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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후 배수로 뒤의 편백나무 숲
 공사 후 배수로 뒤의 편백나무 숲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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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만 내리면 집 뒤의 작은 배수로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하는 천산댁과 우 이사. 최강욕설 천산댁과 도덕군자 우 이사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절대부자 박 회장. 캐릭터를 보면 이 세 사람은 무협지나 <반지의 제왕>에 나올 법하다.

하지만 이 구도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익숙하다. 광대 천산댁과 양반을 갈망하는 중인계급 우 이사, 그리고 이들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자 박 회장. 잉여 생산물 탓에 계급이라는 게 생긴 뒤로 늘 이어져 온 인간관계의 압축판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나는 이 관계의 압축판에서 어떤 배역을 맡고 있는 걸까? 이장으로 따진다면 향리 역할을 하는 중인계급 정도일 테고, 프로 골퍼 배역이라면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

내 생각이 세상의 모든 프로 골퍼들을 대변하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나는 항상 투어 경기를 뛰면서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검투사들이 떠올랐다. 내 생존을 걸고 하는 일을 누군가가 보고 있고, 심지어 TV로도 지켜보고 있다.

내가 투어 경기를 생존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기들이 프로 골퍼들이 지향하는 최종적 경제활동이면서 동시에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투어 경기를 최종적 경제활동이라 함은 좋은 성적을 내서 상금과 후원·광고로도 생활이 가능할 때고, 기본적 경제활동의 토대라고 표현한 것은 대회에서 상위권은 아니더라도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면, 레슨 시장에서 제법 훌륭한 상품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박 회장과의 담판

아무튼 박 회장의 눈에는 배수로 문제를 의논하러 온 내가 이방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드라이버 비거리가 짧아서 고민이라며 해결책을 물었을 때, 박 회장에게 나라는 존재는 원형 경기장에 들어설 자격이 있는 검투사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고.

배수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숨겨 둔 비법까지 풀어서 드라이브 비거리에 관해 얘기해 줬는데도, 박 회장은 단호했다. 배수로 공사를 위해 자신의 땅을 제공할 생각이 없다고 박 회장은 딱 잘라 말했다.

"이유가 뭐예요, 박 회장님?"
"제가 그런 이유까지 동네 이장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젠장,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 프로님이라고 부르더니만, 이젠 이장님도 아니고 동네 이장이네.'

"물론 배수로 공사를 할 땅이 회장님의 사유 재산이긴 합니다. 경계가 그렇게 그어져 있으니 회장님에게 그 땅을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구요. 하지만 그 배수로는 회장님이 매매를 통해 그 땅을 소유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수로가 있는 그 땅은 공공적·공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제 앞에서 무슨 경제학 강의를 하는 겁니까, 이장님?"


박 회장은 상당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줬지만, 박 회장은 수렴청정을 통해 상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박 회장이었기에 고작 이장에 불과한 내가 사유 재산이 어떻고 공익적 성격의 땅이 저떻고, 라고 말하는 게 같잖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배수로 근처에 있는 편백나무들 한 15그루는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공사가 끝나면 다시 심을게요. 이번에 배수로 공사 한번 부탁드립니다."

박 회장은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럽시다, 이장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잠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장님! 자기 집 배수로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번 배수로 계약을 따냈다고 무슨 커미션을 받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 양반들 성격상 고맙다는 말을 할 것도 아닐 거고···. 배수로 공사를 해도 천산댁 그 양반은 계속 불평불만을 하며 욕을 할 건 뻔하고, 우씨는 자연의 이치가 그렇게 흘러서 그렇게 된 거라고 얘기할 건데···."
"그래도 두 분 다 귀엽잖아요."


배수로 공사는 3일 만에 끝났다. 그리고 편백나무들은 공사가 언제 있었냐는 듯 늘 있던 그 자리에서 하늘을 받들고 서 있었다. 박 회장의 예상처럼 공사 기간 내내 천산댁은 공사팀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우 이사는 우주의 이치에 따라 생길 것이 생겼다고 말했다.

누구도 내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배수로는 만들어졌고, 두 사람은 이제 폭우가 쏟아져도 집에서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걸로 충분했다.
    
지리산의식주연구회 회의 모습
 지리산의식주연구회 회의 모습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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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

이제 이 연재물의 제목인 마을기업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의 주산물인 밤을 활용해서 뭔가를 하기 위해 '지리산의식주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마을기업에 도전했고, 우리 마을은 예비마을기업으로 선정됐다.

예비마을기업에 선정되면, 운영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예비마을기업 사업비의 일부인 650만 원이 협동조합 통장으로 입금된 것은 2021년 6월 25일이었다.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진 날짜에 사업비가 입금된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 뒤로 우리 마을의 예비마을기업 활동은 스텝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일단은 2021년부터 활동을 하라면서도 사업비가 너무 늦게 지급된 것이 문제였다. 농촌 지역의 경우 사업비가 빨리 지급돼야 농한기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데, 거의 7월에 사업비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결국 예비마을기업 사업비의 목적인 교육과 컨설팅 등을 부실하게 진행하라고 장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021년 7월 2일에 밤잼 교육과 밤잼 개발에 참여하기로 한 잼 전문가 배필성 선생님에게 교육비·개발비를 입금했다. 그리고 7월 12일에는 밤나무 재배 기술과 수확 후 관리·저장·가공·유통 등 역량 강화 교육을 하기로 한 도농문화교류영농조합법인에 교육비를 입금했다.

하지만 9월 27일에 다시 도농문화교류영농조합법인으로부터 교육비를 돌려받았고, 12월 28일에는 배필성 선생님에게 교육비와 개발비를 돌려받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집합금지로 인해 교육과 개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예비마을기업 활동을 하고 1년 뒤 마을기업으로 다시 사업계획서를 만들 때, 마을기업으로 선정되기 쉬운 아이템으로 컨설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업체의 유혹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우리 마을의 자부담 200만 원이 포함된 사업비를 업자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치기 싫어서였다.

그런 제안을 한 곳이 마을기업 지원기관에서 선정한 컨설팅 업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마을기업 지원기관에 불쾌함을 표하면서 예비마을기업 선정을 취소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 2월 17일 사업비를 반납했다.
   
선수 시절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전지훈련 갔을 당시의 필자
 선수 시절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전지훈련 갔을 당시의 필자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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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마이뉴스>에 '프로 골퍼의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라는 연재를 시작한 것은 2021년 5월 10일부터다. (관련기사 : 여자프로골퍼 KLPGA 212번, 농사 짓고 있습니다, http://omn.kr/1t1nm) 그 당시만 해도 나와 우리 마을 주민들 모두 마을기업 활동을 통해 마을을 변화시키고 본인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한 헛소동이었다.

우리 마을이 경험한 예비마을기업 활동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믿고 싶다. 오늘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열심히 협동조합과 마을기업 활동을 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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