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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잡지나 이미 수명이 다 한 물건, 잊힌 사람들을 찾아 넋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궁금하고, 궁금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상한 구경기'를 시작합니다. [기자말]
오늘도 드럭스토어 어플을 들락날락거린다. '하같색'(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 이론에 동의하기 때문에, 색깔 구경하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 몇 달 전, 한 메이크업 브랜드는 '물복피치'와 '딱복피치'라는 이름의 틴트를 내놓았다. '물복숭아'와 '피치', 동어반복이지만 '메이크업적 허용'으로 넘어가자.

이 브랜드의 다른 콘셉트 라인엔 '갓기천사', '어쩔체리', '플필업뎃' 이라는 제품도 있다. 이런 네이밍은 타 브랜드들도 적극 시도한다. 자사 제품 사이의 색상을 구분하는 용도이면서, 타사 제품 사이에서 경쟁력을 쥐기 위한 의도도 갖는다.

이런 제품명은 처음이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브랜드 제품은 2호 '셀기꾼템'과 3호 '미모종결'이다. 각각 틴트와 스틱으로 제형은 다르지만 운율(?)이 맞는다. 뷰티 유튜버는 아니지만, 누가 "지금 바른 거 뭐야?"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불필요한 상상을 해 본다.

"이거 '미모종결'이야"보다는 '3호'라고 말하는 게 덜 민망하지 않을까. 두 제품은 외관만으로는 색상 구분이 어렵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립 제품에 고유의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 업체들은 공들여 콘셉트 화보를 찍고, '스와치(제품의 색상 및 질감 비교)'샷을 보여준다. 문득 오래된 패션·뷰티전문지 속 영롱한 색상의 립 제품들이 떠올랐다. 그 제품들 중에도 선뜻 부르기 민망한 이름이 있었을까?
 
<향장>의 내부 페이지. 여름 시즌에 알맞는 카피가 눈에 띈다.
 <향장>의 내부 페이지. 여름 시즌에 알맞는 카피가 눈에 띈다.
ⓒ 아모레퍼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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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색감의 여름표정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화학에서 발간한 '소비자를 위한 미용교양지', <향장> 1990년 8월호를 펼쳤다. 바캉스 후 필요한 스킨케어 방법 등 여름 시즌을 맞이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19쪽에선 '미로'라는 브랜드의 립스틱을 소개한다. 메인 카피 '빛나는 태양 아래 빛나는 색감의 여름 표정'에 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특별한 매력을 연출할 수 있는 이 여름의 빛나는 색감들 - 브라운! 블루! 레드! 색과 색의 조화에서 풍기는 개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하이테크의 이미지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이테크의 이미지'는 요즈음의 립 제품 이름처럼 알쏭달쏭하면서 재미있다.

별 기대 없이 해당 페이지에 소개된 립스틱 337호와 417호를 구글링했는데, 이 번호를 색상 호수로 활용하는 제품이 여러 개 나왔다. 랑콤과 맥에도 417호의 립스틱이 있고, 헤라에도 337호 립스틱이 출시된 바 있다. 2016년 11월 16일자 기사 '이름이 뭐예요?'(얼루어)에 따르면, 색조전문 브랜드들은 색상 호수를 통해 해당 제품의 질감과 색상을 구별하는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같은 숫자여도 회사별로 의미하는 제품의 특성이 다른 것이다.
 
<향장>의 뒷표지. '자홍빛 겨울'이라는 카피로 전개된 겨울 메이크업 캠페인.
 <향장>의 뒷표지. "자홍빛 겨울"이라는 카피로 전개된 겨울 메이크업 캠페인.
ⓒ 아모레퍼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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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호 <향장> 표지는 배우 이영애가 장식했다. 그는 뒷표지에서도 마몽드의 겨울 메이크업 룩을 선보인다. '지금 거리는 자홍빛 겨울'이라는 타이틀 아래 벨벳 모자를 쓴 이영애가 앳되다. 자홍은 '자줏빛을 띈 붉은색'이란 뜻인데, 확실히 최근의 화장품에선 본 적 없는 단어다.

