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9 05:38최종 업데이트 22.08.2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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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베트남에서 온 홍눙(가명)과는 4년 전에 처음 만났다. 여성 농민들로 구성된 W경제 공동체에서였다. 이 공동체는 여성 농민들이 생산한 친환경 농산물을 꾸러미로 만들어 도시 소비자 회원들에게 직접 공급한다. 공동체 취재차 방문한 곳에서 그를 만났다. 현재, 그는 공동체 언니들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공동체 참가 연수가 10년이 넘은 고참이다.

내가 그와 인터뷰하고 싶었던 이유는 결혼이주민으로서 선주민 언니들과 어울려 의미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있어서였다. 홍눙과의 인터뷰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모어가 아닌 '한국어'로 대화가 이루어지니 소통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언어소통보다 더 큰 어려움도 있었다. 인터뷰 중 그의 표정이 흐려질 때가 있었다.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그랬다. 흔들리는 눈빛과 침묵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는 나에 대한 경계심이라기보다는 인터뷰로 인해서 가족이 불편함을 느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국제결혼과 이주여성에 관해 의견을 표명하거나 증언해야 하는 자리에 있은 적이 없었다. 의견과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발언에 조심스러운 이주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시골길을 들어서다

홍눙은 호찌민에서 차로 6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에서 왔다. 그는 삼남매 중 장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서 논농사를 지었다. 종종 남의 집에 가서 일하기도 했다.

21세에 그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호찌민으로 나왔다. 한국에서 온 남자와 맞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결혼중개업체와 연계된 동네 사람이 맞선을 주선했다. 홍눙은 처음에는 이런 만남을 거절했다.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이 무서웠다. 외모에 자신도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국은 TV 드라마 속에 있었다. 그가 본 드라마 속 한국 남자와 여자들은 잘생기고, 예뻤다. 그런 사람들을 보니 자신은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가면 집에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맞선을 보라고 했다. 강요는 아니었다. 자신도 돈을 벌어 집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에 용기를 내었다. 고향에서 4~5명의 여성들과 함께 호찌민으로 갔다. 결혼중개업체가 모든 비용을 부담했다. 호찌민에서 맞선을 보기 전에 잠시 관광을 했다. 고향과 다른 넓은 도시, 호찌민을 관광하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단체 맞선을 2~3번 봤다. 남편은 마지막 맞선에서 만났다. 남편은 홍눙보다 20세 연상이었다. 다른 여성들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성들을 만나고 있었다. 나이  차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오니 나이 차이가 더욱 부각되었고, 종종 할아버지와 산다는 말도 들었다.

결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만난 지 이틀 후에 호찌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친정 직계 가족만이 참석한 조촐한 식이었다. 결혼식의 하객은 식장 도우미나 중개업체 직원이었다. 남편은 결혼식 다음 날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결혼 비자가 도착하길 기다리면서, 결혼중개업체가 준비해둔 합숙소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과 생활하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초청장이 오고, 홍눙은 또 다른 베트남 결혼이주자 여성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 공항까지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날을 홍눙은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12월 20일에 한국에 왔어요."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을 처음 봤다. 한국 날씨에 대비해 자신이 가진 옷 중 가장 두꺼운 옷을 입고 왔으나 추웠다.

공항 대합실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홍눙에게 줄 코트를 들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같이 온 친구도 기다리는 남성이 있었고, 거기서 헤어졌다. 이제는 낯선 지역에 낯선 사람들과 남았다.

호찌민에서 한국어를 배웠지만 홍눙이 할 수 있는 말은 인사말 정도였다. 남편과 같이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의 차로 원주까지 왔다.

"남편이 차에서 내리는 거예요. 왜 내리는 줄 몰랐죠. 차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있는 거였죠. 혹시 납치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어요."

나중에서야 공항에 마중 나온 분들이 시고모 부부라는 것을 알았다. 차에서 내린 남편이 원주에 주차해 둔 자신의 트럭을 가지고 왔다. 남편 트럭으로 갈아타고 H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 길을 갔다. 서로 침묵을 지키며 긴 길을 갔다. 무서웠다. 다행히 중간에 베트남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의 형도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분과 통화한 뒤에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농장에서 다른 이주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홍눙 ⓒ 김애화

 
홍눙은 오자마자 강원도의 매서운 겨울을 견디어야 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추위였다. 도착 후 곧 임신했다. 시집 식구들은 기뻐했지만, 그는 한국 생활이 낯선데 임신해 두려움이 더 커졌다. 입덧이 심하고 고향 음식이 많이 생각났다. 임신 중 조심해야 할 것 등을 몰랐다. 다행히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국어교육 방문지도사'가 1주일 2회 집으로 왔다. 이를 통해서 한국어 공부도 하고 임신 관련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결혼 초기에는 무척 외롭고 무서웠다. 한국말을 모르니 시골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 남편은 술을 먹거나 친구를 만나고 늦게 들어올 때가 많았다. 혼자 집에 있어야 했다. 감옥에 갇힌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결혼을 후회하기도 했다. 베트남 형님이 있어서 가끔 베트남 말로 소통을 하며 외로움을 견디었다. 자신보다 1년 먼저 온 그 분도 한국어가 미숙했다.

