롯데 자이언트를 창단해 경기 실적에 따른 보상체계와 다양한 홍보전략 등 프로팀에 준하는 운영을 선보이고 있었다. 또한 MBC도 정권 홍보를 위해 스포츠를 활용한다는 나름의 구상으로 창사 20주년이 되는 1981년 6월에 맞추어 프로야구단을 창단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삼미의 입장도 적극적이었다. 미국 유학 중에 야구 문화를 접하고 프로야구의 가능성을 확인한 삼미의 김현철 회장이 먼저 프로야구 참여 의사를 밝힌 경우였기 때문이다. 삼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연고지 인천은 이미 영광의 50년대를 보낸 이후 20여 년간 긴 침체에 빠져 강한 전력을 구성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삼미 그룹이 소비재 부문의 계열사를 가진 것도 아니라 큰 경영적 효과를 얻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았을 정도의 적극성이었다.

삼성, 두산, 해태 등 나머지 세 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태는 당대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던 김동엽이 감독을 맡아주어야 한다는 점을 유일한 전제조건으로 내걸었고, 삼성은 현대와 대우가 빠지면서 '격이 맞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산이 가장 큰 진통을 겪은 경우이긴 했지만, 그것 역시 창단 자체에 대한 이견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서울 연고팀 창단을 원했던 두산은 별다른 연고가 없을 뿐 아니라 지역 내 고교야구부들의 역사가 짧아 강한 전력을 꾸리기 어려웠던 충청권 연고의 창단을 요구받은 데 대해 반발했고, 결국 서울 연고 선수 1/3에 대한 지명권과 3년 후 서울 연고지 이전 권리를 보장한다는 타협안을 수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선수 공개모집 창단을 결정한 기업들은 선수 확보에 열을 올렸고, 자원이 넉넉하지 못했던 지역에서는 빈틈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하기도 했다. 사진은 OB 베어스의 비등록선수(비선출) 대상 공개 입단테스트 등록을 위해 길게 줄을 선 응시자들. ⓒ 두산 베어스


그렇다면 프로야구단 창단 제안을 거부한 기업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두산의 창단 과정을 복잡하게 만든 충청 지역의 1순위 후보 기업이었던 한화의 경우에는 프로야구 참여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급작스럽게 별세해 그룹 차원의 승계작업에 들어가면서 곤란해진 경우였다. 그래서 3년 뒤 두산이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게 됐을 때 남겨진 충청을 연고로 하는 신생팀을 창단한 기업이 한화였다.

삼성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었던 현대그룹의 경우 총수 정주영이 서울올림픽 유치 작업과 개최 준비작업을 주도하는 민간부문의 구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정이 고려되었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본격적으로 프로야구 참여를 시도했고, 결국 1996년 태평양 돌핀스를 매입해 현대 유니콘스로 재창단하기도 했다.

그 외에 비교적 기업 규모가 작았고 소비재 관련 부문과 거리가 있던 삼양그룹(동아일보 계열의 화학회사)과 동아건설이 내부 논란 끝에 참여를 포기한 사례가 있고, 공교롭게도 그룹 총수가 해외 장기 출장 중에 제의를 받아 의사결정이 늦어지면서 배제된 럭키금성은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LG 트윈스로 재창단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프로야구 불참에 대한 정권의 보복이나 실망의 표현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각자 사정이 있거나 야구에 대한 흥미가 없다면 참여하지 않았고, 참여한 기업들은 제안한 쪽 못지않게 적극적인 태도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대기업이 공중분해 될 수 있었던 공포의 시대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한국의 대기업들에게 프로야구는 꽤 할 만한 사업 분야였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해볼 만한 사업이었다

