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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씨는 1971년 8월 29일 동해 바다에서 제2 승해호라는 배에 승선하여 오징어 조업을 하던 중 북한에 납북됐다가 1972년 귀환하여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 4년이 지난 1976년 군복무 중 보안대에 연행되어 재차 조사를 받고 간첩 혐의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다시 복역했다. 복역을 마치고 출소 한 후 고향 속초를 떠나 동해시로 이사해 택시회사를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김영수씨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1972년 납북귀환사건 때나 1976년 간첩사건과 관련해 인권침해를 당해 조작되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신청기간 내에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실규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납북귀환어부 시민모임이 만들어졌다는 뉴스를 보고 용기를 내어 진실규명신청과 재심을 신청한다는 김씨는 여전히 외부와 철저히 차단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김씨는 살고 있는 집의 창문 모두를 외부에서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스프레이 페인트로 짙게 칠해놓았다. 수십 년간 경찰의 감시로 사생활이 침해당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일상생활이 회복되길 바랐다. 특히 파괴된 가족관계가 회복되길 기대했다. 
 
김영수씨가 거주하는 집, 창문이 모두 스프레이 페인트로 짙게 칠해져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해 놓았다.
 김영수씨가 거주하는 집, 창문이 모두 스프레이 페인트로 짙게 칠해져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해 놓았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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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후

김씨가 납북되던 당일은 울릉도 지역에서 오징어를 잡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바다에 안개가 심하게 끼어 있었다. 안개 낀 바다를 보며 친구 서너 명과 함께 선미에 앉아 있던 김씨가 선장에게 "아제비, 여기 어디요?"라고 물었더니 선장이 "저기 보이는 불빛이 '인구 등대'(양양 아래쪽 지역)다"라고 하였다. 안개비가 심해져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잠시 배를 멈추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고, 선원들은 선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고 한다. 잠을 자다 소변이 마려워 잠이 깬 김씨는 다음날 부친 생일에 복어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 때 안개 속에서 불빛이 2~3차례 깜빡이더니 따발총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남한 배가 나타나더니 저희 배에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도룻지(인민군모자)를 쓴 사람이 총을 들고 나타나더니 밧줄을 우리 배에 던지고는 '빨리 걸우라우, 걸우라우'라고 말했습니다. 저와 선장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관장 박정태가 언제 선실에서 나왔는지 기어서 배 선미로 가더니 밧줄을 선미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군인들이 우리 배를 끌고 갔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불과 2~3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배는 아침이 되어서야 장전항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에 약 1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귀환했다. 당시 억류되어 있던 납북어부 160여 명(북한에서 환송을 할 때 선원대표로 우리 선원 160명은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답사를 김영수씨가 수일 연습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한다고 함)과 함께 귀환하였다.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한국 함정에 넘겨졌는데 한국 함정은 즉시 어선을 속초항으로 끌고 갔고, 속초항에 도착해서는 경찰에 의해 시청으로 이동했다. 당시 시청에 수용된 선원은 100여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옆 건물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시청에서 한 사람씩 불러내어 한일여인숙과 현대여인숙에서 조사했다고 한다. 형사들이 바닥에 이불을 깔아놓고 꿇어앉으라고 하더니 북한에서 지령 받은 것에 대해 말하라 했다.

김씨가 지령 받은 것이 없다고 하자, 곧바로 불을 피우기 위해 쌓아둔 장작개비를 가져와 무릎이고 어깨고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팼으며, 주먹으로 뺨을 때리고 온몸을 발로 찼다고 한다. 시청에서 여인숙으로 조사받으러 갈 때는 걸어 나갔지만, 조사받고 시청으로 돌아올 때는 다른 사람 등에 업혀 오거나 전경들이 양팔을 끼고 부축해서 데리고 올만큼 고문으로 녹초가 되었다.

김씨뿐 아니라 여인숙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오랜 기간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받은 뒤 속초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군 입대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김씨는 1975년 10월 12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받던 중 보안대에서 호출해 불려갔다. 수사관이 "니가 이북을 갔다 왔으니 이북 사정에 대해 잘 알지 않느냐", "이북에 친척이 있지 않느냐"고 해서 "피난민이라 누구누구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로 몇 번 더 불려갔다. 하루는 사복 입은 사람이 찾아와 "HID라는 것을 들어 봤냐, 너는 군대 못 올 사람인데 우리가 힘을 써서 왔다. 그러니 HID에 지원하라"고 했지만 겁이 나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서빙고보안대에서 조사받고 고문 받을 때도 수사 막바지에 '이' 수사관이라는 사람이 "지금이라도 HID에 간다고 하면 이 죄를 모두 다 없애주겠다"고 회유했다고 한다.

