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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면서부터 강화도로 들어오는 차들이 더 많아졌어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위로 차들이 연신 오갑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는 곳인데도 강화도는 생각보다 분잡하지 않습니다. 강화도가 큰 섬이라 여기저기로 사람들이 다 흩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입니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원래부터 이렇게 컸던 건 아니에요. 원래의 강화도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옛날의 강화도 바닷가는 온통 들쭉날쭉한 리아스식 해안인데다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그랬던 강화도가 지금처럼 된 것은 800여 년 동안 바다를 메운 간척 사업 덕분이랍니다.

바다를 메워 생긴 강화도 평야

강화도는 간척으로 만들어진 섬입니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를 했던 고려 고종 때부터 간척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려사에 보면 고종 43년(1256)에 방축(防築)을 하여 둔전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0만 명도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강화도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땅이 부족하고 식량 조달에 애로가 생겼을 것입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좌둔전과 우둔전을 만들어 농지를 확충했어요. 둔전(屯田)이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을 개척하여 경작하게 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확물의 일부를 지방 관청의 경비나 군대의 양식으로 쓰도록 한 땅을 말합니다.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의 갯벌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의 갯벌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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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으로 이루어진 섬, 강화도. 조선시대에만 해도 120개의 제방을 쌓아 바다를 메꿨다.
 간척으로 이루어진 섬, 강화도. 조선시대에만 해도 120개의 제방을 쌓아 바다를 메꿨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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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간척은 계속 되었습니다. 특히 숙종 시대에 많이 행해졌는데, 가능평과 선두평이 이때 만들어졌답니다.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은 강화 본도와 떨어져 있는 독립된 섬이었습니다. '고가도'란 이름의 이 섬과 강화도 사이에는 선두포와 가능포가 있었는데 여기에 제방을 쌓으면서 드넓은 평야가 생겼습니다. 비로소 고가도는 강화도와 하나가 되었고 마니산은 강화도에 속한 산이 되었답니다. 

강화도의 평야는 이렇게 간척을 해서 생겼습니다. 현재 볼 수 있는 강화의 드넓은 들판은 과거에 다 바다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강화도 전체 면적의 약 30%에 해당되는 땅이 바다를 메워 만들어졌으니 강화의 평야는 가히 사람이 만든 땅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갈곶돈대(葛串墩臺)'를 보러 갔을 때였습니다. 선두평(船頭坪)의 선두수로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한갓지고 평화로운 풍경이었습니다.

선두수로는 드넓은 선두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이지만 원래는 갯골이었을 거예요. 갯골은 갯벌에 나 있는 좁고 긴 물길을 말하는 것으로 썰물이 들어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는 가장 늦게까지 물이 있는 곳이고 밀물 때는 갯골을 타고 바닷물이 밀려들어옵니다.
 
양암돈대 앞 들판과 수로. 박정희 대통령 때 재간척사업을 했는데, 아직 염분기가 덜 빠졌는지 농경지로 잘 이용되고 있지는 않다.
 양암돈대 앞 들판과 수로. 박정희 대통령 때 재간척사업을 했는데, 아직 염분기가 덜 빠졌는지 농경지로 잘 이용되고 있지는 않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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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포의 갯골을 지키기 위해서 갈곶돈대와 양암돈대를 만들었습니다. 숙종 5년(1679)에 만들었으니 지금으로 부터 약 34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강화도에는 이 두 돈대 말고도 50여 개의 돈대가 있는데 48개를 숙종 5년에 한꺼번에 만들었답니다.

갈곶돈대와 양암돈대는 선두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습니다. 둘 사이의 직선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바다가 가로막아 빙 둘러서 가야 했습니다. 

숙종 32년(1706) 9월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왕에게 장계를 올립니다.

