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6 19:34최종 업데이트 22.07.1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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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기각이라구요? 국가인권위의 결정을 통보 받고 배성규는 난감했다. 보이스피싱이 극성을 부리자 2015년경부터 시중은행은 보안을 강화하겠다고 '자동응답시스템(ARS) 인증'을 도입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정책이지만 청각장애인은 온라인거래를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배성규는 자신처럼 청각장애를 지닌 후배가 바뀐 제도로 애로를 겪고, 도움을 청해오면서 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국가인권위의 민원 게시판을 먼저 두드렸다. 'ARS인증' 제도에 음성만이 아니라 '보이는 ARS'도 도입해야 한다고 청원을 넣었다. 뜻밖에도 인권위는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냐? 그리고 편의 제공을 위해 비용이 크게 들 경우는 거부할 수도 있다"고 답변을 보내왔다.

배성규는 실망했지만 다시 금융감독원을 찾았다. 금감원은 인권위와 달리 'ARS인증'이 차별임을 인정하고 시중은행에 '보이는 ARS'를 권고하겠다고 밝혔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권고이니 실제 변화는 없었다. 배성규는 그때부터 후배와 함께 다른 나라의 사례를 조사했다. 또 청각장애인을 위해 문자통역 지원을 하는 협동조합 AUD(Auditory Universal Design)에서 강연도 하며 관심과 지원을 호소했다. 덕분에 '보이는 ARS'가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고 기술적으로도 어렵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배성규의 모습 그의 집 앞 카페에서 ⓒ 민병래


한국소비자원이 물꼬를 터주다

배성규는 확보한 자료를 가지고 국민신문고와 한국소비자원에도 진정을 넣었다. 물꼬는 '보호원'에서 터졌다. 담당 조사관은 배성규에게 저녁 시간에 자기 사무실 근처 커피숍에서 볼 수 있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왜 공식 업무를 회사 밖에서 근무시간 외에 다루려 할까 궁금했는데 만나자마자 의문은 풀렸다. 조사관은 자신의 부모님이 청각장애를 안고 있어, 그 어려움을 잘 안다며 함께 풀어보자고 했다.


금감원의 권고에 보호원의 행정명령 그리고 '장애인 차별금지법(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의 힘까지 더해져 '보이는 ARS'는 이제 모든 시중은행에서 시행되고 있다. 지금이야 안면인식이나 생체인식 등 인증수단이 다양하지만 그때는 청각장애인에게 '보이는 ARS'는 절실한 문제였다. "귀머거리가 은행창구에나 갈 것이지..."하는 비아냥을 이겨내며 배성규가 들어 올린 작은 횃불이었다.

1980년 대구에서 태어난 배성규는 신생아 시절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에 머리뼈를 열고 뇌의 염증을 없애는 수술을 했다. 이때 고막부터 달팽이관까지 기능에 손상이 생겨 듣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 엄마 손에 이끌려 간 곳이 대구대학교 언어치료센터! 들을 수 없으면 말문이 트일 수 없기에 성대, 목젖, 혀, 이, 입술을 움직이는 훈련을 했다.

탁구공을 떨어뜨리고 땅에 닿을 때 '통'이라고 말하기(발성 훈련), 입 모양을 보고 낱말카드 짚기(독순 훈련), 인중 부분에 설탕을 바른 후 혀를 내밀어 핥기(발음 훈련) 등을 했다. 제일 싫은 건 모형 전화기를 들고 뒤로 돌아선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배성규는 그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려 엄마를 찾곤 했다.

청각장애인에게 무인정산기는 기계 덩어리일 뿐

배성규는 ARS 문제만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청각장애가 겪게 되는 여러 문제에 맞서나갔다. 언젠가 '북서울꿈의숲'으로 놀러 갔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배성규는 딸들과 그 무렵 막 보급되기 시작한 주차요금 사전정산기 앞으로 갔다. 장애인 주차요금 감면을 받으려면 호출버튼을 누르라고 쓰여있었다.

눌러보니 문자 안내는 없고 기계음이 나는 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눌렀지만 마찬가지였고 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몇몇 사람이 뒤에 늘어서서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딸들은 "아빠, 왜 그래? 안 들려?"하고 묻는 것 같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딸들은 재잘거리지 않았고 큰딸은 질문을 몇 번이나 삼키는 모양새였다.

다음 날, 그는 '북서울꿈의 숲'으로 찾아가 정산기를 손쉽게 사용하도록 문자안내서비스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원 측에서 시정을 약속한 기간이 지난 후, 정산기를 찾아가 보니, '어울림웹'이라고 호출을 하면 외부의 수어통역사와 연결을 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문제는 평일 4시 반 이후와 주말은 안 된다는 것! 공원을 가족과 주말에 제일 많이 이용하는데 정작 필요한 시간에 안된다니...

