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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는 옛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돌아보는 일본 사회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화두 중 하나다. 미드웨이 해전과 함께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분기점으로 평가받는 이 전투는, 그 전쟁사적 의의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의 실패로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수세에 몰려 결국 3년 뒤 패전했다.

그렇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패전으로 몰고 간 과달카날에서의 참극은 어떻게 빚어졌던 것일까.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채 경직된 교리와 전술, 인사를 고집했던 지도자들의 책임을 돌아보는 것은 과달카날 전투를 고찰하는 작업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과제다.

1941년 12월, 말레이 반도 침공과 진주만 공습으로 서구 열강에 대한 전쟁을 개시했던 제국 일본은 반년 간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일본 해군은, 이러한 승기를 몰아 연합국 주력 함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하는 것만이 전쟁을 조기종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봤다. 그리고 그들은 결전을 위한 주요 축 중 하나로 남태평양 너머에 있는 호주에 주목했다.

비극의 시작
 
과달카날의 일본군 비행장은 미국과 호주의 연결을 차단하는 전략적 위협요소였다. 미군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과달카날 섬을 점령했다.
▲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는 미 해병대 과달카날의 일본군 비행장은 미국과 호주의 연결을 차단하는 전략적 위협요소였다. 미군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과달카날 섬을 점령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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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계산에서 일본 해군은 호주와 인접한 솔로몬 제도를 점령하고 비행장을 건설했다. 솔로몬 제도를 점령해 해당 지역의 재해공권을 장악함으로써 미국과 호주 간의 연결을 차단하겠다는 일본 해군의 의도는 연합국 측에게 결코 작지 않은 위협이 됐다. 미군은 즉각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섬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일본 해군이 완공을 앞두고 있던 비행장을 점령했다.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과달카날이 미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인지한 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은 이치기 키요나오(一木清直) 대좌가 지휘하는 이른바 '이치기 지대'에 과달카날 탈환을 명령했다. 이치기 지대의 과달카날 투입에는 일반 수송선이 아닌 구축함이 동원됐는데 이는 오직 신속한 이동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비좁은 구축함에 병력과 물자를 싣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병력의 절반 이상은 물론 대포와 같은 중화기는 그대로 일본에 남겨졌다.

결과적으로, 과달카날 탈환전에 동원된 것은 916명의 이른바 '알보병'뿐이었다. 이미 과달카날에는 중무장한 1만1000여 명의 미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이치기 지대의 과달카날 섬 탈환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작전을 기획한 육군 참모본부도 작전에 투입되는 이치기 지대도 전투에 돌입하기까지 일본군의 '간단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의 오만
 
과달카날 섬 비행장 탈환을 명령받은 이치기 대좌는 휘하 병력들을 백병돌격시켰다가 전멸 상황을 초래했다.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전사 혹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일본육군 제28연대장 이치기 키요나오 대좌 과달카날 섬 비행장 탈환을 명령받은 이치기 대좌는 휘하 병력들을 백병돌격시켰다가 전멸 상황을 초래했다.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전사 혹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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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내 미군의 전력을 오판한 대본영이 부실한 정보력도 문제의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그 근간엔 연전연승에 취해있던 육군의 오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중국군에 이어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과 필리핀의 미군까지 격파하는 데 성공했던 일본 육군은 스스로를 '무적의 황군'이라 자부했다.

남방으로 향하는 병력들에게 '미군은 중국군보다 약체'라는 전훈집이 배부됐던 것은, 당시 육군 내에 팽배했던 자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해군 내에서 비밀에 붙여졌던, 불과 두 달 전에 벌어진 미드웨이에서의 참패에 대해 알지 못했다.

8월 18일 이치기 지대는 공격목표인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30km 이상 떨어진 해안에 상륙했다. 이치기 대좌는 상륙 후 과달카날 섬의 상황을 파악해보고자 이런 저런 시도를 해봤으나 모두 무위에 그쳤다. 정찰대는 실종됐고, 심지어는 원주민을 납치해 고문 살해했음에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초전부터 정보전에 완전히 실패한 상황이었지만 이치기 대좌의 자신감은 여전했다. 그는 어차피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공격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부대를 움직였다. 그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미군을 조우하기만 하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겁 많고 나약한' 미군을 손쉽게 깨뜨릴 수 있는 특효 전술을 자신이 통달하고 있다고 믿었다.

특효전술이란 야음을 틈 탄 '백병돌격'이었다. 즉, 깊은 밤에 일본군 병력들이 군도와 총검을 들고 돌격하게 되면 미군은 혼비백산하여 궤멸될 것이라는 게 이치기 대좌의 판단이었다. 러일전쟁 이래 일본 육군의 교리에 뿌리내린 이 백병돌격은 중국 전선과 말레이·필리핀 전역의 경험이 누적되면서 더욱 더 군 지휘관들에게 선호됐다. 
 
총검을 든 일본군 병사가 유니언잭과 성조기를 밟고 있다. 일본 육군에는 '나약한 서양인'들이 일본군의 백병돌격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이 만연했다.
▲ 제38회 육군기념일 포스터 총검을 든 일본군 병사가 유니언잭과 성조기를 밟고 있다. 일본 육군에는 "나약한 서양인"들이 일본군의 백병돌격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이 만연했다.
ⓒ 일본 육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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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밤, 오직 '정신력'만으로 쉼없이 진군하던 이치기 지대 앞에 드디어 미군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은 이치기 대좌가 기대했던 '곯아떨어진' 상태의 오합지졸이 아니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정예병력이었다.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조명탄, '강과 같이 흐르는 예광탄'의 불빛 아래서 이치기 지대는 완전히 압도됐다.

