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6 10:19최종 업데이트 22.07.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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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상 최초'를 섭렵한 김응용 감독 1963년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팀 4번 타자로서 한국 야구 역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을 경험한 김응용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서 한국 야구 역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 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 획득을 이끌었다. ⓒ 대한뉴스


한국 야구는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와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한국 야구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선 그 두 대회는 모두 아마추어 야구의 독보적인 세계 최강팀으로 평가받는 쿠바가 참가하지 않은 대회였고, 아마추어 야구보다 한 단계 높은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이 출전할 수 없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프로야구에서는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위상이 절대적인 가운데 상당한 격차를 두고 일본 프로야구리그(NPB)가 그 뒤를 잇는 것으로 평가되며, 한국 프로야구리그(KBO)는 또다시 상당한 격차를 가진 그다음의 단계로 인정되어왔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리그의 역사와 자본의 규모, 소비 집단의 규모, 그리고 선수 충원구조의 규모 차이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리그의 수준이고, 국가를 단위로 순위를 매겨본다면 미국과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워서 메이저리그의 선수 공급원 역할을 해온 카리브해 연안과 중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한국보다 훨씬 강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프로야구는 꾸준한 투자로 리그를 확대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해외 야구와 소통하며 리그 간 수준의 격차를 줄여왔다. 그런 발전 과정을 가시적으로 대중에게 확인시킨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에 거둔 국제대회 성과들이었다.

눈으로 확인한 한국 야구의 성장
   
한국야구대표팀은 야구가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98년 이후 2018년까지 모두 6번의 대회에서 5번의 금메달과 1번의 동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 대만을 제외하면 우승에 도전할 만한 야구 인프라를 가진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시안게임 역시 그 세 나라의 경쟁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메달은 확보된 대회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아시안게임은 대부분의 경우 일본이 프로 선수들을 파견하지 않거나 파견하더라도 간판급 선수들을 보내지는 않는 대회이고 대만은 프로와 아마추어 모두 한국보다 낮은 수준으로 평가받아왔다.

결국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미필자 중심의 최강팀을 파견하게 되는, 그래서 일본과는 사뭇 다른 사정을 가진 한국 야구팀의 반복된 우승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받는 이상의 의미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오히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때는 최정상급 선수들로 구성한 한국 대표팀이 대만팀과 사회인 선수들로 구성된 일본팀에 패배하고 동메달에 그치자 '참사'라는 표현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 정도였다.
 

2006년 12월 6일 도하 알 라이얀 야구장에서 열린 2006 도하 아시안게임 야구 한국-중국전에서 한국이 7회 12-2 콜드게임으로 승리하며 동메달을 획득한 뒤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올림픽 역시 자타공인 세계 최고 선수들인 미국 메이저리거들이 출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야구에 있어서 만큼은 다른 종목과 달리 세계 최고 무대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일본이 정상급 프로 선수들을 파견한다는 점과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국내 프로야구리그가 없고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도 억제하는 독특한 환경의 아마추어 야구 최강국 쿠바가 출전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대회들과 다르다.

전통적으로 올림픽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한국은 야구가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치러진 1984년과 1988년에 대학생과 실업 선수들이 주축이긴 했지만 한 해 전에 대학을 졸업한 간판급 선수들의 프로팀 입단을 1년간 유보시키면서까지 보강한 대표팀을 출전시켰음에도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치러진 1992년과 1996년에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거나 본선 최하위에 머물며 국내 팬들을 실망시켰다. 프로야구 주력선수 중심으로 대표팀을 구성하고 당대 최고의 명장 김응용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대한 한국 야구팬들의 기대는 그런 점에서 각별했다.

