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5 18:04최종 업데이트 22.07.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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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 중인 박진 외교부 장관이 18일 오후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예방,기념 촬영하고 있다. ⓒ 외교부 제공


한일 역사문제에 관한 윤석열 정부의 해법이 윤곽을 거의 드러냈다. 강제징용과 관련해서는 '전범기업을 제외한 한일 국민과 기업들이 위로금을 대신 지급해주는 대위변제 방식'이 부각돼 있고,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를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출됐다. 위안부 문제의 경우,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19일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회장을 상대로 그런 입장을 표시했다.

강제징용 대위변제 방식과 위안부 합의의 공통점은 가해자를 법률관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방식 모두 법률상 제3자를 금전 지급의 주체로 설정한다. 후자의 경우, 자금을 마련하는 쪽은 일본 정부였지만 위로금을 지급하는 주체는 한국 정부 산하 화해치유재단이었다. 일본의 가해 사실을 은폐해준다는 점에서 두 방식은 본질을 같이한다.


배상금이 아닌 경제지원금이나 위로금 명목으로 지급하는 방식은 과거 한일회담 시절부터 일본이 줄기차게 추진해온 것이었다. 이 방식에 호응한 것이 5·16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 군사정권이다. 박 정권은 1965년 청구권협정을 통해 배상금이 아닌 경제협력자금과 차관을 받는 쪽으로 이 문제를 봉합했다. 이 역시 가해자와 가해 사실을 은폐하는 방식이었다.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내각이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다. 윤석열 정부는 외교부 장관이나 주일대사 등을 통해 위의 방식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결국 일본 정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국민을 향한 메시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위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은 쪽은 한국 국민뿐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 정부와 보조를 맞추며 한국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홍보전을 펼치는 것이 지금 상황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 두 정부의 '합체'
 

1961년 11월 11일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외국 국민이나 외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를 하지 않고 자국민을 상대로 외교를 펼치는 어이없는 상황은 1961년 직후에도 있었다. 갓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한일 관계정상화를 위해 벌인 일들 역시 본질적으로 한국 국민들을 겨냥한 외교활동이었다.

한일 관계정상화 당시의 외무부 장관인 이동원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소개된 것처럼, 5·16 쿠데타 5개월 뒤에 도쿄에 가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 등을 만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라며 "청구권 같은 문제 신경 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라고 말해 자민당 사람들을 감동의 물결로 몰아넣었다.

박정희는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들추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항 도착 성명과 환영 만찬장에서도 표명했다. 식민 지배 배상 문제에 관한 대일 외교를 스스로 포기했음을 명확히 밝힌 셈이다. 이렇게 한일 두 정부가 '합체'됐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한은 양국 간의 외교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형태의 외교활동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한국 국민들을 겨냥한 한일 정부의 외교전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처럼 그때 역시 역사문제와 관련해 '한국국민 vs 한국정부·일본정부·일본국민'의 구도가 형성돼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구도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1962년 10월 20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방일을 전후로 벌어진 상황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우리 국민들도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종필 방일을 앞두고 두 나라 정부는 이에 역행하는 애드벌룬을 띄웠다.

그해 10월 13일 자 <조선일보> 기사 '사억불 선으로'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소식통은 '김종필 방일에 대비해 일본 정부 내에서 세 가지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고 한국 언론에 알리면서 금액 문제를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외무성 소식통이 알린 세 가지 옵션은 ▲ 무상 2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 무상 2.5억, 차관 1.5억 ▲ 무상 2.5억(대일거래 미결제 청산분 포함), 차관 2억이었다.

한편, 박정희 군사정권은 '6억 달러'를 언론에 흘렸다. 10월 9일 자 <동아일보> '한일 현안 정치적 타결을 시도'는 "오는 20일 일본을 방문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청구권 액수를 비롯한 한일회담의 최종안을 가지고 지전 수상을 만나 그 타결을 꾀하게 될 것이라고 9일 상오 정통한 외교 소식통이 전하였다"라고 보도했다.