그는 재차 문제를 제기했다. 공원 측에서는 "그러면 출차 시에 호출 버튼을 누르고 두 번 두드리면 당신인 줄 알고 차단기를 올려주겠다. 주차비를 안 받을 테니 그냥 나가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배성규는 그런 편법을 원하는 게 아니니 청각장애인이 차별 없이 사용할 수 있게 개선하라고 다시금 요구했다.
 

북서울 꿈의 숲, 주차요금사전정산기에 표시된 청각장애인에 대한 안내문구 어울림앱은 주중에 오후 4시반까지만 사용할 수 있는데 이마저도 잘 연결되지 않는다 ⓒ 민병래


사실, 배성규는 일반학교를 다녔던 학창시절 내내 청각장애를 받아들이고 그저 순응하며 살아왔다. 그가 변한 건 대구대학교 중등 특수교육과에 들어가서였다. 지금도 그는 학생처장과 그의 입모양을 보면서 나눈 대화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할 얘기가 뭔가?"
"처장님, 청각장애 학생이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방안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노트북을 대여해주고 필기도우미의 봉사를 학점으로 인정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청각장애 아닌 학생들이 외려 차별받는다고 얘기하지 않을까?"
"특수교육과를 운영하는 대학에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능력을 발휘하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난 처음 들어보는 얘기네 "


배성규와 학생처장의 얘기는 맴맴 맴돌았다. 대구대학교를 들어오기 전, 일반학교 시절도 그랬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한글 받아쓰기를 하면 그는 선생님 얼굴만 말똥말똥 쳐다봤다. 중고생 시절의 영어 듣기 시간, 그는 낙서와 그림만 끄적거렸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처장실의 차가운 유리문을 뒤로 하고 나왔을 때 해결된 건 없었지만 배성규는 복도를 마구 달렸다. 생전 처음 아닌가? 눈을 부릅뜨고 탁자까지 내리칠 정도로 자기 목소리를 내본 것이. 그래 받아들일 때까지 부딪히자. 그는 대학본부를 나와서 교수실로 뛰어갔다. 모든 교수에게 호소할 작정이었다. (그의 문제제기 덕분인지, 지금 대구대에선 청각장애인학생에게 토익 대체 이수학점제도는 물론, 전문속기사를 통해 문자통역을 해주고 있다.)

애화학교에서 시작한 특수교사의 삶

99학번인 그는 대구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청각 장애인의 심리와 정체성'을 연구하러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때 청각장애 전문학교인 서울애화학교에서 기간제 교사 한 명이 필요한데 와줄 수 있냐고 제안을 해 왔다. 대학원 교수는 '현장을 알아야 연구도 잘한다'며 가길 권하고 집에서도 기회를 반겼다.

배성규는 서울애화학교에서 처음으로 교단에 섰다. 그는 사립 애화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에게 등불이었다. 모두 배성규처럼 될 수 있다면 하고 말했다. 애화학교는 교과의 장벽, 학년별 차이를 허물면서 수업했다. 가령 '봄'을 연구주제로 하면 국어 시간에는 봄을 노래한 시를 공부했다. 과학 시간에는 봄에 불어오는 황사의 원인을 다뤘다. 미술 시간에는 생강나무꽃과 산수유를 그리고 그 빛깔을 음미했다. 매일 매일이 연구수업이고 통합교과수업이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

배성규는 애화학교에 재직할 때 서울교육청의 특별채용시험에도 합격해 공립학교의 교사 자격을 얻었다. 그 후 발달장애인이 다니는 공립 정인학교, 중증지체장애인이 다니는 공립 정민학교까지 20여 년을 특수교사로 살아왔다. 
 

배성규가 스스로 찍은 사진 삼양도 집 앞에서 찍었다. ⓒ 배성규 제공


청각장애를 지닌 그가 교사생활을 하는 데 장벽은 높았다. 독순술을 익히고 청인처럼 말을 할 수 있지만 애로는 많았다. 우선 업무나 상담은 전화로 이뤄지는데 그에겐 먹통 기계였을 뿐이다. 부장교사로서 교무회의에 참석하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먼 거리나 옆에 나란히 앉아 발언하는 사람의 입 모양은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서울 하계동 정민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교육정보부장' 보직을 맡고 있어 해마다 '개인정보'에 관한 직무연수에 참석했다. 강화된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하면 위반 시 최대 2천만 원 이하의 벌금과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니 중요한 교육이었다. 하지만 강사가 마이크를 들고 때로는 자료화면을 보고 얘기하니 그의 입 모양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연수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배성규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가슴에는 축축한 빗물만 고였다.