다시 한번 지켜진 '8회의 약속'

출발은 불안했다. 예선 리그에서 이탈리아와의 첫 경기를 가볍게 승리했지만, 호주, 쿠바, 미국과의 2, 3, 4회전을 모두 패해 1승 3패로 탈락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호주전과 쿠바전에 투입한 선발투수 정민태와 김수경이 뜻밖에 부진했고, 미국전에서는 선발로 나선 대학생 정대현이 7이닝 무실점으로 잘 버텼음에도 뒤를 이은 프로의 베테랑 송진우와 진필중이 기대와 달리 무너졌다.

하지만 하루를 쉰 뒤 9월 22일 네덜란드와의 5회전을 구대성과 함께 가장 좋은 활약을 한 투수 박석진의 수훈으로 잡아내며 반등했고, 일본과의 6회전에서 난타전에도 불구하고 9회 말 이병규의 호수비로 위기를 넘긴 뒤 연장 10회 말 홍성흔의 안타와 정수근의 희생플라이로 점수를 뽑아내 승리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 이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8회 콜드로 간단히 잡아내며 8팀 중 3위로 결선라운드에 진출해 미국과 결승 진출을 다투게 됐다.

사실 그 대회에서 한국은 결승에 진출할 능력이 있었고, 충분히 우승에 도전할 자격이 있었다. 준결승에는 경희대의 언더핸드 정대현이, 비록 메이저리거는 아니지만 마이너리그 최고 유망주들을 모아 출전한 미국을 상대로 선발 등판했다. 훗날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이나 20승을 기록하게 되는 에이스 로이 오스왈트와 팽팽한 맞대결을 벌이며 6.1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는 사이에 정수근의 희생타와 이병규의 2루타를 묶어 2점을 뽑아내며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7회 말 미국의 킨케이드가 1루와 3루에서 두 번이나 명백한 아웃이 세이프로 판정되는 결정적인 오심 덕에 살아남아 후속 타자의 희생 플라이 때 홈을 밟으며 동점을 만든 것이 화근이 됐다.

8회 말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2시간가량 중단됐던 경기는 자정을 넘겨서야 재개되었고, 이미 7회부터 마운드를 지키고 있던 한국의 세 번째 투수 박석진이 9회 말 1사 후에 만난 미네소타 트윈스 트리플A팀의 덕 민케이비츠에게 초구 끝내기 홈런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예선 라운드에서도 바뀐 투수 진필중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날려 한국팀에 1패를 안겼던 덕 민케이비츠는 뼈아픈 홈런과 특이한 이름 덕에 한국인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는데, 그 해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승격해 이듬해인 2001년 아메리칸리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5년 뒤에는 구대성과 뉴욕 메츠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는데, 구대성이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때린 뒤 호세 레예스의 보내기 번트에 홈까지 파고드는 놀라운 주루플레이를 했을 때 가장 기뻐하며 곁으로 달려와 수건으로 부채질을 해주기도 했다.

미국 킬러 정대현, 한국 킬러 덕 민케이비츠
 

일본 킬러 구대성 한양대 시절부터 일본 킬러로 이름을 떨쳤던 구대성은 뒤를 받쳐줄 투수가 남지 않은 벼랑 끝에서 9회까지 홀로 버텼고, 155구를 던져 5안타와 1점만을 허용하며 한국야구의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지켜냈다. ⓒ MBC


한국팀은 아쉽게 밀려나게 됐지만, 쿠바와의 준결승에서 패배한 일본을 만나게 되면서 그 해의 3~4위전은 결승전 못지않은 치열한 승부로 달아오르게 됐다. 일본과의 3~4위전이 벌어진 2000년 9월 27일 낮 12시 30분. 전날 시작해 수중전을 벌이고도 자정을 넘겨서야 결판이 난 미국과의 준결승전을 마친 지 11시간 30분 만이었다.

