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3 11:33최종 업데이트 22.08.2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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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 박철순 박철순이 등판하는 날 선수들은 승리를 예감했고, 더 집중했다. 승리를 상징하고 승리를 만들어내는 선봉장. 프로야구 창설과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한 한국의 야구팬들은 박철순을 통해 '에이스'의 이미지를 새겼다. ⓒ 두산 베어스

 
한국 프로야구 창설 첫 해에 세워진 가장 위대한 기록으로 꼽히는 두 가지가 있다. 타자로서는 백인천의 타율 .412. 투수로서는 박철순의 22연승 기록이다. 그 중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큰 쪽은 '4할 타율'일 수도 있지만, 박철순의 22연승은 그대로 OB 베어스가 독점한 첫 우승의 역사로 직결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더해진다. 

연세대에 자퇴서를 던지고 군에 입대한 뒤에야 비로소 강속구 투수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철순은 2년간 미국 프로야구를 경험한 뒤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된 한국 무대로 복귀했다.


그해에 그는 전구단을 통틀어 유일한 '특급' 선수로 분류되어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강남 아파트 2채 값에 해당하는 거액 4400만 원을 받으며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그 해 3월 28일 MBC와의 창단 첫 경기에 선발 등판해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최고액 선수의 위용을 과시했지만, 이어진 두 번의 경기에서 MBC와 삼성에 연패하며 회의적인 시선을 받게 된다.

"변명 같지만, 공이 좀 달라서 애를 먹었어. 내가 느끼기엔, 미국에서 던지던 것보다 좀 미끄럽더라고. 그리고 MBC하고 2차전 때는 백인천 감독, 그 양반 노림수에 당했고. 역시 일본에서 타격왕을 지낸 어른이다 보니까, 타격 기술도 기술이지만, 제스쳐나 심리전이랄까, 상대 투수를 손바닥 위에 놓고 공략하는 그런 게 있더라고." (박철순. 필자와의 인터뷰 중)

몸쪽을 기다리는 듯한 몸짓을 일부러 노출하고 바깥 쪽을 노리는 식의 프로 20년 경력 백인천의 노련함은 프로 2년 경력 박철순에게 꽤 버거운 장애물이었다. 첫 만남에서도 2루타를 빼앗았던 백인천은 2차전 6회 초에 또다시 동점 적시타로 기를 죽였다. 7회 초에는 OB 3루수 구천서의 실책이 빌미가 되어 송영운과 김용윤에게 희생타와 적시타를 맞으며 역전을 허용했다.

그날 승리투수의 영예를 가져간 것은 4회부터 MBC 마운드에 오른 박철순의 오랜 친구 하기룡이었다. 사흘 뒤 다시 나선 삼성과의 경기에서도 9회 1사까지 1실점으로 잘 버티며 2승째를 눈 앞에 두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함학수에게 동점타를 내주며 강판됐고, 구원투수 황태환이 남은 주자를 들여보내며 연패를 떠안아야 했다.

"실점을 아주 많이 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연패를 하니까 분위기가 좀 안 좋아졌지. 또 워낙 돈을 많이 받은 선수니까 기대치가 있는 거고. 그 때 기사가 났는데, 제목이 '빈 깡통이 요란한 박철순'이었어." (박철순. 필자와의 인터뷰 중)

요란한 빈 깡통, 조용한 너클볼

첫 세 경기에서 박철순이 소화한 것은 23.2이닝이었고 자책점은 6점이었다. 환산하면 평균자책점은 2.33. 무난한 것을 넘어 훌륭한 성적이었지만, 리그를 통틀어 유일한 '특급' 에이스에게 기대되는 바는 그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더구나 모름지기 '에이스'라면 하루 걸러 한 번씩 나와서 컨디션이 좋으면 완봉을, 조금 피곤하다면 한두 점 내주더라도 완투를 해주는 것이 본분이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긴장했지. 잘못하다가는 큰 망신 당하고 끝나겠다 싶었고. 정신을 바짝 차렸어." (박철순. 필자와의 인터뷰 중)

정신을 바짝 차린 박철순의 공은 5개 구단 타자들의 넋을 쑥 빼놓았다. 공의 빠르기 하나만 놓고 보면 이미 성무(공군 야구팀) 시절부터 최동원 못지않았던 박철순이었지만 미국에서 배워 온 비장의 무기도 하나 추가됐기 때문이다. 느리게, 그리고 괴상한 궤적으로 날아들던 변화구였다.