코로나를 겪는 지난 2년 동안 배성규의 어려움은 더욱 컸다.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 아예 소통을 할 수 없었다. 배성규에게 절실한 건 '문자통역' 지원이다. 그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꼭 필요한 편의제공이다. 지난 20년 동안 그는 학교현장에서 단 한 차례도 수어통역이나 문자통역을 받지 못했다. 교육청에서 예산을 세워줘야 하건만 돈이 없다는 타령만 돌아왔다. 전문속기사를 쓰는 '문자통역'이 보통 시간당 7만 원의 비용이 든다. 배성규가 문자통역을 요구하는 수준은 교무회의 등을 포함 일주일에 2시간 안팎 정도다. 직무연수 같은 특별한 행사를 감안해도 배성규에게 필요한 문자통역시간은 연간 100시간이 채 안 된다.

서울시교육청은 작년에 시내 모든 학급의 칠판을 2024년까지 개당 1000만원 하는 전자칠판으로 교체하겠다고 밝혔다. 총 2363억의 예산을 쓸 작정이다. 학교현장에서는 '굳이 전자칠판을?'하며 갸우뚱했지만 교육청은 밀어붙이고 있다. 2022년 서울시교육청의 일 년 예산이 무려 10조에 이르는 사정까지 감안하면 배성규와 청각장애 교사들이 요구하는 예산은 정말 미미한 수준이다.

장애인교원노동조합의 수석부위원장이 되어

배성규는 장애인교원에 대한 학교현장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이인호, 김헌용 등과 힘을 모아 2019년 '함께 하는 장애인교원노동조합'(아래 장교조)을 만들었다. 장교조는 교육부와 유은혜 장관 시절인 2020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20회차를 넘기며 교섭을 벌였다. 장애인교원에 대한 지원인력배치, 학교 내 평등한 인사처우 등 주요 제도적 사항에 대한 의견 접근이 이루어져 조인식을 앞두고 있다.
  

유은혜 전 교육부장관과 장교조 초대 이인호위원장 장교조와 교육부는 조인식을 앞두고 있다. ⓒ 배성규제공


한편, 지역별 교육청과도 실무협의사항이 많다. 시각장애인교사가 에듀파인(국가관리회계시스템)에 자유롭게 접속하고, 디지털교과서를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게 하며, 문자통역을 실시하고 학교 내 장애물 없는 환경조성을 하게 하는 등 현안이 많다. 장교조는 서울교육청과의 협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다른 지역 교육청까지 파급효과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장교조의 수석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배성규는 이 교섭과정을 주도하고 조합원의 의지를 모아냈다. 현재 장교조에는 약 150명의 조합원이 있다. 장애유형도 다르고 정도도 다르니 융합과 배려가 중요한 문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역 역사회의실에서 토론을 마치고 배성규는 다섯 명의 시각장애인교사와 잡담을 하던 중에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서야 시각장애인 동료들은 배성규가 대화에서 소외돼 사라진 것을 알았다. 한동안 장교조에선 이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시각장애인 유기사건·청각장애인 왕따사건'이라 불렀다.

배성규는 이 일 이후, 장교조 조합원 내에서 이해와 배려의 문화를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어떤 장애가 더 어렵다는 얘기를 하기보다 서로의 장애를 깊게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의 고민이 담겨 탄생한 장교조의 철학이 '편견의 비움, 희망의 채움'이다. 매해 창립기념식마다 그 해의 슬로건을 발표하는데 2021년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선 '함께 보다, 말하다, 걷다'를 채택했다. 2022년의 슬로건은 7월 23일 3차 창립기념식에서 결정할 예정이다.

배성규는 언젠가 시각장애인 선생님과 함께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영화 감상 후 서로의 빈 구석을 채워주었다. 배성규는 영상 이미지와 배우들의 입놀림을 보며 줄거리를 이해했지만 놓친 부분이 있었다. 독일기자 힌츠페터와 택시운전사 송강호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깜깜한 밤이고 등을 대고 있는 장면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영화가 끝난 후 그는 시각장애인 선생님에게 그때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시각장애인 선생님은 설명을 해 주고 "총소리와 함성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는데 그게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배성규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면서 풍성한 영화평을 나눴다. 배성규는 그때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한국 영화를 보고, 제한된 감각으로부터 얻었던 느낌을 보완해 색다른 감상문을 써보자고 제안했다.

20년차 특수교사, 청각장애를 지닌 배성규가 그리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들리지 않는 자는 들리는 자의 귀를 빌리고, 보이지 않는 자는 보이는 자의 눈에 의지하고, 몸이 불편한 자는 몸이 괜찮은 자의 어깨에 기대는 연대와 동행! 바로 이것이다.

<못다 한이야기>
배성규 선생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그의 블로그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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