꼭 18년 전 9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최종전에서 전날부터 이어진 1박 2일간의 호주전을 간신히 마친 당일 저녁에 다시 일본과의 결전을 벌였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격전을 치른 여파로 쓸 수 있는 투수가 남아있지 않아 선발투수만 바라봐야 하는 사정도 그때와 비슷했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18년 전에는 호주와의 난전을 간신히 승리로 마무리하며 정신적인 피로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미국과의 중요한 승부를 오심 때문에 날린 억울함으로 많은 선수들이 밤을 새웠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선발투수는 고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투혼과 체력으로 '괴물'이라는 별명의 첫 주인이 된 마쓰자카 다이스케, 훗날 일본 프로야구와 미국 메이저리그를 오가며 최고의 투수로 활약했던 바로 그 투수였다.

그에 맞선 한국의 선발투수는 한양대 시절부터 일본팀 킬러로 이름을 날렸던 한화 이글스의 불패 마무리 구대성이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결승전, 혹은 한일전으로 치러질지도 모를 3~4위전을 위해 준결승에 쓰지 않고 아껴둔 실질적인 에이스를 내세운 결전이었다.

기술과 체력과 의지와 책임감, 모든 면에서 두 나라를 대표할 만했던 두 투수는 흠잡을 데 없는 팽팽한 투수전을 이어갔고, 두 팀은 7회까지 나란히 무실점 행진을 벌였다. 구위는 마쓰자카가 미세하게나마 앞선 듯 보였지만 구대성은 노련한 위기관리 능력 면에서 좀 더 높은 곳에 있었고, 그 날 현대 유니콘스에서도 손발을 맞춰온 박종호와 박진만 키스톤 콤비의 끈적끈적한 수비망이 더해지면서 경기의 균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균형이 깨진 것은 1982년에 시작된 승리의 주술, '약속의 8회'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시드니 올림픽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앞선 타석까지 3연속 삼진을 당했던 이승엽은 8회에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때려내며 승부의 추를 끌어내렸다. ⓒ MBC

  
선두타자 박진만의 내야안타와 정수근의 스리번트 감행 성공으로 이어진 1사 2루의 기회. 후속 이병규의 강습타구는 2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갔지만, 1루 송구가 빗나가며 1루와 3루 주자가 모두 살아남는 행운이 이어졌다. 그리고 박종호가 포수 파울플라이로 물러나며 찬물을 끼얹는 듯했지만, 그날 3연속 삼진을 당했던 이승엽이 가운데 몰린 마쓰자카의 공을 가볍게 밀어쳐 외야의 좌중간을 가르며 두 명의 주자를 모두 불러들였고, 뒤를 이어 김동주의 쐐기 적시타로 이승엽마저 불러들이며 3점을 채웠다. 
   
반면 구대성은 9회 초 1사 후에 마쓰나카와 다나카에게 연속안타를 내주며 1점을 내주었지만, 대타로 나선 히로세와 아베를 삼진과 땅볼로 잡아내며 승리를 지켜냈다. 혼자 9회까지 완투하며 155개의 공을 던져 5개의 안타만을 내주고 11개의 삼진을 잡아낸 완벽한 투구였다.

그날의 승리로 한국 야구는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고, 다시 한번 일본과의 진검승부에서 승리했다. 특히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결선리그와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최종전에서의 승리가 아마추어 대표팀 사이의 대결에서 얻은 것이었다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두 나라가 프로야구 최정예 전력을 집중시켜 가린 승부였다는 점에서 훨씬 큰 의미를 가지는 승리였다. 그래서 일본 야구가 진지하게 한국 야구를 라이벌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 역시 바로 그때였다.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이라고 하지만, 눈으로 확인되는 결과만큼 과정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없다. 그래서 결과 역시 하나의 과정이며, 과정 중에서도 중요한 하나의 마디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은 꾸준히 성장했지만 누구도 충분히 느끼지 못했던 한국 야구의 수준을 스스로 확인하게 했고, 깊었던 침체기를 딛고 반등하는 힘이 됐다. 21세기를 맞이한 한국 야구는 그런 의미에서 노력의 보상에 행운을 얹으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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