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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차이 나는 친구와 지난 3월 28일부터 산티아고 순례길 중 제일 길다는 은의길(via de la plata)-스페인 남부 세비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45일에 걸쳐 걸은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22년 3월 28일 까미노 1일차
Sevilla Triana backpackers->Luz del Camino in Guillerna 21.8km 약 6시간 30분.


드디어 길에 섰다. 출발이다. 앞으로 장장 1000여km를 걷게 될 첫날이다. 앞으로 어떤 길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짐작도 안 되는 상태에서 일단은 출발한다. 두렵다고 겁이 난다고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일단 시작을 해보자.
 
아침 7시 40분인데 써머타임제 시작으로 사실은 6시 40분인셈. 아직 해가 드지 않은 새벽.
▲ 까미노 시작 아침 7시 40분인데 써머타임제 시작으로 사실은 6시 40분인셈. 아직 해가 드지 않은 새벽.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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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싸는 법도 메는 법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짐을 큰 배낭에 최대한 넣고 보조배낭엔 간식과 핸드폰 물 등 수시로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그리고 발 상태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바세린을 꼼꼼이 발랐다.그러면 발가락 사이의 마찰을 줄여서 열도 덜 나고 물집 잡히는 것도 예방할 수 있다기에 10개 발가락 사이마다 다 발랐다.

물집 잡혀서 통증을 감수하며 걷는 건 상상하기 싫었다. 양말 신고 깔창이 2겹인 신발을 신으니 폭신하고 편안했다. 호스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8시 좀 못 되어 출발했다. 햇볕에 최대한 노출되지 않게 긴바지, 긴팔, 모자에 머플러까지 두르고 장갑끼고 한 손에 스틱을 쥐고 길을 나선다.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 노란색 화살표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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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부터 써머타임제 시작이라 1시간 빠른 시각이다. 7시 40분인데도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봄이라 하지만 낮의 햇살은 뜨겁고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함이 춥게 느겨지는 때다. 선선함이 춥게 느껴지지는 않는 기분 좋은 날씨다. 길은 평지여서 걷기에 무난했다. 어렵지 않았다. 매일 이런 길은 아니겠지?

노란색 화살표가 보인다. 반갑다. 책이나 블로그에서 봤던 산티아고길의 상징, 노란색 화살표. 그런데 화살표가 이정표처럼 다 잘 보이게 돼 있지는 않다. 가끔은 조그마한 구조물에 칠해져 있어 못 보고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 중간쯤에 화살표가 달려 있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4번째로 긴 강
▲ 과달키비르강 스페인에서 4번째로 긴 강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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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와 트리아나지구를 연결해주는 이사벨2세 다리를 건너 세비야 시내를 벗어난다. 과달키비르강을 강을 따라서 걷는 동안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친다. 길가엔 마치 쑥갓꽃처럼 생긴 꽃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있고 때로는 넓게 펼쳐진 밀밭이 있어 가파도의 청보리밭이라 생각하며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스페인 곳곳에 넓다란 밀밭이 있다
▲ 밀밭 스페인 곳곳에 넓다란 밀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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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길가엔 앉아 쉴 곳이 없다. 그늘도 없다. 나무그늘도 없다.카페는 물론이고 앉을 곳조차 없던 차에 9km쯤 걸었을 무렵 반가운 카페가 나타났다. 'Caffe di Roma' 발도 좀 쉬고 커피도 마시며 숨도 돌릴겸 들어갔다. 나는 솔로 카페라 불리는 에스프레소커피를 주문했다.

1.2유로. 저렴해서 좋다. 그리고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도 찍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알베르게나 바(bar)에서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나도 드디어 순례자 반열에 들어가는건가! 신기했다. 이어서 앙징맞은 에스프레소잔에 나온 커피는 한입거리다. 설탕을 넣어 쌉쌀달콤하게 마셨다.

그리고 배낭속 짐정리를 다시했다. 짐을 잘못 쌌는지 배낭이 높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배낭끈을 풀고 짐을 꺼내 다시 차곡차곡 넣어서 배낭높이를 어깨 높이 정도로 낮췄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땐 고개 돌리기가 훨씬 수월했다.