그런 뒤 "이 소식통은 청구권 문제는 신축성 있게 해결한다는 정부 방침을 강조하고 현재의 6억 달러 선과 너무나 거리가 먼 미국 측의 3억 달러 타협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으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이 말하였다"라고 설명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3억 달러를 제시하고 있지만 박정희 정권은 그 금액과 "너무나 거리가 먼" 6억 달러를 받고자 한다는 점이 언급됐다. 미국 정부도 금액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언급은 그것이 대세인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일본 위해 활동한 박정희 정권
 

‘윤석열 정부의 굴욕적 대일외교’를 규탄하는 대학생겨레하나, 진보대학생넷 회원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앞에서 박진 외교부장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가자들은 최근 일본을 방문해 한일외교장관회담과 기사다 총리 면담을 한 박진 외교부장관이 ‘2015년 한일합의가 공식합의로 존중되어야 하고, 강제 동원은 현금화 전 바람직한 해결방안을 모색하겠다며 일본에 되려 면죄부를 주는 굴욕외교를 선사했다’고 규탄했다. ⓒ 권우성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금전의 대소보다는 명목이었다. 일본이 그 전부터 경제협력자금 명목의 금전 지급을 운운했기 때문에, 이 방식을 굴욕적이라고 판단한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는 쪽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도 한일 양국 정부가 똑같이 명목보다는 액수에 초점을 맞춘 내용을 언론에 내보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김종필의 방일 스케줄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이어졌다. 두 정부는 계속해서 액수를 화두로 내세웠다. 10월 23일 자 <조선일보> '남은 것은 결말 짓는 방법뿐'에 따르면, 김종필은 숙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4억 달러 이하를 제시했다는 일본 보도를 부인하면서 "한국은 6억불 선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이렇게 한국 국민들의 요구를 외면한 상황 전개를 비판하는 사설이 10월 31일 자 <조선일보> 1면 실렸다. '본말이 전도된 재산청구 금액의 논의'라는 사설이 그것이다. 사설은 "지난 20일부터 동경서 개최된 한일회담의 성공 여부를 둘러싸고 낙관·비관 양론이 교착되는 가운데, 최근 갑자기 대일(對日) 재산청구 금액이 크게 크로즈업되어 마치 한일회담의 핵심을 이루는 듯한 인상을 퍼트리고 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런 뒤 "대일 재산청구권은 일제 36년간의 한국 침략에 대한 충분한 '배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종래 입장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배상이냐 아니냐'가 논의되지 않고 '4억 달러냐 6억 달러냐'가 논의되는 상황을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가 대일 재산청구권을 분명히 배상으로 견지하자는 것은 감정론이 아니라 후세 국민에의 교육과 역사상의 오욕을 씻기 위한 절대적인 주장인 것이며, 일본 측이 우리의 경제사정을 넘어다보고 차관 형식으로 호도하려고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재산청구권 협상은 이러한 명분부터 먼저 확정해놓고 임해야 할 것이며, 금액의 다과는 그다음 문제인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금전의 명목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함께 금전의 액수를 부각시키며 이쪽으로 관심을 집중시켰다. 쿠데타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민정이양이 되지 않아 박정희 군사정권이 민심 동향에 특히 민감할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구권 문제에 대한 국민 정서를 몰랐을 리 없는데도 분위기를 금액 쪽으로 몰고 갔다. 한일 두 정부가 공동으로 '쇼'를 연출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방일 전부터 김종필은 금액 문제를 놓고 비장한 모습을 연출했다. 10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회담을 앞둔 11일 "일본이 과거 36년 동안 우리에게 압박을 주었던 것을 회상한다면 우리 측이 요구한 청구권 액수에 관해 이해를 하게 될 것"이라며 액수 쪽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지금이나 그때나 일제 식민 지배에 비분강개하는 사람들은 사과·배상을 관철시키는 데 일차적 관심을 두지 금전 액수에 일차적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비분강개하는 듯하면서 금액 액수를 강조한 김종필의 모습은 진심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 정권은 이렇게 5·16 쿠데타 직후부터 일본 정부와 한편이 되어 한국 국민들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결국 1965년에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을 성사시키고 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켰다. 한국 국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위해 외교 활동을 수행한 박 정권의 당연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와 보조를 맞추는 윤석열 정부의 '대한(對韓) 외교'에 경각심을 갖게 만드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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