훈련소 4주간의 기본 교육을 받고 곧바로 충북 증평에 있는 37사단 사단사령부 군수참모부 행정병으로 배치를 받았다(당시 속초 아야진에 살고 있던 김상기와 함께 배치받았다).

군 복무 중 본부중대장 손모 대위가 김씨에게 장기하사관에 지원하도록 권유했다. 김씨는 납북사건으로 괴롭힘을 당하느니 차라리 군에 있으면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다 싶어서 1976년 3월경 장기복무를 결심하고 하사관에 지원했다. 하사관 교육이 다가오자 당시 병장 서재필이 김씨에게 "조금 있으면 내가 외출을 나가는데 그때 너희 가족이 사고가 났다는 전보를 쳐 줄 테니 청원휴가를 내서 휴가를 다녀와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 서재필은 외출을 나가서 전보를 쳤고, 그 일로 휴가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선임하사가 하사관에 지원했다며 1주일 휴가증 외에 1주일 출장증을 더 끊어 주었다고 한다.

휴가를 보내며 속초에서 10일 정도 머물렀을 때, 사령부 본부중대에서 사람이 찾아와 '미복귀'라며 37사단 보안대로 연행했다. 휴가증과 출장증을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37사단 보안대에서 처음 10일 정도는 편하게 지냈다. 10일정도 지났을 무렵 보안대장 강모 대위가 맥주 한잔을 하자며 불러냈다. 김씨에게 맥주를 권하며 "김 일병, 나한테 솔직히 이야기 할 게 없나,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간첩들과 접선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길래, 김씨가 "무슨 말이냐, 그런 사실이 없다"라고 말하자, 소지품을 뒤졌고, 호주머니에 있던 '군인수첩'을 찾아내더니 그 군인수첩에 적혀 있는 친구들 연락처를 보며 그것이 포섭하려는 사람들 명단이라는 것이었다.

강 대위는 김씨의 뺨을 때리고는 "이 새끼, 들어가 자"라고 했다. 김씨가 내무반으로 들어가서 자던 중 새벽에 지프차가 와서 청주시내에 있는 보안대 안가 '청원공사'로 연행해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조사 없이 아침밥만 먹고 서울에 있는 서빙고 분실로 이동했다.
 
묵호 등대길 꼭대기에 위치한 김영수 씨의 집. 외떨어진 곳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살려는 김씨의 마음이 엿보인다.
 묵호 등대길 꼭대기에 위치한 김영수 씨의 집. 외떨어진 곳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살려는 김씨의 마음이 엿보인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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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서빙고 분실에서 처음 3일간은 수사관들이 말도 공손하게 하고, 식사도 제때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납북되어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 다 적으라고 하여 빠짐없이 적었다고 한다. 자술서를 작성하자, 다음날 엘리베이터에 태워 지하로 데려가더니 김씨가 입고 있던 군복을 벗게 하고 계급장도 없는 너덜너덜한 시커먼 군복을 입게 하였다.

처음 보는 수사관 3명이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명이 느닷없이 김씨의 뺨을 때리며 "여기가 어딘 줄 아냐, 이수근도 조사받은 곳이다. 살아서 나가든가, 죽어나가든가 협조를 해라"라고 하면서 의자에 앉게 하면서 조사를 하였다고 한다. 책상 앞에 두 명의 수사관이 앉았고, 수사관 한명은 김씨 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똑바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손으로 뒤통수와 뺨을 수시로 때렸다. 그날부터 식사도 하루에 한 끼 정도 밖에 주지 않았고, 잠도 재우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네가 북한에서 군에 침투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대했지, 더 깊숙이 침투하기 위해서 하사관에도 지원했던 것 아니냐"며 고문하였다.
 
