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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북쪽끝에 위치한 평화전망대는 개풍땅을 훤히 바라 볼 수 있다.
▲ 평화전망대 강화도의 북쪽끝에 위치한 평화전망대는 개풍땅을 훤히 바라 볼 수 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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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회에 걸친 '고도를 찾아서' 첫 번째 고장 강화의 이야기는 어느덧 마지막만 남겨두고 있다. 강화의 문화, 특색 있는 음식, 이야기를 품은 유적 등 동서남북 가릴 거 없이 넘나드며 이곳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찾으려 했다. 이제 남은 곳은 민통선 너머 북쪽, 인적도 차도 드문 지역이다.

섬 전체에 설화와 이야기로 가득한 강화도라 하지만 교통도 불편한 이곳을 굳이 와야 할까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1km가 약간 넘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개풍 땅과 마주하고 있는 강화도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을 피해 송해면에 위치한 승천포로 왕과 귀족들이 피난을 오기도 했다.

또한 북쪽의 요충지마다 방어요새인 진과 보 돈대가 설치되어 수도 한양의 방위를 보조했다. 하지만 현재는 군부대가 들어서 그 면모를 살피지 못한다.

강화도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
 
강화북쪽끝에 위치한 승천포를 통해 고려의 왕과 귀족들이 피난을 왔다. 현재는 고려천도공원으로 바뀌었다.
▲ 고려천도공원 강화북쪽끝에 위치한 승천포를 통해 고려의 왕과 귀족들이 피난을 왔다. 현재는 고려천도공원으로 바뀌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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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를 지나 교동도로 이어지는 48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검문소를 사이에 두고 갈림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교동도로 들어가는 길을 버리고 교산리로 들어가는 길을 택해 북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자.

나지막한 산자락을 양옆에 끼고 제법 넓은 들판이 푸르게 펼쳐져 있다. 그 들판의 끝자락에는 마을의 크기에 비해 규모가 제법 큰 교회가 언덕 위에 우뚝 자리했다. 교산교회라 불리는 이곳에는 필히 무슨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교회 초입에 서 있는 배와 세례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의 조형물이 이곳의 내력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강화북단의 교산교회는 강화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교회로 선상세례의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 교산교회  강화북단의 교산교회는 강화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교회로 선상세례의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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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제물포 교회에 부임한 존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강화를 찾아왔으나 입성을 거부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제물포에서 주막을 하던 이승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향인 강화 서사로 돌아가 어머니를 전도하여 그에게 세례를 요청하게 된다.

존스 선교사는 조선 사람처럼 복장을 하고 강화를 다시 찾아오지만 마을 사람들의 반발은 거세었고, "서양 오랑캐가 우리 땅을 밟으면 쫓아가서 그 집을 태우겠다"라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이에 이승환은 어머니를 업고 선교사가 있는 배로 가서 세례를 받게 하니 강화 땅에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게 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교산교회는 기독교 선교역사관으로 탈바꿈한 (구)교산교회와 새로운 예배당이 나란히 서있다. 1953년에 건립된 제법 오래된 교회로서 종교를 떠나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훌륭한 장소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김포성당, 포천성당과 형태가 유사하다.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교산리 고인돌이 있으니 함께 둘러보기 좋다.

화문석? 돌 석 아닌 자리 석(席)!

다시 차를 돌려 이번엔 화문석문화관으로 이동해 본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한국지리 시간에 각 지역의 특산물을 수학공식처럼 달달 외웠던 기억이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나주-배, 의성-마늘, 성주-참외인 것처럼 강화의 특산물의 첫머리를 차지한 것은 바로 화문석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화문석에 대해 종종 들어봤지만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필자도 어렴풋이 문양이 세겨진 돌(석, 石)이 아닐까 하는 지레짐작만 품은 채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화문석문화관에서는 화문석에 관한 각종 전시와 수공예품을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 화문석문화관 화문석문화관에서는 화문석에 관한 각종 전시와 수공예품을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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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문석은 왕골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엮어 만든 수공예품으로 소박한 무늬와 더불어 실용적 가치가 뛰어난 수공예품이다. 즉, 돌 석이 아니라 자리 석(席)인 것이다. 화문석의 재료가 되는 왕골은 일본, 중국에서도 자생하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공예 작물로 밭이 아니라 강화와 중부 이남의 지역의 논에서 주로 재배한다.

크게 뿌리, 잎, 줄기, 이삭, 꽃으로 구분하며 줄기가 화문석의 재료로 쓰인다. 속이 관다발로 되어 있고, 조직 사이에 빈 공간이 있어 부드럽고 푹신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선 보성의 용문석, 함평의 왕골 돗자리가 있으나 만드는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다.

강화 화문석의 역사는 문헌에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려 중엽부터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전해진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천도할 당시 자리류 중 최상품이었던 왕골 돗자리는 강화로 이주한 왕실과 관료를 위해 제작하게 되었고, 강화 화문석이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온 배경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 <교동군읍지>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곳의 특산물로 꾸준히 전승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에도 강화 화문석의 공예기술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번창했지만 화문석의 특성상 손으로 일일이 짜야하는 터라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강화 화문석은 왕골을 일일이 손으로 짠 수공예품으로 가격이 비싸 점점 쇠퇴하고 있다.
▲ 화문석 재현 강화 화문석은 왕골을 일일이 손으로 짠 수공예품으로 가격이 비싸 점점 쇠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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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화문석 문화관에서 화문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 전시가 이어지고 있고, 왕골공예 체험을 통해 아이들에게 생소한 화문석을 점차 알리고 있다. 화문석은 예로부터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혼례를 치른 신부가 시댁으로 들고 가기도 했고, 일하다 중간에 휴식을 취할 때, 제사를 지낼 때 등 강화 사람들의 생활에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라 할 수 있겠다.

화문석문화관에서 머지않은 곳에 화문석마을이 있다. 10가구 정도가 명맥을 이어가는 이 마을에서는 화문석과 관련된 체험뿐만 아니라 펜션, 바비큐장 등 테마시설이 두루 갖춰져 농촌체험으로 제격이다.

강화도가 역사·평화의 섬으로 발돋움하길

이제 기나긴 강화 여정의 마무리를 지으려 강화의 최북단 평화전망대로 오르기로 한다. 제적봉 자락에 자리 잡은 이 전망대는 교동도와 마찬가지로 검문을 거쳐야 하는 까다로움이 있지만 북한 개풍 땅을 훤하게 바라볼 수 있다.

한때 왕조의 수도였고, 수도 한양을 방위하는 유수부가 설치되었던 강화, 근대에 이르기까지 면직 공업으로 번성했지만 현재는 인천광역시에 속한 일개 군으로 전락한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찬란한 과거를 품고 다시 예전 같은 번영을 찾기 위해서는 철조망으로 막힌 북쪽 땅과의 교류가 필수다.

강화가 역사와 평화의 섬으로 발돋움하길 기원하며 고도를 찾아서 첫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경기별곡 2편) 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인문학 강연, 기고 문의 ug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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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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