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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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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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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는 어렸을 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다. 언제나 잘 시간이 되면 내 옆에 누워 이야기를 졸랐다. 이야기의 종류는 다양했다. 나 어렸을 적 살았던 시골 이야기, 어디 책에서 읽은 자투리 이야기, 심지어 군대 이야기까지.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모두 열광했다.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내 이야기 창고는 금방 바닥이 드러났고 나는 매일 머리를 쥐어짜며 창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영특한 딸아이는 오늘 한 이야기가 전에도 했던 것이며, 때로 몇 가지 이야기는 짜깁기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그래도 매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손뼉을 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들었다. 심지어 내 말솜씨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는데도, 신기한 마술이라도 구경하듯이 이야기마다 열중했다.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노래 경연대회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 참가자가 더 주목을 받고는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소설에 비유하는 것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본능에서 비롯한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소설은 가장 공을 들여 만든 정교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단순히 이야기만 담고 있지 않다. 작가가 소설에 자신의 삶을 녹여내면서 동시대 사회의 역사, 사건, 문화, 생각을 모두 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아주 풍성하고 생생하다. 역사학자나 사회학자가 연구한 몇 백 년 전 사회의 모습보다, 당대 소설가들이 묘사한 사회의 모습이 더 생생할 때도 있는 이유다. 소설은 문학 장르로 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를 품는다.

이렇게 재미난 소설에 '나이 오십'이라는 경륜이 더해지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서사가 태어난다. 우리는 누구나 소설 같은 생애를 살아오지 않았는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라는 소설의 눈으로 청년 시절 읽었던 소설을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내가 쓰고 최근 출간된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책이 그렇다(갈매나무 출판사).

오십이라는 나이는 과거 급하게 삼켰던 청춘의 독서를 되새김질하기에 좋은 시절이다. 새로운 소설을 만나는 것도 즐겁지만, 빛바래고 홑이불처럼 사각거리는 옛 책을 꺼내놓고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설렘과 감동을 추억하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줄거리를 따라가기 급급해 미처 살피지 못한 소설에 얽힌 뒷이야기, 배경을 파헤치고 찾아보는 것은 또 얼마나 즐거운가.

그러고 보면 소설은 당대의 사회문화의 특징적인 요소가 총집결된 결정체가 아닌가. 소설은 단순히 줄거리로만 이해하고 읽기엔 아깝다. 좋아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입은 옷과 가방이 어느 회사 제품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는 것처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이 어떤 배경을 통해서 탄생했는지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죄와 벌>로 읽는 러시아 사회상, <춘향전>서 엿보는 신분제 반발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갈매나무 출판사).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갈매나무 출판사).
ⓒ 갈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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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예로 들어본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로쟈의 범죄와 처형이라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와 인간의 심리를 다룬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과거 러시아제국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주인공의 하숙집, 거리, 다리 등은 오늘날도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주인공 로쟈를 추적하는 예비 판사의 수사 기법은 오늘날 경찰에게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그뿐인가, 마치 소설가 자신이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책 속 살인자의 심리묘사는 생생하고 뛰어나게 진행된다.

국민 소설인 <춘향전>도 읽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춘향전>에는 춘향과 이 도령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공고한 신분제도에 반발하는 민중의 분노가 담겨 있고, 벼슬아치의 비겁한 행태도 지금 눈앞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히 느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추리를 해가며 읽어야 하는 탄탄한 전개도 재미나지만, 작가가 즐긴 음악과 책이 끝도 없이 등장하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글 속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 보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주는 즐거움에는 텍스트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루키가 영위했던 낭만의 시대를 공유한다.

소설은 이렇듯 이야기를 누리는 즐거움과 함께 역사, 사회, 법, 종교,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문화를 읽는 즐거움도 누리게 해준다. 좋은 소설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뛰어난 인문학 서적 여러 권을 읽는 것과 같다. 나는 이런 경험을 '소설 인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이야기를 접하는 즐거움이 '소설 인문학'이다. 인문학도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 책에 등장하는 20권의 소설에는 당대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생생하게 녹아 있다. 사람 사는 이야기들과 함께라서, 과거엔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한 인문학 책들도 다시금 더 쉽게 재밌게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즐거움을 이제 독자들과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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