이미 실업야구연맹을 중심으로 프로야구 창설을 추진하다가 정권의 압력에 눌려 무산됐던 1976년으로부터 5년,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되어있던 조건은 더욱 무르익어 있었다. 물론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정부가 교체되며 프로야구에 관한 태도도 반전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지만 그 외의 경제적 조건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성과에 더해 오일쇼크의 충격도 다소 해소되면서 내수소비시장이 크게 확대되었고, 결정적으로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미디어의 시대가 열렸다. 내수소비의 확대와 미디어의 성장을 보여주는 단면이 광고산업인데, 1970년대 내내 국민총생산(GNP)의 0.4%선에 머물다가 1975년에 처음 0.6%를 돌파한 총광고비는 1980년에는 0.8%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1982년 1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은 6개 프로야구단의 구단주들을 청와대로 초청했고, 그 자리에서 각 부 장관들에게 직접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 언론기관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할 것 ▲ TV 골든아워에 외화와 드라마, 연예 프로들을 줄이고 대신 프로야구 중계방송을 적극적으로 할 것 ▲ 구단들이 흑자가 될 때까지 면세 조치하고 선수들의 병역을 비시즌에 방위병으로 나누어 복무할 수 있도록 할 것.

대통령의 지시는 그대로 실행되어 1983년 MBC의 경우만 따져도 전체 300경기 중 TV로 70경기, 라디오로 121경기를 중계방송했다. KBS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KBS의 B가 야구(Baseball)냐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3개의 채널을 독점하던 두 개의 방송국이 TV를 통해서만 연간 140시간 안팎의 야구 경기를 중계방송했다고 추산할 수 있는데, 이는 각 구단의 입장에서 연간 50여 회에 걸쳐 3시간가량씩 동안 화면과 캐스터의 목소리를 통해 기업의 이름과 로고를 대중에게 노출할 기회를 가진 셈이 된다. 당시 TV 방송 단가가 30초당 80만 원 안팎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그 광고효과 역시 최소한 연간 수십억 원 이상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정부의 시책에 협조한 기업으로서 누릴 수 있는 무형의 정책적 이익은 덤이었다.

특히 1980년대 초반 대부분의 재벌기업들은 이미 수십 가지 이상의 사업 분야에 진출하고 있었고, 그룹 이미지 홍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더욱 커져 있었다. 프로야구단 운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이 홍보 효과라면 단지 상품만이 아니라 기업의 이미지를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당시의 대기업들은 정치권력과 유착해 성장해왔다는 대중의 부정적 인식을 무마할 계기도 필요했다. 전두환 정권은 군사정변 직후 전 정권 핵심 인사들을 부정축재자로 단죄하면서 그들과 유착했던 기업인들의 과오를 함께 폭로하는 여론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는 1980년대 초반 한국의 대기업들이 안고 있던 과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정부에서 먼저 꼼꼼한 계획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넉넉한 지원방안까지 제시했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수락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맞은 위기의 시대, 올바른 관계 인식 필요

프로야구 창설은 기업들의 합리적 판단에 의한 능동적 경영활동의 일부였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리그 창설 3년 뒤 한화 그룹이 동아건설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충청권 연고의 7번째 구단을 창단하게 됐을 때 선발 6개 기업들이 30억 원의 리그 가입비를 요구한 끝에 도곡동의 7층짜리 건물(현 KBO 본부)을 얻어낸 것을 시작으로, 새 구단이 만들어질 때마다 진입장벽이 높아진 것은 그 방증이다.

하지만 기업들은 늘 그 성공은 애써 축소했고, 한때 정부의 압박에 굴복해 시작한 사업을 국민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해 유지하는 사회적 약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그 뒤에 숨어 왔다.

프로야구는 정권으로서는 집권 과정의 문제들을 무마하고 정치적 정당성을 높일 수 있는 이벤트였고, 기업으로서는 투자 가치가 충분한 사업 분야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주도성을 숨길 이유가 없었고, 기업은 굳이 적극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프로야구는 영광의 시대와 위기의 시대를 오가면서 '국민스포츠'의 위상을 다져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위기'를 극복할 방안에 대해 머리를 맞댈 시기를 맞고 있는 지금, 한 번쯤은 솔직한 자기평가와 재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들어온 정부와 기업과 팬의 올바른 관계 설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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