출발해서 Santiponce라는 마을에 도착했을때 주변에 로마시대 원형극장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걷고 있는 길에서 800여m 이상 떨어져 있다. 친구는 가고 싶어했다. 난 유적지까지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선택과 집중으로 일단 목적지까지 잘 가는 게 나의 목표였기 때문에 힘을 아끼기 위해서 갈 수 없다고 했다.

친구는 나를 걱정해주면서 "혼자 잘 가실 수 있죠?"라고 확인을 한 후 혼자서 빨리 갔다 오겠다고 했다. 난 지도 어플이 켜진 폰을 쥐고 행여 길을 잃어버릴까 봐 수시로 지도를 보며 맞게 가고 있는지 확인을 하며 걸었다.
 
세비야에서 북서쪽으로 9km쯤에 있는 도시, 고대로마의 이탈리아족 정착지
▲ Santiponce 세비야에서 북서쪽으로 9km쯤에 있는 도시, 고대로마의 이탈리아족 정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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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친구는 빨리 왔다. 길을 잘못 들었다며 내 지도 어플로 확인하고 다시 찾아서 갔다 오겠다고 떠났다. 친구는 스페인 유심카드 준비를 못해서 보던 지도가 다운되면 길을 확인할 수 없었다.

혼자 걷는 사이 11시가 넘어 해는 뜨거워지고 지친다. 그늘도 없는 길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는 사이 그녀가 도착했다. 채 1시간도 안 되어 그녀가 따라왔다. 걸음이 나보다 엄청 빨랐다. 극장 입구가 닫혀 있어 밖에서 보기만 하고 왔다고 했다.

둘이 걷는다고 하지만 걸음의 속도가 달라 어차피 혼자 걷게 된다. 걸음이 빠른 그녀는 저만치 앞서가고 나는 뒤처져서 오로지 걷는 데만 집중했다. 나는 중간중간 보조배낭에서 물만 꺼내 마시며 걸었다. 그리고 차분해지려 애썼다. 감정기복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클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걷는 데만 신경썼다. 왼발, 오른발... 한 발 한 발 호흡을 가다듬으며 걸었다.

그렇게 걸은 지 6시간 반만에 Guillena에 도착했다. 공립알베르게는 닫혀 있어 사설알베르게 Luz del Camino로 갔다. 무사히 도착했구나! 첫날치고는 선방했다. 다리도 발바닥도 무릎도 허리도 이상없고 어깨도 아프지 않았다.

샤워하고 빨래를 했다. 햇빛이 좋고 빨래줄이 넉넉해보였다. 텀블러의 샹그리아가 새서 얼룩졌던 보조배낭과 땀에 젖은 속옷, 경량 팽딩까지 빨았더니 내 빨래가 한가득이다. 널고 보니 좀 민망하다. 땀에 절은 몸을 씻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배가 고파졌다.

오후 4시였다. 출발할 때 커피와 토스트 한쪽 그리고 중간에 카페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한 잔 외에는 먹은 게 없다. 하루에 한 끼쯤은 잘 먹고 싶었다. 구글뷰를 보고 'La casa del pueblo'라는 식당에 갔다. 스테이크집이었다. 친구는 지금 먹고 저녁을 건너 뛰면 배고파서 안 된다며 아예 저녁으로 순례자 메뉴를 먹을 거라고 했다.
 
Restaurante La Casa Del Pueblo에서 먹은 스테이크. 가격도 착하고 고기가 연하고 맛있음. 감자위에 얹은 소스도 맛있음.
▲ steak 500g Restaurante La Casa Del Pueblo에서 먹은 스테이크. 가격도 착하고 고기가 연하고 맛있음. 감자위에 얹은 소스도 맛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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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kg에 40유로인데 500g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단다. 21유로란다. 주문해서 맥주와 먹었다. 고기가 연하고 너무 맛있다. 플레이팅도 좋고. 역시 스페인 맥주는 맛있다. 고기가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다. 맥주 1잔을 더 주문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가격이다. 착한 가격에 아주 우아한 저녁식사였다. 

오늘 쓴 돈은 중간에 쉬면서 마신 커피 1.2유로, 알베르게 4인실 조식포함 14유로, 저녁으로 스테이크 21유로, 맥주2잔 3유로이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세비야, #GUILLENA, #ALBER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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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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