"완벽한 너클볼이었어. 이렇게 쥐고 던졌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한국에서 타자들이 쉽게 칠 수는 없는 공이었지." (박철순. 필자와의 인터뷰 중)

"글쎄, 어떻게 던졌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체인지업이었어. 일본에서 경험한 체인지업하고 들어오는 게 비슷했어. 그런데 너클볼이건 체인지업이건 결국 타자를 속이는 공이거든. 박철순이 또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으니까. 빠른 공하고 적절하게 배합이 되면, 타자가 속을 수밖에 없었지." (백인천, 필자와의 인터뷰 중)


박철순 본인도 너클볼이었다고 혹은 팜볼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둘 다였다고 말하기도 하며, 그의 공을 타석에서 가장 정확히 관찰한 백인천은 체인지업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그 공'이 역시 그 해 독보적이었던 그의 강속구 그리고 역시 당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들이었던 김경문, 조범현의 지략과 잘 섞이면서 그 해의 마운드를 지배했다. 게다가 박철순은 80년대를 통틀어 최고 수준의 수비능력까지 갖추고 있었고, 제구력마저도 괜찮은 투수였다. 
 

박철순의 너클볼 그립 박철순이 너클볼을 던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가진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아마도 박철순의 너클볼을 평가할 기준이 될 만한 또 다른 너클볼을 경험해본 사람이, 당대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두산 베어스

 

"핀포인트(pinpoint)급은 아니었지만 스트라이크존을 아홉 개 정도로 나눠서 넣고 싶은 곳에 90% 이상 넣을 수 있는 수준은 됐지. 그리고 또 야수들이 도와주고, 그래서 맞아도 잡는 경우도 늘어나고 또 점수를 줘도 점수를 더 뽑아내서 이기기도 하고 하다 보니까 자신감이 붙고, 좀 더 제구가 잘 되더라고." (박철순, 필자와의 인터뷰 중)

4월 10일 전주 해태전에 구원등판해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2승째를 챙긴 것을 시작으로 9월 18일 대전 롯데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거두기까지, 그는 무려 5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30번의 경기에서 15번은 선발투수로, 15번은 구원투수로 등판해 185.1이닝을 던졌다.

그 사이 15번의 선발승과 7번의 구원승, 7번의 세이브를 기록했고 승패를 기록하지 못한 것이 한 차례 있었다. 그 기나긴 연승과 무패의 행진이 막을 내린 것은 9월 22일, 잠실 롯데전이었다. 그날 더블헤더 1차전 9회 1사 후에 구원등판한 박철순은 연장 10회 초 김용철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쓴웃음을 지었다.

"허탈했지. 허탈했는데, 또 어깨가 가벼워지더라고. 나도 모르게 무거웠던 모양이야. 그 연승 기록이라는 게 말이지." (박철순, 필자와의 인터뷰 중)

연승 기록이 깨진 다음 날인 9월 23일, 박철순은 대전에서 열린 해태와의 경기에 다시 구원 등판해 3이닝을 던지고 1승을 더했고, 9월 29일에는 후기리그마저 우승해 한국시리즈를 생략하며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해 대구 삼성전에 마지막으로 등판해 완투했지만, 연장 12회 말에 함학수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2점째를 내주며 시즌 4패째를 기록했다. 그래서 그의 1982년 기록은 24승 4패 7세이브가 되었다. 36경기에서 224.2이닝을 던진 그의 평균자책점은 1.84였다.

연승행진, 우승에 닿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의 의미가 단지 개인의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해 각 구단은 80경기를 소화했고, 40경기씩을 치른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 각각 우승팀을 가려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박철순이 무패행진 중에 기록한 17승과 3세이브를 포함해 18승 3세이브가 전기리그에 기록됐는데, 그것은 전기리그 우승팀 OB 베어스가 기록한 29승 중 무려 3/4에 육박하는 21승에 박철순이 직접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그 해 전체를 통틀어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OB 베어스가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획득한 전기리그로 범위를 좁힌다면 박철순은 OB 베어스 자체였고 그를 제외하고는 OB 베어스가 왜 강력했고 어떻게 우승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도저히 논할 수 없게 된다. 그 시즌에 OB 베어스는 박철순이 등판하는 날은 반드시 승리했고, 그렇지 않은 날은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메리트 시스템이 있었지. 그때 내가 경기 때마다 돈 가방을 들고 다녔다고. 그리고 경기 끝나면 그대로 현금으로 성과급을 나눠줬어. 승리투수가 제일 많았고, 그것도 완봉하면 몇십만 원. 그냥 승리투수면 던진 이닝 수와 실점 계산해서 십몇만 원. 타자도 홈런 치면 한 십만 원부터 볼넷이나 몸에 맞는 공도 몇만 원까지. 그래서 경기마다 많게는 150만 원 정도씩 나갔고, 선수도 한 사람이 많게는 50만 원 정도씩 받을 수 있었어. 심지어 경기중에 큰 소리로 신나게 응원한 선수에게 '밴드마스터상'이라고 몇만 원씩 주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니 다들 파이팅이 올라갔지." (구경백, 당시 OB 베어스 매니저. 현 일구회 사무총장, 필자와의 인터뷰 중)

