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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와 빨치산의 마지막 격전지
 토벌대와 빨치산의 마지막 격전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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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현(가명)이 나왓." 만원인 전남 함평 대동분주소 유치장에서 거구의 오병현(1921년생)이 걸음을 뗐다. 함평내무서(경찰서) 대동분주소장이 취조를 시작했다.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심문한 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됐다. 

"당신 해방 전에 초등학교 선생질했지?" 여기서 '해방'이란 6.25 발발 후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해방했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북한군 점령시절(인공시절)을 말한다. 결국 '해방' 전은 '한국전쟁' 전을 뜻한다. 

여기에 오병현이 "네"라고 답하자 "반동이구만"이라는 말이 즉각 튀어나왔다. 황당해하는 오병현의 안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소장의 취조는 계속됐다. 분주소장은 대한민국 체제 하에서 작은 감투라도 쓴 이들을 모두 반동 취급했다.

선순환의 시작

전남 함평군 대동면의 유력자였던 오병현과 아버지 오민식(가명)은 이런 분위기를 예감하고 몸을 피해 있었다. 하지만 분주소의 촉수는 그들의 피신처에까지 미쳤다. 한날한시에 오민식 부자는 대동분주소에 연행되어 구금됐다.

6.25 전에 초등학교 선생 한 것이 무슨 큰 죄는 아니지만 전쟁 중이라 오민식 부자는 전전긍긍했다. 취조 방향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오병현은 분주소의 처사에 항의했다. 재판 없이 우익인사를 즉결처형하는 것에 이의제기 한 것이다. 분주소장으로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힐 수밖에 없었다.

"오셨습니까!"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분주소장이 경례했다. "분주소장 동무. 이 동무는 제가 취조할 테니 자리 좀 비켜주시오." "네." 인민군 장교 복장을 한 이의 허리에는 권총이 꽂혀 있었다. "자네가 오병현이야?" "네." "자네. 나 모르겠나?" "모르겠습니다." "나, 김문현이야."

김문현이라는 소리에 오병현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과연 1년 선배 김문현이 맞았다. "형, 어쩐 일이요?" 둘은 손을 마주 잡고 마냥 기뻐했다. 해방 후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김문현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함평군 대동면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터였다.

"자네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네. 춘부장도 여기 계신가?" 전쟁 전에 행방불명된 김문현은 한국전쟁이 나자 전라남북도 공작대장으로 내려와 오민식 부자를 대동분주소 유치장에서 꺼내 주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앞선 1946년경 좌익 활동으로 함평경찰서에 연행된 김문현을 함평남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오병현이 신원보증을 서 구해준 것이다. 당시 미군정 시절에 사회주의자의 신원보증을 서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선순환(善循環)의 시작이다. 오병현이 이념에 기초한 확고한 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사카 시내로 몰려가는 일행을 따라 뒤따라가는 오병현은 우울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한 달 후면 학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기 때문이다. 말은 지원병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끌려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간빠이(건배)"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술자리를 파한 대학생들이 유곽에서 나서려는데 주인이 두 팔로 제지했다. "사카다이오 하랏테쿠다사이(손님. 술값 계산하셔야죠)"라는 소리에, 상의의 단추를 풀어 제친 젊은이가 "옜소"하여 내민 것은 아까가미(빨간 딱지)였다. 아까가미는 '징집영장'이었다. 즉 일본이 벌인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이다.

유곽 주인의 태도는 급변했다. 자기 나라가 벌인 전쟁터에 목숨을 걸고 가는 젊은이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술값을 공짜로 해준 것이다. "아리가토오고자이마스 사요오나라(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친구 따라 술자리에 갔던 대판 관서고등공업학교생 오병현은 그런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며칠 안 되어 그에게도 영장이 나왔다. 급히 귀국한 그는 학병 기피를 결심하고 영장을 불태워버렸다.

학병을 피해 친구들과 전국을 떠돌아다닌 오병현은 걸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그는 취조와 고문을 당했지만, 미친 사람 흉내를 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오병현이 학병을 기피한 데에는 나름의 집안 내력이 있었다. 오병현의 아버지 오민식은 1919년 4월 8일에 있었던 함평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종로경찰서에 10일간 구류를 당했다.

오민식은 지역의 지식인들과 함께 함평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밤새 만든 태극기를 가마니에 숨겨 시장으로 갔다. 만세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각 면에서 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장에서 오민식은 대형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뒤이어 구호와 함성이 물결을 이루었다. 급파된 일제경찰들이 총칼로 겁박하고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만세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1919년 4월 8일 함평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30여 명이 체포되어 목포형무소로 이송됐다. 이날 체포되지 않은 오민식은 이후 봉화시위를 전개하고, 함평군 나산면에서의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됐다. 이 일로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8개월의 수형생활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유해 발굴 보고서>) 오병현의 학병 기피는 아버지 오민식의 피를 대물림한 것이다.

