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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먼지를 날리며 목포형무소 정문을 통과한 GMC 트럭은 운동장 한가운데에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흰 옷을 입은 한 떼의 무리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극심한 공포를 경험했기에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 이들은 누구랑께?" "함평 사람인갑소." 어제부터 들이닥친 민간인들을 본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이 소곤거렸다. '함평 사람'이라고 한 이는 본인이 함평군 출신이었다.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본 것이다. "아따메. 여가 이미 만원인데, 얼마나 더 때려 부으려는겨?" 1000명을 수용하는 형무소에 1400명이나 수용되었는데, 이틀간 민간인들이 계속 추가로 들어왔다. 

신안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되어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의 추모비(함평군 보도연맹원 1차 학살자)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의 추모비(함평군 보도연맹원 1차 학살자)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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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들어온 이들은 목포, 무안 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었고, 1950년 7월 13일 입감된 이들은 함평군 보도연맹원들이었다. 모두 목포형무소 관할 지역이었다. 해방 이후 전국의 형무소는 수형 시설과 재소자 인권 처우가 엉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까지 입감되니, 형무소 상황은 최악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을 구금할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감방은 이미 만원이어서 목포, 무안, 함평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 내 공장에 구금됐다.

함평군 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 벽돌공장에 구금된 지 한나절만인 밤에 다시 트럭에 태워졌다. 목포, 무안 지역 보도연맹원들도 함께였다. 트럭이 멈춰선 곳은 목포 항구였다. 바다 위에는 전라남도경찰국 경비선 '금강호'가 떠있었다. 총을 든 경찰들이 사방을 경계한 상황에서 흰옷 입은 무리들이 승선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금강호는 신안 앞바다를 향했다. 잠시 후 갑판에서는 피의 제전이 벌어졌다. 죽이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갑판에 있던 흰옷 입은 이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해군기지사령부 군인, CIC 대원, 전남경찰국 소속 경찰의 소행이었다.

동원된 선원과 경찰 들은 2인 1조가 되어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던져진 시신들은 다시는 바다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에 커다란 돌멩이를 매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백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신안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이 죽음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시신이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로 쓸려 갔기 때문이었다.

1950년 7월 13일 야밤에 벌어진 살육에는 함평군 보도연맹원 30여 명이 포함됐다. 이들 30여 명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명단을 파악한 이들로, 실제는 더 많았을 걸로 추측된다.

귓밥에 총을 맞고 살아난 222번
 
함평군 국민보도연맹 총무 노기현
 함평군 국민보도연맹 총무 노기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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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로 수용하는 거니께 순순히 응해라!" 신광`지서 지서장의 명령에 보도연맹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6.25가 터진 지 보름 만인 1950년 7월 11일 "보도연맹원들은 지서로 모이라네"라는 신광면 의용소방대원의 전갈을 받은 전남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의 노기현(1930년생)은 자기 발로 지서로 갔다.

그는 전쟁 전에도 숙부의 좌익 전력 때문에 신광지서에 3~4차례 연행되어 고문을 당해야 했다. 노기현은 한 일도 없이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젊고 똑똑하다'는 이유로 함평군 보도연맹 총무를 맡았다. 전쟁 전 수시로 소집된 모임에서 제식훈련과 반공교육을 받았다. 수백 명이 가입된 '함평군 국민보도연맹' 총무를 맡다 보니 경찰과도 자연스레 안면이 트였다.

신광지서로 가면서 노기현은 '전쟁이 났다더니, 보도연맹원들을 피난시켜 줄란갑네'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너무 순진했다. 지서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그는 다음날 함평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경찰서 유치장도 관내 보도연맹원들로 만원이었다. 함평여중 강당으로 다시 옮겨졌다.