이영애가 바른 자홍색 립은 쿨톤에 어울리는 푸른 기의 붉은 색이다. '올 겨울에도 가을에 이어 에콜로지한 느낌의 패션이 주를 이루지만, 계절이 계절인 만큼 입술만큼은 화려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다.' 영어로 패션 무드를 말하고 립스틱 색상은 '자홍'으로 설명한 이유는 뭘까.
 
<향장> 내지. 새해를 맞이한 특집 기사.
 <향장> 내지. 새해를 맞이한 특집 기사.
ⓒ 아모레퍼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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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내지 23쪽에선, 한복을 입은 모델이 정초나들이를 하는 한국적인 화보가 실렸다. 여기서도 모델은 마몽드 립스틱 48호, 짙은 자홍색으로 입술을 물들였다. 일부 지면만 컬러로 인쇄된 1982년 8월호 <향장>의 표지모델은 입술에 '모이스춰미스트 립스틱 604호'를 발랐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립 마그넷 604호, '플럼 버건디'와는 거리가 있고 키코의 벨벳 매트 새틴 립스틱 604호와는 오렌지빛이 묘하게 비슷하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지만, 비슷한 색조도 참 많다.

정체성이 색상이 되다

예상 불가능한 립스틱 이름을 짓는 건 누구일까? <엘르> 1996년 10월호 192쪽에는 '라네즈 섹시 No.1'의 제품 기획을 맡았던 당시 태평양화학 신세대 PM팀 한송희 대리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일명 '섹시 넘버원'으로 불린 이 립스틱 시리즈는 150만 개의 판매 기록을 달성했다(1996년 5월 15일, 경향신문). '본능이 깨어나는 색'이라는 주제로 전개한 캠페인이 주요했다.

"그 색상을 내고 이름을 짓기까지는 머리카락이 죄 빠지는 듯한 고통이 있었고 수많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어요." 한 대리의 말이다. 이 제품을 히트시킨 후 그는 '사이버 586'이라는 제품도 선보였다. "유행에 민감하고, 사이버 스페이스를 동경하며 컴퓨터와 친숙한 세대를 겨냥했다"는 부연설명. 어쩐지 미래에서 온 것 같은 분위기의 세기말 메이크업은 이런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일까?
 
<엘르> 내지. 메이크업 개발팀 사원 인터뷰.
 <엘르> 내지. 메이크업 개발팀 사원 인터뷰.
ⓒ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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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을 맞이한 잡지들을 더 들여다보니, 유명인의 캐릭터를 따와서 제품이미지로 삼는 노력이 눈에 띄었다. 메이블린은 2004년 러블리보아 색상 등 '보아 립스틱'을 출시했고, 비오템 역시 '효리핑크' 제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최근의 화장품 시장에서 연예인 및 인플루언서가 '픽'한 컬러가 빨리 품절되는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당대 최고의 롤모델이자 아이돌인 이들이 사용하는 제품은 소비자에게 선망의 대상과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을 안겼을 것이다. 그 외에도 과일나라의 '가을전설'이나 랑콤의 '야생의 브라운', '진한 감동의 와인'처럼 외국어 번역체가 반영된 듯한 립스틱 이름도 재밌다.
 
립 제품을 설명하는 잡지 페이지.
 립 제품을 설명하는 잡지 페이지.
ⓒ 중앙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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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콤의 루쥬 이돌르 광고 페이지.
 랑콤의 루쥬 이돌르 광고 페이지.
ⓒ 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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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7일, '올 가을엔 세기말적 컬러'(조선일보)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메이크업 유행에서 회색, 카키색 톤의 립스틱으로 복고풍과 사이버룩을 함께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짚는다.

"입술은 붉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이젠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곱고 예뻐 보이는 원색에서 탈피해 좀 더 과감하게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구들이 극단적으로 반영된 셈이지요."

화장품회사 관계자의 코멘트를 읽으니, 앞으론 '괴랄한' 립스틱 이름을 봐도 눈 딱 감고 테스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복피치'도, '딱복피치'도, '어쩔체리'도 그런 개성의 발로일테니. 립스틱에서 의외의 낭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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