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년 다닌 회사를 나오기 전, 회사 밖 생활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와보니 그렇게 두려워 할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저의 시행착오가 회사 밖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기자말]
얼마 전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 우리집 휴가 풍경은 다소 달라졌다. 맑은 계곡물을 마주하고도 남편은 잠시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해야 했다. 업체에서 문의한 견적서를 보내야 했고, 에어컨에 문제가 생겨 수리기사를 요청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날의 주문량과 유입량을 체크했다. 급한 연락이 오면, 놀던 것을 멈추고 전화로 일을 먼저 처리했다.

누군가는 우리를 보고 디지털노마드라고 말했겠지만, 우리는 온전히 휴가를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디지털노마드는 디지털(digital)과 유목민(nomad)을 합성한 말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격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디지털노마드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항상 푸른 바다와 노트북이 등장한다. 일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노마드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항상 푸른 바다와 노트북이 등장한다. 일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회사를 다닐 때, 나는 디지털노마드를 꿈꾸었다. 파란 하늘과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원하는 장소에서 일을 하는 건 너무 매력적인 업무 환경이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면 그다지 드러나지 않던 단점이 보이는 법이다. 남편과 나는 사업 후 몇 번의 여행을 하면서 그런 단점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디지털노마드의 현실

사업을 하면서 일을 처리하는 공간이 꼭 사무실일 필요는 없어졌다. 그러나 어디서라도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서라도 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과 같다. 한 번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맑은 계곡 물을 앞에 두고 숙소에 앉아서 오전 내내 일을 처리했다.

일하는 중에는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인데, 아이들은 모처럼 밖으로 놀러 나왔으니 더욱 시끄러웠다. 그런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지만 말을 들을 아이들이 아니다. 결국 게임을 허락했고, 그제야 조용한 업무 환경이 갖추어졌다. 일을 끝낸 후, 점심을 먹고 나서야 놀 수 있었다. 모처럼 몇 시간 달려서 간 계곡에서 반나절 동안 일만 한 것이다.

또한 디지털노마드 업무 환경에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인터넷이다. 아는 지인은 계곡에서 놀다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노트북을 켰으나 인터넷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모바일로 간단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었던지라 지인은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다고 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엔 평일에도 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사업을 해도 평일엔 바쁘기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일은 평일을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관공서 일도, 택배배송 회사도, 물류 회사도 평일에 일했다. 같이 일하려면 우리도 평일에 부지런해야 했다.

회사와 마찬가지로 쇼핑몰도 금요일 오후부터는 조금 느슨해진다. 주말에는 주문량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금요일 오후에 주문을 하면 토, 일 쉬고 월요일에 배송하니 빨라야 화요일에 도착하기 때문에 주문을 미루는 것이다. 게다가 주말에는 외부 활동이 많으니 주문량이 적다. 그러니 우리도 열심히 주말에 노는 수밖에.

가장 바쁜 요일은 월요일이다. 금요일 오후와 주말에 밀린 주문 건과 고객 문의사항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업을 한 이후로 주말을 포함한 월요일 휴가는 가지 못했다. 사실 월요일에 여행을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스스로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휴가를 내지 못할 뿐이다.

물론 직원이 있어서 이전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업무 환경이 되었지만, 적은 인원으로 최대의 업무효율을 내야 하는 만큼, 휴가 때도 자유롭지 못한 건 사실이다.

가끔 스스로 질문한다. 이렇게 휴가지에서도 일에 매달리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회사 다닐 때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했지만, 휴가지에서 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면 회사라는 조직은 거대했고, 시스템이 오래 정착되었으며, 그 시스템 안에서 일할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의 회사는 조그맣고, 시스템은 오래되지 않았으며, 일할 사람이 적다.

아주 가끔, 회사에서 주어지는 업무만 하고, 주말에는 회사 일을 깨끗이 잊을 수 있었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회사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디지털노마드에 대한 환상이 깨졌음에도 나는 현재가 좋다. 월요일엔 휴가를 내지 못하고, 바닷가와 계곡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현재에 만족한다. 이유는 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시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내가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의미다. 물론 책임도 따른다. 회사에 다닐 때는 약간의 권한과 무거운 책임이 있었다. 개인적인 일은 늘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도 먼저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이것이 나에게 자유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회사에 다닐 때 보다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줄었다. 회사에선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싫은 사람들도 많았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서로 일을 떠넘기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남의 성과를 가로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보다 일 때문에 엮인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일에 대해 신경 써야 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도 신경 써야 했다.
 
회사에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싫은 사람도 많았다.
 회사에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싫은 사람도 많았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디지털노마드의 재정의

지금은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적다. 물론 경쟁사와의 관계, 고객과의 관계가 스트레스로 부상했지만, 회사 내에서 사람들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없는 편이다. 작은 회사에서 워낙 적은 인원이 각자 일당백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어드니 오히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다.

크고 작은 규모의 일을 빠른 의사결정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항은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나의 의견도, 직원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편이다. 이러한 것들이 나에겐 자유롭게 느껴진다.

회사 밖에서 좌충우돌의 시간이 흐르며 나는 디지털노마드에 대한 환상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 둔 것일 뿐, 일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생각한 디지털노마드 환상이 깨졌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회사 밖에서 적응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

마지막으로, 디지털노마드는 언제 어디서라도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라도 일을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전제조건을 부여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 디지털노마드를 꿈꾼다면,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먼저 정의해보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longmami)에도 실립니다.


태그:#슬기로운창업생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