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8 10:06최종 업데이트 22.07.1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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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 모호필름

 
'난 또 대중이 아니야?'

영화 <헤어질 결심>을 둘러싼 상황을 보며 든 생각이다. 우선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부연하자면 난 이 영화를 무척 사랑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저녁 소주 두 병을 비웠을 정도로 그렇다(보통 영화가 주는 감흥이 감당이 안 될 정도면 술을 마신다).

원고료가 없으면 글을 안 쓸 정도로 게으른데 이 영화에 대한 메모는 자발적으로 두 개나 남겼다. 한동안 아침에 눈을 뜨면 정훈희의 안개를 찾아 틀었고 잠에 들기 전에도 같은 노래를 들었다. 이런 식으로 <헤어질 결심> 앓이를 하는 간증이 소셜 미디어에 넘쳐나는데 그에 비하면 영화의 흥행은 조금 아쉬운 느낌이다. 이전의 박찬욱 영화들이 못해도 200만이 넘는 관객들을 모았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화려하고 현란한 블록버스터 사이에서 치밀하고 잔잔한 로맨스 영화는 주목을 받기 어려운 운명이었을까. 모래사장이 점점 밀물에 잠식되어 가듯 영화의 상영관이 줄어드는 것도 무척 안타깝다(다행히 한쪽에서는 반복 관람 인증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분석은 다양했다. 왜 <헤어질 결심>의 흥행은 기대와 달랐을까. 누군가는 이전에 비해 비싸진 영화표 가격을 지목했다. 많은 돈을 들이는 만큼 사람들이 확실한 볼거리를 보장하는 영화, 즉 블록버스터 영화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여름 영화 시장 자체가 로맨스 영화에 불리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전부터 여름은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각축장이었고 배급사들은 그 해의 텐트폴 영화(흥행이 확실할 것으로 예상되는 큰 자본이 들어간 영화)를 모두 이 시기에 내보냈다. 그런가하면 <헤어질 결심> 자체가 그리 대중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나는 박찬욱 감독을 정말 사랑하지만 '대중성'에 대한 그의 감각이 조금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만들어온 자신의 모든 작품이 대중적이라고 주장했는데, 행여 박 감독이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해 읽다 상처를 받을까 차마 코멘트하지는 못하겠다.

불륜 미화가 영화가 싫은 이유?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 모호필름


사랑하는 영화가 부진해서 슬프다는 이야기만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헤어질 결심>에 대한 반응 중 너무 이상한 게 있었는데 바로 이 작품이 불륜을 미화해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농담처럼 웃어넘겼는데 심지어 기사로도 나온 걸 보면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래봐야 불륜'이라는 식의 문장을 보면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이 불륜을 다룬 작품에 그렇게 야박했나? 지금도 TV를 틀면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차고 넘치고 이들이 욕을 먹을지언정 그중에는 시청률이 높은 작품도 있다.

세기의 로맨스로 추앙받는 <타이타닉>과 같은 작품을 생각해보자. 대형 유람선이 침몰해도 로즈와 잭의 관계가 사람들이 말하는 '불륜'에 속하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그쪽은 결혼이 아니라 약혼이어서 괜찮았던 걸까.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불륜'의 기준으로 서래와 해준의 관계를 살피자면 사실 이들의 관계는 그리 극한으로 가지도 않는다(하지만 그 기준을 벗고 보면 <헤어질 결심>의 로맨스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서래와 해준은 아주 깊이 감정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해봐야 비 오는 날 산사에서 데이트를 하며 즐거워 한 게 다다. 이 영화는 사랑으로 충만하지만 두 주인공의 관계는 전형적인 '애정 관계'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어떤 관객들은 이 작품의 '불륜'에 더욱 볼멘소리를 냈을까. 사실 문제는 서래와 해준의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 사람의 주변이 더 문제였을 것이다. 