부대가 사실상 포위됐음에도 이치기 대좌는 자신의 오판을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21일 새벽, 그가 휘하 병력들에게 내린 명령은 '총격전으로 응전하면서 후퇴'하는 것이 아닌 '군도와 총검에 의지한 돌격'이었다.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세뇌되었던 일본군 장병들은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지르며 총검을 들고 앞으로 내달리다가 실탄 한발 쏴 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날이 밝자 미군의 전차대까지 나타나면서 사태는 최악으로 흘러갔다. 미군 전차들은 '개미 밟듯' 이치기 지대의 잔존병력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단 하루의 전투로, 916명 중 777명이 전사했다. 이치기 대좌 본인의 유해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미군 전사자가 35명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 날의 전투는 일본 육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 중 하나였다.

성찰은 없었다
 
이치기 대좌는 적의 압도적 화력에 포위된 상황에서 백병돌격을 명령했다. 결국 85퍼센트 이상의 장병이 전사했다.
▲ 이치기 지대의 백병돌격을 묘사하는 그림 이치기 대좌는 적의 압도적 화력에 포위된 상황에서 백병돌격을 명령했다. 결국 85퍼센트 이상의 장병이 전사했다.
ⓒ Osprey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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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기 지대의 과달카날 탈환시도가 실패하자 대본영은 과달카날 방면의 전력을 대폭 보강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의 전력에 대한 오판은 여전했으므로, 증파된 지상군 병력은 여단급 규모에 불과했다. 새롭게 지휘를 맡은 카와구치 키요타케(川口清健) 소장은 '이치기 대좌의 전철을 밟지 않겠노라' 자신했다.

그는 이치기 지대가 해안선을 따라 단순하게 진군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 생각하고 병력을 분산시켰다. 정글을 우회한 병력들이 여러 방면에서 비행장을 공격한다면 미군의 허를 찌를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던 것. 그러나 정작 이치기 지대 전멸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백병돌격의 문제점에 대한 성찰은 끝내 없었다.

분산된 일본군 병력들은 울창한 정글을 힘겹게 뚫으며 행군했다. 여러 악조건으로 행군 속도가 더디었던 탓에, 정해진 일시에 양동작전을 벌인다는 발상의 전제 자체가 어그러지고 말았다. 한편, 미군은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일본군의 동선을 파악하고 남쪽 정글 방면으로 진지를 구축해 뒀으므로 카와구치 소장이 기대했던 기습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이 됐다.

예정보다 하루가 지체된 9월 13일 저녁 8시, 카와구치 소장은 부대에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이치기 지대가 벌였던 '군도와 총검에 의지한 돌격'이 또 다시 재현됐다. 물론 이번에도 '전사하면 혼백이 돼서라도 적을 향해 돌격한다'는 정신론만으로는 결코 미군의 압도적인 화망을 뚫을 수 없었다. 일본군 전사자의 피로 능선이 물들었다는 의미로, 이때의 전투는 피의 능선(Blood Ridge) 전투로 명명되기에 이른다.
 
카와구치 소장이 시도한 야습 역시 중화기로 무장한 미군의 방어선 앞에 좌절되었다. 이때 일본군 전사자의 피로 능선이 물들었다고 한다.
▲ 피의 능선 전투를 묘사하는 미군 측 그림 카와구치 소장이 시도한 야습 역시 중화기로 무장한 미군의 방어선 앞에 좌절되었다. 이때 일본군 전사자의 피로 능선이 물들었다고 한다.
ⓒ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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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상처를 입고 정글로 물러난 일본군 병력들에게, 곧 기아와 질병이 닥쳐왔다. 신속하게 비행장을 탈환하고 미군의 물자를 빼앗아 보급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꿈으로 남게 됐다. 파리를 쫓아낼 힘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진 병사들의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기도 했다.

바짝 약이 오른 대본영은 이후로도 과달카날로 병력들을 증파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지는 축차 투입은 무의미한 소모만을 야기했다. 카와구치 소장은 기존의 백병돌격으로 미군을 섬멸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진언했다가 보직해임돼 본국으로 소환됐다.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무모한 돌격과 기아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1942년 12월 31일, 쇼와 천황이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비로소 과달카날 철수가 결정됐다. 이에 따라 1943년 2월 7일 과달카날 철수 작전이 실시됐지만, 이때 과달카날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걸을 힘이 남아있는' 이들뿐이었다.

기아와 질병으로 거동조차 할 수 없었던 이들은 지옥 같은 섬에 그대로 남겨졌다. 잔존병력들은 '천황 폐하의 자식'인 자신들이 이대로 버려질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무책임으로 시작된 전투는 무책임으로 끝이 났다.
 
전쟁하러 간게 아니라 죽임을 당하러 간거죠. (중략) 비참하네요. 일부 높으신 양반들의 망상으로 시작된 전쟁에 겨우 2전 5리짜리 엽서 한장으로 소집되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윗사람의 명령으로 죽게 되어도 기꺼이 가야했던 것입니다.
▲ 과달카날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는 아사히 토모키 씨(2008년) 전쟁하러 간게 아니라 죽임을 당하러 간거죠. (중략) 비참하네요. 일부 높으신 양반들의 망상으로 시작된 전쟁에 겨우 2전 5리짜리 엽서 한장으로 소집되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윗사람의 명령으로 죽게 되어도 기꺼이 가야했던 것입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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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된 총원 3만1000여 장병들 중, 5000여 명이 전사하고 1만5000명 이상이 기아나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이 참극에 대해 그 어떠한 반성과 성찰도 하지 않았다. 당시 대본영은 국민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 중이던 부대는 그 목적을 달성함에 따라 2월 초순에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하여 다른 곳으로 전진(転進, 방향을 바꿔 진격)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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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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