임신 중에도 밭에 나가 일했다. 베트남에서는 밭농사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작물 이름도 몰랐다. 사는 지역에는 분만이 가능한 병원이 없어서 멀리 원주로 갔다. 언어소통도 안 되는데 출산 시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싶어 무서웠다. 다행히 순산하여 3일 만에 집으로 왔다.

자신의 통장 그리고 경제권

결혼 3년 만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당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결혼이주민 여성들에게 친정 부모 만들어주는 결연 행사를 했다. 이 행사로 양부모와 연을 맺은 많은 결혼이주여성들이 양부모 성을 따랐다. 홍눙도 양부모의 성을 따라 P씨가 되었다.

결혼 후 6년째 되는 해에 이웃에 사는 여성 농민이 홍눙을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경제공동체에 소개했다. 여기에 참가하면서 홍눙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갖게 되었다. 그건 경제공동체의 활동 원칙이었다. 꾸러미에 들어가는 농산물에는 생산자 여성의 이름이 적히고, 그 수입은 여성 명의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베트남 집으로 송금도 가능해졌다. 그전까지는 한국까지 먼 길을 오게 했던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농사 수입은 남편의 통장으로 들어가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도 남편이 사왔다.

집의 농사 규모는 크지 않았다. 자급자족할 정도의 소농이었다. 논농사, 밭농사가 전부였다. 여느 농가처럼 논농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다. 농사일에 익숙해지자, 토종꿀 양봉과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축산농가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했다.

홍눙이 경제공동체에 들어가 자기 통장이 생기자 부부는 가정 경제를 분담하게 되었다. 농산물 판매 수입은 판매한 사람의 것으로 하자고 남편이 제안했다. 큰돈이 되는 토종꿀과 소는 남편이 판매해 대부분 남편의 수입이 되었다. 크지 않은 생활비와 아들의 학비는 홍눙이 부담하기로 했다. 홍눙은 자신이 열심히 일하면,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수입이 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꾸러미 물품을 공동체 언니들보다 많이 공동체에 내놓는다. 집에서 경작한 농산물뿐 아니라 봄이면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을, 가을이면 밤과 대추 등을 주워 꾸러미 거리로 내놓는다. 그가 내놓는 꾸러미 물품만 봐도 산과 들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종종 마을에 있는 두부 공장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농번기에는 다른 농장에 가 일일 노동자로 일한다.

3년 전에는 승용차를 샀다. 핸드폰에 이어 자신 명의의 개인 재산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읍이나 공동체에 갈 때 주위의 도움 없이 나간다. 홍눙은 자녀가 한 명이다. 자신은 아이를 3명 낳고 싶어했으나 남편이 반대했다. 남편은 자신이 나이가 많아서, 할아버지가 될 나이에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했다. 또 "아이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든다"라는 꼼꼼한 경제관념에 남편은 단출한 가정을 원했다.

그는 베트남 가족도 신경 써야 한다. 베트남에서 부모님을 모셔온 적도 있다. 친정 부모님은 어린 자녀 양육 지원을 위해 초청할 수 있었다. 방문 동거 비자로 입국한 부모님은 다른 농장에서 농업이주노동자로 일했다. 홍눙은 부모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은 남편의 배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친정 부모님과 한집에서 지냈다. 홍눙의 일이 더 많아졌다. 그래도 부모님이 조금의 돈이라도 벌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올해는 한국 농촌일손 부족으로 결혼이주자 가족 초청이 가능하게 되었다. 미혼인 남동생과 결혼한 여동생 그리고 동생의 남편을 초청할 예정이다. 계절노동자로 입국하게 되면 마을에서 일을 할 것이다. 이미 일을 할 곳과 숙식할 곳은 정해졌다. 어머님이 2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혼자 계셔서 이제는 송금할 돈의 액수가 줄었다. 홍눙은 한국 가족과 베트남 가족 모두에게 생계 부양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일손 부족한 한국 농촌에서 노동력 공급망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경제공동체에서 회원들과 같이 일하는 홍눙 ⓒ 김애화

 
생존 한국어 그리고 자녀 교육

한국에 온 후부터 지금까지, 홍눙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한국어 소통이다.

