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8 15:31최종 업데이트 22.06.2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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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케이블카 높이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즐겨 했던 일이 있다. 남쪽 용산을 등지고 북쪽 경복궁을 바라보며 차 한잔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서양제국주의의 세계 침략 때 그랬던 것처럼,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 때도 일본 종교가 첨병으로 나섰다. 1910년에 국권이 넘어가기 훨씬 전부터 남산과 용산 일대에는 일본 종교 시설들이 있었다.
 

숭의여자대학교 정문. ⓒ 김종성

   
그런 시설 가운데 한 곳이 훗날 경성신사로 불리게 될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다. 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에 있었던 신사다. 숭의여대 정문을 지나 운동장을 가로지르면 남산대신궁 신전 터에 안내문이 놓여 있다. 

안내문 서두에 적힌 "경성의 시내를 내려다보며 조선 지배의 꿈을 키우고자 했던 일제"라는 부분은 일본인들이 이곳에 신사를 세운 이유를 알려준다. 한양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일본의 혼을 심고자 했던 것이다.
 

남산대신궁 신전이 있었던 자리. ⓒ 김종성

 
안내문은 "1898년 10월 조선 정벌의 상징인 이곳에 서울의 일본거류민단이 일본 이세신궁에 모셔진 신체(神體) 일부를 가지고 와서 남산대신궁으로 창건하였다"고 말한다.

남산을 조선 정벌의 상징으로 여긴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주둔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왕(천황)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받드는 이세신궁은 일본 신도의 총본부 역할을 한다. 그런 이세신궁에 있었던 종교적 상징물 일부가 남산대신궁 조성에 이용됐던 것이다.
 

남산대신궁 안내문. ⓒ 김종성

 
일본거류민단이 남산대신궁을 세웠으므로, 외형상으로는 일본 국가권력과 무관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세신궁에 있던 신체 일부를 반출해 남산대신궁으로 반입했다. 일본 왕실은 물론이고 국가권력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남산대신궁은 건립 주체와 관계없이 일본 국가권력의 의도가 투영된 신사였다. 그런 신사가 국권 침탈 12년 전인 1898년에 건립됐으니, 일본 종교들이 얼마나 빨리 조선에 침투했는지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단골 찻집
 

찻집의 위치. ⓒ 김종성


한양 시내를 내려다보도록 설계된 남산대신궁에서 차 한잔을 즐기며 아래를 굽어 보던 인물이 있다. 조선 침략 설계자인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이 바로 그다. 위 안내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자주 찾던 찻집(현 강의C동)"이라는 문구가 있다. 숭의여대 정문 쪽에 입구가 있는 건물이 강의C동이다.

숭의여대 옆 소파로 거리에 늘어선 돈가스 식당들 쪽에 서면, 경사진 산비탈에 자리 잡은 강의C동이 보인다. 걸어가다가 올려다보면 약간 위태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경사가 심한 곳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의C동. 원 안의 사진은 학교 정문 쪽에 있는 C동 입구. ⓒ 김종성


그곳이 이토 히로부미의 단골 찻집이었다. 그가 통감으로 근무했던 한국통감부 역시 남산에 있었다. 남산대신궁 찻집은 그가 걸어서도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찻집에서 내려다본다는 한양 시내 전경이다. '경성의 시내를 내려다보며'라는 안내 문구처럼 북악산 밑 경복궁도 훤히 보이는 곳에 찻집이 위치해 있었다. 경복궁 주변에 관청이 밀집해 있었으니 조선을 이끄는 사람들을 찻집에 앉아 한눈에 내려다볼 수도 있었다. 조선 침략 프로젝트를 머릿속에 내장하고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그런 구상을 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찻집 바로 남쪽에는 용산이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래로 일본 군영이 조성된 용산이 바로 남쪽에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의지를 뒷받침해줄 군사력을 등 뒤에 둔 상태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침략 목표물들을 바라보며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위치였던 것이다.
 

남산대신궁 찻집과 경복궁, 용산. ⓒ 구글지도

 
이 찻집에서 이토가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남산 한국통감부 근무 시절에 그가 어떤 생각을 집중적으로 했는지를 반영하는 공식 발언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일제가 이 조치에 따라 설치한 기구가 한국통감부다. 통감부 업무는 1906년 2월 1일 개시됐다.


한국통감은 외교 문제뿐 아니라 내정에도 개입했다. 권한 밖의 사안에까지 간여했던 것이다. 이토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남산으로 불러 이것저것 지시했다. 이를 위해 비공식적으로 운용한 기구가 시정개선협의회다. 바로 이 시정개선협의회에서 이토가 했던 발언을 들어보면 그가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 시절에 무슨 생각을 많이 했는지가 드러난다.

한국 폄하했던 이토, 이어받은 일본 극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통감부 문서> 제1권에 수록된 '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1회 회의록'에 따르면, 1906년 3월 13일 오전 10시 45분 한국통감관저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이토 통감은 한국을 아주 형편없는 나라로 묘사했다. 일본이 급부상하기 전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청나라 다음이었던 이 나라를 수준 이하의 집단으로 폄하했다.

참정대신 박제순과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한국 대신 6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이토는 통역을 통해 "나는 한국인의 위치에 서서 말을 하는 것이오"라며 "결코 귀국의 사물을 일부러 험담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오"라고 전제한 뒤 한국의 교육·호적제·징병제·군대·경찰 등이 죄다 문제점 투성이라고 비판했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본적인 제도들이 한결같이 엉터리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그가 대한제국의 공공제도만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자질까지 평가절하했다. 한국인들은 기술력이 부족하므로 공업화를 이룰 수 없다, 한국인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 세금을 조금만 올려도 빼앗긴다는 느낌을 품는다, 한국인들에게는 제도 혁신의 의지가 없다는 등등의 발언을 했다.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들로 한국인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남산 근무 시절에 남긴 발언들은 그가 남산대신궁 찻집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며 시내를 내려다봤을지를 추론케 한다. 한국의 문제점을 침소봉대하고 한국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보일 만한 구실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가 한국을 폄하한 의도는 제1회 시정개선협의회 발언 때 드러났다. 대한제국 경찰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한국 경찰에게 권력을 주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오늘과 같이 멋대로 맡겨둔다면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위험한 경우에 경찰이라는 자가 오늘날과 같이 슬슬 돌아다니다가 방관하거나 한다면 안심하고 인민의 보호를 맡길 수가 없지 않겠소?"

이토는 한국 인민의 보호를 위해 경찰권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을 한 진짜 의도는 그다음 언급에 나타난다. "한국 경찰관을 일본 경찰관으로 보조한다면 쉽게 경찰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희망이 있소"라는 대목이다. 일제 경찰력을 한국에 부식시킬 목적으로 한국 경찰을 폄하했던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남산대신궁 찻집에 앉아 한국을 폄하할 구실을 모색하던 이토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시절 이토의 한국관(觀)은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 극우의 한국관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나 군사 방면에서 이미 크게 성장한 대한민국을 일본 극우들은 하찮게 대하고 싶어 한다. 이 정도 규모의 국가의 국민들이 식민지배 사과·배상을 요구하는데도 코웃음 치며 무시해버리고 있다. 남산대신궁 찻집을 자주 찾으며 공식 석상에서 한국을 폄하했던 이토의 혼이 아베 신조와 일본 극우의 몸에도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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