<헤어질 결심>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가령 <헤어질 결심>에는 파탄이 나기 전에는 행복했던 부부 관계, 상대방의 바람 이후에도 결혼을 지키려 노력하며 꿋꿋하게 제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배우자 같은 건 등장하지 않는다. 서래의 첫 남편인 기도수는 서래를 학대했고 두 번째 남편인 임호신은 서래를 이용했다.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정안과 해준의 관계도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두 사람의 집처럼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영화 내내 서래와 해준이 밀물과 썰물처럼 감정적 파고를 주고받는 동안 앞의 세 관계들은 먼지처럼 박살이 난다. 가장 난감했던 건 영화의 유일한 베드신인 정안과 해준의 정사 장면이었는데 관계 도중 해준은 수사(라고 하지만 사실상 서래)를 생각하느라 넋이 나가 있고 이런 해준의 모습을 정안은 별일 아닌 듯이 넘긴다. 그리고는 아무리 서로 미워도 건강과 사랑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하자고 제안한다.

솔직히 내가 아무리 섹스에 대한 환상이 깨진 지 오래라지만 저건 성관계를 이야기하는 말투처럼 들리지 않는다. 차라리 필라테스를 등록하는 사람에 가깝지(참고로 나는 이 장면을 어쩌다 커플 전용 상영관에서 봤는데 빙하기와 같은 그 순간의 분위기는 결코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즉 <헤어질 결심>에는 이성애 결혼 관계가 익숙하고 여기서 벗어나는 게 불안한 관객들을 안심시킬 요소가 없다. 이 작품에서 결혼제도 안에 안착한 관계들은 이미 문제가 있거나 단조로운데 오히려 거기서 벗어난 서래와 해준의 관계는 강렬하고 드라마틱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해피엔딩을 맞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결말로 향하는 동력조차 서래와 해준의 캐릭터 자체에서 생성된다. 서래의 결심은 오직 서래이기에 가능한 것인데 이 또한 전형성에서 엇나가는 부분이다.

가령 불륜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그럼에도 결혼이 충만한 것임을 드러내는 요소들이 등장하는데, 불륜을 감행한 인물들은 이러한 것들을 잃거나 그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보금자리가 될 안정적인 가정, 자신에게 충실한 배우자, 자신의 결혼 생활을 지지하고 부러워했던 주변 인물 등등.

보통 불륜을 다룬 작품에서 주인공이 추락한다면 이 때문인데, 이건 이성애 결혼제도에서 이탈한 대가로 가해지는 일종의 처벌이다. 그리고 이 처벌이 있어야 그 제도에 발붙인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에게는 애초에 그 불안을 해소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불안을 이기고 아름다움을 즐기자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 모호필름


결론적으로 문제는 불륜이 아니라 소외감이었을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심지어 예정된 과정이며 관계의 완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결혼 관계를 불안하거나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그리는 영화를 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증거를 갈구하는 것은 애초에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냐면 애초에 '내 결혼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어야 사람들은 행복하고 열정적인 결혼 관계를 보길 바란다는 의미다. 이건 사람들이 캐릭터의 죽음을 회피하고 끝나지 않을 해피엔딩 앞에서 만족을 느끼는 원리와 같다. 하지만 나를 안심시키는 것만 보고 듣는 게 괜찮은 일일까.

나에게는 이성애 결혼 관계에 대한 사악한 농담이 수십 가지가 있다(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혼인에서 애초에 밀려났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하지만 주변에 점점 결혼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나도 나이를 조금씩 먹으며 이성 간 결혼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내가 차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내 것이 아닌 관계와 삶을 마구 놀려먹어도 괜찮은 걸까. 일단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렇기에 <헤어질 결심>을 보고 소외감을 느낀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차피 1년 365일 평생이 낭만과 애정으로 가득한 관계란 없다. 여러분의 결혼은 때로 해준과 정안의 것과 같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순간도 훨씬 많을 것이다. 불륜보다 더 행복한 결혼을 본다고 더욱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불안과 편견을 내려놓고 영화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그런 이유로 놓치기에 <헤어질 결심>은 너무나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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