"어느 날 수사관들이 다른 지하조사실로 데려가더니 옷을 다 벗겨놓고, 높낮이가 조절되는 의자에 앉히더니, 팔과 발목을 끈으로 묶고, 머리를 뒤로 젖혀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수건을 씌웠습니다. 처음에는 맹물을 붓더니 나중에는 고춧가루 물을 타서 부었습니다. 심지어는 사각형 타일로 된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그 속에 제 머리를 넣었다 뺐다 반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에는 수사관들이 다른 지하조사실로 데려가더니, 옷을 다 벗겨놓고, 의자에 앉히더니 손목에 가죽으로 된 보호대로 두르고 그 위에 끈으로 묶고, 발목도 묶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고무호스로 물을 뿌렸고, 바닥에도 물을 뿌렸습니다. 제 손가락 하나에 하나씩 10개의 전선을 연결하였습니다. 전화기 같이 생긴 것으로 돌리니 전기가 온 몸에 찌릿하게 왔습니다.

나중에는 빨간 버튼이 있는 전기고문을 하는 기계를 가져왔습니다. 그 빨간 버튼을 누르면, 더 강력한 전기가 온몸에 전달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성기에다가 전기고문까지 하였습니다. 묶인 채로 피를 토하다가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의사가 와서 저를 치료해 주었는데 내 몸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나중에 소변을 보니 핏물이 섞여 나왔습니다."
 
김씨가 가장 괴로웠던 일은 여동생을 연행해 와 여동생 앞에서 구타를 당한 일이라고 했다. 그날 구타로 지금도 왼손 넷째 손가락이 꺾여 있는 상태라고 했다.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한 김씨는 결국 허위사실을 시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관들이 작성해준 진술서를 토대로 김씨는 옮겨 적기만 했다고 한다.

그 후 군 검찰 조사를 받았는데, 서빙고에서 김씨를 조사했던 서빙고 수사관 3명이 입회하였고, 김씨에게는 한마다도 묻지 않고 지장을 찍으라고만 강요했다고 한다.

군사법원에서 군 판사 3명과 군 검찰관 1명, 김씨를 조사했던 서빙고수사관 5명이 있는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판사들은 김씨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검사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검사가 19년을 구형하자, 판사들이 재판장 뒤로 나갔다가 약 10분 후 다시 와서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파탄난 가족
 
"서빙고에 있는 수사관들이 저를 김해교도소로 데려다 주었고, 저는 그곳에 잠깐 수용되었다가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약 2년이 지난 후 좌익수 전담반원이 저에게 전향서를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전향이 무엇인지도 몰라 뭘 적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담반원이 저에게 사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저는 간첩도 아닌데 뭘 전향한다는 말이냐'며 버텼습니다. 그러자 교도소에 있는 지도원(교도소 내에 수감된 깡패들) 3명이 내가 수감된 곳의 문을 따고 수시로 들어와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물과 식사를 반으로 줄였고, 겨울인데도 담요도 가져가 덜덜 떨고 지내게 했으며, 밖을 쳐다보지 못하게 나무로 환풍기도 막아 버렸습니다. 식구통도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외부와의 공기는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제가 연행된 후 한 번도 집에 연락을 하지 못해, 집에 연락을 하고자 했으나 전향을 해야 한다며 연락을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전향서를 작성한 후 재소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전향서를 낭독했습니다. 그 후 전향수들이 있는 독방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이후 1986년 6월 4일 대구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습니다. 지금까지 보호관찰을 받고 있습니다."
 
김씨는 석방된 후 수감 4년째 되던 해에 아버님이 속초에서 대구까지 면회를 하시고 나서 그 충격으로 3일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은 면회 전까지는 조사가 잘 마무리되어, 하사관으로 군 복무 잘하고 있는 줄로 아셨다고 한다.

김씨 사건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역시 피해를 받았다. 누나는 매형이  빨갱이 가족이라면서 쫓아냈다. 그 후 20년이 지나도록 누나의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출소 후 여동생을 찾아갔지만, 김씨 때문에 남편에게 피해가 갈까봐 매우 심하게 냉대를 당하였고, 그 후로 연락을 하거나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아내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지금도 어쩌다 한 번이라도 친구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간첩새끼"라고 하여 만나기를 꺼린다고 했다.

그는 언제라도 수사관이 자신을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늘 긴장하며 살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김씨의 억울한 누명이 밝혀져, 그의 창문에 짙게 칠해진 페인트가 벗겨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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