"선두포의 양쪽 가에 양암과 갈곶의 두 돈대가 있는데 서로의 거리가 3백여 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포구의 물이 중간에서 막혀 서둘러서 왕래하려면 20리의 원거리가 되니 만약 그 제방을 쌓으면 20리를 3백 발로 줄일 수가 있어 방수하는 도리에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비변사등록' 숙종 32년

민진원의 요청을 받아들인 조정에서는 선두포에 둑을 막습니다. 강화도 간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선두언(船頭堰) 공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두포에 둑을 쌓은 강화유수 민진원을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과거 선두언 자리에 있다.
 선두포에 둑을 쌓은 강화유수 민진원을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과거 선두언 자리에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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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포에 둑을 막는 선두언 공사는 조선 숙종 32년(1706) 9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5월에 일단락되었습니다. 당시 강화유수였던 민진원이 제방 공사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선두언 공사는 연인원 11만 명이 동원된 큰 공사였습니다. 민진원은 숙종비 인현왕후의 오빠로, 그가 숙종의 신임을 받지 못했다면 결코 해낼 수 없었을 큰 공사였습니다.

선두포에 제방을 쌓자 바다는 드넓은 들판이 되었습니다. 20리 걸어가야 했던 두 돈대 사이 거리가 300발로 좁혀졌어요. 하지만 두 돈대는 폐돈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다가 육지화 되어 돈대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갈곶돈대(葛串墩臺)는 화도면 사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기리는 조선 말엽의 대문장가인 영재 이건창의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건창 생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갈곶돈대를 찾아 나섰습니다.

갈곶돈대가 있는 곳은 바다와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돈대 앞이 드넓은 들판이기 때문입니다. 돈대는 바닷가 높은 곳에 있어 바다를 경계하고 관측하는 게 주 목적인데 갈곶돈대는 바다가 아니라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운데 볼록한 동산의 앞부분 등성이에 갈곶돈대가 있다. 돈대 앞은 바다였으나 숙종 때 간척을 해서 농경지가 되었다.
 가운데 볼록한 동산의 앞부분 등성이에 갈곶돈대가 있다. 돈대 앞은 바다였으나 숙종 때 간척을 해서 농경지가 되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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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54돈대 순례 모임 회원들이 갈곶돈대를 답사하고 있다.
 강화도 54돈대 순례 모임 회원들이 갈곶돈대를 답사하고 있다.
ⓒ 양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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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곶돈대가 들어섰을 숙종 5년(1679) 그때는 돈대 앞이 바다였습니다. 1706년에 선두포에 둑을 막자 돈대 앞은 육지가 되었습니다. 돈대를 만든 지 30년도 안 되어 갈곶돈대는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래서 1718년에 혁파되었습니다. 

갈곶돈대로 가는 길은 온통 가시덤불이 뒤덮고 있었습니다. 오래 버려져 있다시피한 돈대라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지 길의 흔적조차 희미했습니다. 앞서가는 사람이 덤불을 헤치며 나아갑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돈대를 없앤 까닭

돈대 터였으리라 짐작되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곳에 돈대가 있기는 있었던 걸까요. 동서 35m, 남북 15m에 둘레가 100m에 달했다는 갈곶돈대인데도 그 위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비탈진 곳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안내판이 없었다면 이곳이 돈대 터임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안내판 뒤쪽에 기단석 일부가 보입니다. 가공하지 않은 동글동글한 돌을 쌓아올린 것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다른 돈대들에서는 돌을 네모나게 가공해서 층층이 쌓아 올렸는데 갈곶돈대는 일정한 기준 없이 막 쌓은 듯이 보입니다.  
 
갈곶돈대에 남아 있는 기단석 일부
 갈곶돈대에 남아 있는 기단석 일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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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곶돈대 성벽돌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일정한 기준 없이 쌓아 올린 형태다.
 갈곶돈대 성벽돌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일정한 기준 없이 쌓아 올린 형태다.
ⓒ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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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곶돈대는 현재 거의 멸실된 상태입니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유적들도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더 훼손될 우려가 큽니다. 더구나 돈대로 가는 길도 확보가 안 되어 있습니다. 돈대 근처에는 펜션 두 채가 운영 중인데, 돈대로 가자면 이 펜션들을 거쳐 가야 합니다.