강당에서 보낸 11일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이 매일 나르는 밥이야 그렇다 쳐도 한여름 비좁은 강당에 222명이 구금되어 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대소변은 드럼통을 반을 잘라 해결했다. 진동하는 악취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이곳이 너무 비좁아서 더 안락한 수용소로 여러분을 모시기 위해서 보내드리니 순순히 응해주십시오." 함평경찰서 경찰 간부는 웃음을 띠고 말했다. 

출발 전 인원 점검이 있었다. "하나, 둘, 셋.... 이백 스물 둘!" 노기현이 제일 마지막으로 222번을 외쳤다. 인원 점검이 끝나자 경찰들은 새끼줄로 보도연맹원들을 뒷결박짓고 신발을 벗겼다. 함평읍 소재지에서 술도가를 하는 이를 포함한 지역 유지 3명이 풀려나고 나머지 219명이 트럭 12대에 분승해 함평군 나산면 넙태로 이송되었다.

38식 소총을 휴대한 경찰들이 트럭 네 귀퉁이에 있었기에 보도연맹원들은 숨 한번 크게 쉬지도 못했다. 보도연맹원들은 3명씩 묶였는데, 경찰 3명이 한 명씩 정조준해서 총질을 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노기현은 총소리와 함께 기절했다. 총알 한 방이 귓밥을 스치고 다른 한 방은 쇄골을 관통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219명이 죽은 그날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는 노기현, 정만우, 김정수 3명이었다. 1950년 7월 23일 뙤약볕에서 벌어진 야만의 학살극이었다.

만석꾼 집안의 파산

신안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된 사람 중에는 만석꾼의 자제가 있었다. 바로 함평군 월야면 계림리 금치마을에 사는 안용제(당시 33세)였다. 안용제는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하다가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1950년 7월 11일 함평경찰서에 소집되었다가 7월 13일 신안 앞바다에서 수장 당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안용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안용제의 큰형 안후덕은 19세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갈 결심을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 안경환은 논 500마지기(100,000평=330,000㎡) 땅문서를 손자에게 내밀었다. 안경환은 당시 월야면의 최고 갑부였다. 

하지만 500마지기 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후덕은 "할아버지께 다시 한 번 부탁해 보겠습니다"라며 국내 잠입을 시도했고 신의주에서 체포당했다. 징역 6년을 선고받은 그는 해방 후인 1947년 42세의 나이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렇게 장남 안후덕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6.25 발발 3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갔고, 3남 안용제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신안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4남 안종순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체육교사로 근무하다가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차남 안부덕만이 월야면장을 역임한 후 자연사했다. 만석꾼의 4형제 중 3명이 객사한 것이다. 

차남 안중길의 고단한 삶
     
증언자 안중길(안용제의 아들)
 증언자 안중길(안용제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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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제가 학살되고 그의 부인은 개가했고 자녀 5남매의 삶은 곤궁했다. 할머니가 손주들을 키웠지만 학교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안용제의 차남 안중길(78세)은 열 살 때 금광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13세에는 남의 집 머슴 생활도 했다. 안중길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는데 자신들을 뒷바라지한 할머니를 시골에 홀로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안중길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다가 소장사를 시작했다. 함평, 장성, 영광, 나주, 담양 등지의 우시장을 다니며 30년간 소장사를 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하늘이 그를 시샘했는지 1999년에 병마가 찾아왔다. 돈보다 중요한 건강을 되찾기 위해 장사를 접었다.

그렇게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간 지 60년 만에 아버지의 학살 장소를 알았다.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느 아버지는 함평군에서는 절대 안 죽었다"고 수시로 이야기하곤 했다. 함평군 보도연맹원들의 2차, 3차 학살장소는 함평군 학교면 얼음재와 나산면 구산리 넙태였다. 안중길의 할머니가 두 곳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당신의 아들인 안용제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에서 함평군 보도연맹원들이 1차로 학살된 곳이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로 드러났다. 신안군 앞바다를 찾아간 안중길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수십 번 불렀다.

태그:#신안군, #독립운동가, #한국전쟁 , #국민보도연맹원,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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