유명한 OB 베어스의 '메리트 시스템'이었다. 박철순은 나설 때마다 대기업 직원들의 월급에 육박하는 수십만 원씩의 성과급을 받았지만, 그 돈을 집으로 가져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 돈은 대부분은 경기 후 회식비가 됐고, 일부는 결정적인 안타나 수비로 도움을 준 동료들에게 용돈이나 선물로 전달됐다. 하지만 동료 선수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용돈이나 선물이 아닌, 박철순을 통해 보장되는 승리의 가능성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성과급은 이기는 경기에서만 지급되는 거야. 지는 날은 없어. 아무리 홈런을 치고 안타를 쳐도, 팀이 지면 무효야." (구경백, 필자와의 인터뷰 중)

각자 개인 성적을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팀의 승리다. 각자 최선을 다해 팀의 승리를 쟁취하라. 베어스가 만든 메리트 시스템이 선수들에게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래서 박철순이 등판하는 날, 선수들은 어떻게든 경기에 나서려고 애썼고, 경기에 나서면 무엇이라도 하려고 기를 썼다. 투수들은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뒷수습이라도 맡아서 아웃 카운트 하나라도 잡겠다고 나섰고, 야수들은 대타로 나서서 희생번트라도 하나 성공시키거나 대주자로 도루나 득점이라도 하나 기록해서 부수입을 올리려고 아우성이었다. 박철순이 없는 날이면 그 모든 기록들이 그냥 흩어질 가능성도 절반 이상이었지만, 박철순과 함께라면 하나하나 알토란같은 성과급으로 확실히 돌아갔기 때문이다.

"경기 후엔, 우린 맥주 회사였으니까 맥주를 많이 마셨지. 양주도 마시고. 이기고 마시니까 더 좋고, 부수입 생겨서 더 좋고, 그날 수입 좋았던 선수들이 술값 많이 내니까 경기 못 나갔던 선수들도 좋고. 분위기가 아주 좋았지. 그러다 보면 다음에 또 이기고 싶고. 다음엔 자기도 돈 벌어서 한턱내고 싶어지고." (박철순, 필자와의 인터뷰 중)

그해 OB 베어스의 하루하루는 축제였고, 신나는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축제의 상징은 박철순이었다. 박철순은 성과급이었고, 승리였고, 그렇게 가다 보니 우승이기도 했다. 22연승의 기록은 그런 점에서 늦깎이 투수의 성장하던 기량과 미국에서 남들보다 먼저 경험한 2년간의 프로 경력이 더해지며 꽃피운 정점의 흔적인 동시에, OB 베어스 모든 선수들의 역량과 구단 운영진의 절묘한 전략적 투자가 더해져 만들어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다른 한 편의 배경에는 얇은 선수층이 있었다. 실업야구의 시대에서 막 건너온 대부분의 선수들은 일 년 내내 경기가 반복되는 프로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했고, 더구나 그 해 가을에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비를 위해 최동원과 임호균, 김재박과 이해창을 비롯한 최정상급의 투수와 타자들이 국가대표팀을 지키느라 아마추어의 세계에 몸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2연승 기록 중 국가대표급 전력을 자랑하던 최강 전력의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6승, 일본 프로야구 타격왕 출신 백인천이 이끌던 MBC 청룡을 상대로 5승을 빼앗아낸 사실은 함께 되새겨질 필요가 있다. 박철순의 기록에 시대적 조건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망정 주어진 조건 안에서는 약팀들을 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강한 라이벌들과의 가장 격렬한 싸움을 통해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빼앗아내는 과정에서 얻어진 부산물이었다는 점 말이다.
 

첫 우승 박철순은 1982년 전기리그 우승팀 베어스가 거둔 승리의 3/4 가량을 책임지는 절대적인 활약으로 정규시즌 MVP에 선정되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3,4차전 세이브에 이어 최종전인 6차전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배대웅의 마지막 타구를 잡기 위해 뛰어올랐다가 쓰러지며 그의 허리 디스크 증세는 더욱 악화됐다. 박철순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감격해서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허리가 앞아서 일어서지 못했던 거야." ⓒ 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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