쓸쓸한 마음으로 갈곶돈대를 둘러봤습니다. 찾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돈대를 남겨두고 우리는 양암돈대를 향해 나섰습니다. 양암돈대는 선두포를 사이에 두고 갈곶돈대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돈대

갈곶돈대와 양암돈대는 탄생과 소멸의 과정이 같습니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으나 선두언 공사 후 함께 혁파되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아 방치 상태라는 점도 같습니다. 그러나 양암돈대는 갈곶돈대보다는 처지가 좀 나아 보입니다. 기단석과 성벽이 꽤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양암돈대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있습니다. 바닷가 평탄지에 위치해 있어 접근하기에 어렵지는 않으나 돈대 근처에 민가가 있는데다 돈대가 농경지 안에 있어 훼손이 우려되는 실정입니다.  
  
 양암돈대는 간척사업으로 돈대 앞이 육지화되며 기능을 상실해서 혁파되었다.
  양암돈대는 간척사업으로 돈대 앞이 육지화되며 기능을 상실해서 혁파되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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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암돈대에는 양쪽 문주석이 모두 남아 있고 기단석 역시 남아 있다.
 양암돈대에는 양쪽 문주석이 모두 남아 있고 기단석 역시 남아 있다.
ⓒ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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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암돈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바닷가의 감시가 쉬운 곳에 설치한 초소다.
 양암돈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바닷가의 감시가 쉬운 곳에 설치한 초소다.
ⓒ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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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암돈대는 동서 35m, 남북 37m, 둘레가 144m인 정사각형 모양의 돈대입니다. 돈대는 밭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경작지에 있는데도 이렇게 돈대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농사짓는 데 방해가 될 뿐인 돌무더기를 이나마 지켜온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양암돈대 앞은 드넓은 들판입니다. 제5공화국 때 재간척사업을 했으니 햇수로 벌써 50년이 지났습니다. 농경지로 이용하기 위해 간척했지만 소금기가 덜 빠졌는지 아직도 제대로 된 농사는 짓지 못합니다. 

바다도 메웠는데 다리 놓는 것쯤이야

양암돈대에서는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가 건너다 보입니다. 둘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면 한달음에 달려올 거리입니다. 내친 김에 개성까지 길을 내는 겁니다. 강화에서 개성까지는 직선거리로 20km도 안 되니, 인천공항과 강화 그리고 개성이 하나로 연결되는 겁니다.

인천공항에서 강화를 거쳐 개성까지 가는 상상을 하며 양암돈대 앞 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돈대가 들어섰던 조선 숙종 5년(1679)에는 이 앞이 바다였습니다. 20여 년 뒤에 선두포에 둑을 쌓자 바다는 육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겁니다. 바다도 육지로 만들었는데 다리 하나 놓는 거야 뭐 그리 힘들겠습니까.

기단석과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 양암돈대에서 미래를 그렸습니다. 지도상에서만 봐왔던 북녘 땅의 지명들이 다가옵니다. 해주며 신의주가 가깝게 느껴집니다. 중국 대륙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암돈대에서 강화와 우리나라의 발전된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갈곶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47-3번지
- 별칭 : 칠오지돈대
- 입지 : 동쪽으로 돌출한 곶의 구릉 상부에 위치
-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 규모 : 동서35m, 남북15m, 둘레 100m추정
- 형태 : 네모형 (추정)
- 문화재 지정여부 : 비지정
- 그 외 : 1718년(숙종 44) 폐지됨.

<양암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840
- 입지 : 해안 평탄지
-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 규모 : 동서35m, 남북37m, 둘레 144m
- 형태 : 정사각형 모양
- 문화재 지정여부 : 비지정
- 그 외 : 1718년(숙종 44) 폐지됨.

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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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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