"힘든 점이 많았어요. 아이가 뭘 원하는지 알아듣기 힘들거나 아기가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잘 알아듣지 못해 마음이 아팠어요. 남편과도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대화는 문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그저 나열할 정도인 경우가 많다. 가족을 포함하여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언어가 아닌 그저 경험으로 통할 뿐이다. 긴 대화라는 것이 거의 없는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한국에 온 지 몇 년 후부터 남편은 병원, 학교 등을 동행하지 않았다.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혼자 갔다. 병원에서 의사의 말을 거의 못 알아들었다. 그저 간호사가 안내하는 대로 주사를 맞거나, 처방된 약을 열심히 먹일 뿐이었다.

아들 학교도 마찬가지다. 가정통신문이 오거나 전화가 오면 학교에 갔다. 선생님이 설명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거기서도 병원에서와 같이 그저 웃다가 오곤 했다. 선생님이 주는 설명문을 받아 와서 아이에게 그것을 준다. 그러면 아이가 읽는다. 그렇게 살아왔다.

아이의 언어 발달은 아이와 부모와의 상호작용 속에 이루어지지만, 홍눙은 가장 필요한 때에 그러한 도움을 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자녀생활지원' 지도사가 일주일에 2회 방문해 아이의 한국어 학습, 기타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일상생활과 놀이를 통한 언어 교육이 부족하니 읽기, 쓰기 등의 학습도 늦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학교, 학습에 대해서는 아들이 알아서 했다.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아들과 대화한 적이 거의 없다.

"숙제도 아들이 했다고 하면 그런가하죠."

진로도 마찬가지다. 중3인 아들의 고교 진학에 대해 물으니 "H 고등학교에 가겠죠"라고 답한다. 그가 아는 고등학교 이름은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학교가 인문계라는 것을, 그 학교 외에 다른 특성화 고교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진로 상담이 시작된다. 지금쯤 고교 진학과 관련하여 상담이 있었을 터인데 모르고 있었다. 아들이 이야기를 안 한 것이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또 다른 언어소통의 문제는 새로운 기술과 맞닥뜨렸을 때이다. 읍에도 무인단말기가 늘고 있다. 선주민에게도 쉬운 것은 아니다. 홍눙은 사용법을 타인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청할 때 움츠러든다. 홍눙은 운전을 잘하지만,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글 입력이 서툴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에 소리를 문자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여 주소가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는다. 결국 갈 수 있는 거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내비게이션을 비롯한 인터넷 적응은 그 자체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익혀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여러 번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물으니 도와주는 사람이 귀찮아하거나 짜증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런 표정, 분위기를 한두 번 접하면 위축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상황에서 더욱 멀어진다.

온라인 한국어 교육이 있지만 홍눙씨는 온라인 교육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다. 무엇보다 그의 한국어 학습에 장애가 되는 것은 일이다.

"한국어를 많이 배워야 해요. 그런데 바빠요."

그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바쁘다' '돈 벌어야 한다'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절박하게 했을까? 그의 절박한 필요는 상호 부딪히고 있다.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한국어 학습을 경제적 필요가 가로막고 있다.

홍눙의 꿈

일터, 집에서 인터뷰할 때 홍눙에게 전화가 많이 왔는데 베트남에서였다. 베트남 친구, 베트남 사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사는 한국에서는 전화가 안 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학교와 일터에 있었고, 매일 만나니 통화할 일이 없을지 모른다. 베트남 친구와의 전화는 주로 영상 통화였다. 그들에게 그는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슨 음식을 먹는지 계속 설명한다. 그는 어느 곳에 가나 사진을 많이 찍어 SNS에 올렸다. SNS에서 베트남어로 소통한다.

남편과 사이는 어떤지, 가족에게 바라는 것은 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무심한 듯이 말했다.

"16년 살았잖아요. 이제는 그럭저럭 살아요. 부부가 다 그렇죠, 뭐."

남편의 건강이 안 좋다고 했다. 특별한 병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매일 병원에 간다고 했다. 홍눙은 나이에 비해 노후 걱정을 빨리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아직 38세이다. 남편은 점점 건강한 몸에서 멀어지고 있다. 조만간 노동 능력도 현격히 떨어질 것이다. 아이는 크면서 경제적 요구가 늘고 있다. 정서적 밀착은 멀어지고 있다. 마땅히 기댈 곳 없는 타지에서의 노후에 대한 불안이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있다.
   

여행을 가서 다른 결혼이주자와 같이 걸어가는 홍눙 ⓒ 홍눙

 

마지막으로 꿈이 뭐냐고 물으니 "아파트를 사서 혼자 사는 것"이라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말하며 그는 웃었다. 그러다가 "겨울에는 베트남에서 살고, 농사철에는 한국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한다. 그는 한국 농사꾼이었다.

홍릉과 인터뷰를 끝내며 그가 사는 곳의 이웃 언니들을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어깨에는 이방인이란 무게가 더해지고 있다. 그 점이 장점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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