"다 죽게 되얐소"

"다 죽게 되얐습니다. 지발 살려 주시오" 숨이 턱에 닿도록 불갑산으로 달려온 이는 한규흥·한규채 집안의 일꾼이었다. 며칠 전 함평읍에서는 'UN군 수복 환영대회'를 준비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한규흥(1896년생)과 그의 동생 한규채도 당연히 참여했다. 1950년 10월의 일이다.

그런데 환영대회에 나타난 것은 국군이 아니라 빨치산이었다. 함평읍 유력자들은 기겁했지만 그들이 도망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들이 함평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후 UN군이 온다는 소식에 지방 좌익들은 함평경찰서 유치장을 방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오병현은 합평읍 학다리 마을에서 달려온 이와 함께 함평경찰서로 갔다. "이분들은 우리 '레프트(좌익)' 활동에 후원을 많이 해줬습니다" 빨치산 간부인 오병현이 함평내무서장(인공시절 함평경찰서장)에게 호소했다. "내 맘대로 안 되오." 함평군당 위원장의 재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설왕설래 끝에 오병현의 신원보증으로 한규흥·한규채 형제의 석방이 이루어졌다. 6.25 전에 좌익활동가 김문현의 구명에 신원보증을 한 이후 이번에는 우익지도자의 구명에 신원보증을 한 것이다. 오병현은 어떻게 우익지도자 한규흥·한규채의 신원보증을 서 줄 위치가 됐을까.

일제강점기 만세운동부터 학병기피까지 일제에 저항한 오민식·오병현 부자는 함평군민들로부터 애국자로 인식되었다. 오민식 부자는 민족주의자로 한독당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김구가 암살되자 민족주의자 오민식 부자가 설자리가 좁아졌다. 오병현의 표현에 의하면 국가가 자신을 '관제 공산당'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진주하면서 오병현은 함평군 야영훈련소(?)장을 맡았다. 의용군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합평수리조합 자리에 있던 훈련소에서 책임자를 맡고 있다가 군사동원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는 5명의 부원과 함께 군수물자를 수집하고 배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직책의 변화에 따라 몇 곳을 이동했다가 불갑산으로 입산했다. 오병현은 함평군당 유격대인 함호대(咸虎隊) 소속이 됐다. 이런 연유로 한규흥·한규채 형제의 구명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다.

시신 수습에 앞장서
 
불갑산 유해 발굴
 불갑산 유해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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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가 함호대를 책임져 주시오"라는 말을 마친 김문현 유격대장의 목이 꺾였다. 1951년 2월 20일 군·경의 이른바 '대보름작전'은 육군과 공군의 공동작전이었다.

함평군당 부위원장이자 함호대 유격대장인 김문현이 비행기의 기총소사로 목숨을 잃었다. 김문현을 살려 주는데 도움을 준 오병현은 그의 후임이 되었다. 박격포 터지는 소리, 기관총 소리, 소총 소리에 귀가 멍했다.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몰랐다. 군유산으로 후퇴한 그는 다음날인 1951년 2월 21일 불갑산을 다시 찾았다.

빨치산이 판 전호에는 민간인들이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그런데 전호에 쑤셔박힌 이들의 모습은 참혹했다. 오병현의 증언이다.

"남자도 어떤 사람은 항문에다가 그렇게도 하고. 그렁게 전부 이쟈 죽창을 우리 손으로 다 뺐지요. 빼가지고 동네에 가서 괭이, 삽 모두 있는 대로 전부 좀 가지고 올라오라고 해서, 그래서 동네에 내려가서 광암리로 모두 가서, 괭이고 삽이고 모두 가지고 와서, 실실 다 묻었어요."

대보름작전의 와중에 오병현은 어머니, 아내, 여동생, 딸이 1951년 2월 21일 신광면 유천리 벽유동 삼영고개 계곡에서 함평군 대동지서 경찰들에게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952년 11월 25일 함평군 대동면 강운리에서 체포된 오병현은 내심 삶을 포기했다. 자신의 이력상 '살아나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인데 기적이 일어났다. 함평군 시국수습대책위원장인 한규흥이 오병현의 구명운동에 앞장선 것이다. 생명의 은인인 오병현을 살리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한규흥은 전 전라남도 경찰국장 한경록(제6대 경찰국장: 1951.7.27.~1952.11.7.)에게 부탁해 오병현을 함평경찰서에서 빼주었다. 한규흥과 오병현의 선순환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태그:#선순환, #대동분주소, #아까가미, #불갑산, #함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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