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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나는 1884년 11월 초순 전라도를 여행중입니다. 11월 8일 밤은 용안(오늘날 익산 지역) 관아의 객사에서 지냈습니다. 그날 김노완金魯完 용안 현감은 내게 선물로 민속화 두루마리를 두 개 주었고 나의 동행들인 양묵과 수일에게는 인삼과 망건을 선물했습니다.

김현감은 가마꾼들에도 소고기와 술을 너끈히 보내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씨가 개어 있었는데 지난 밤에 가마꾼들이 만취하여 한 바탕 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9시 15분에 길을 나섰는데 행차가 거창했습니다. 아전과 군졸들, 나팔수들이 열을 지었고 현감도 동행했으니까요. 우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남행했는데 길은 질척거리고 언덕에는 눈이 덮혀 있었습니다.

10시에 걸망장터에 도착했지요. 사람들이 바글거렸습니다. 장터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자 현감이 나를 소개했습니다. 분위기가 맘에 들더군요. 장에서는 개고기도 팔고 있었고 책도 몇 권 나와 있더군요. 그곳이 용안의 끝이어서 현감은 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일행과 함께 돌아갔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익산 군수가 보낸  군졸 6명, 두 명의 나팔수, 여섯명의 밴드, 두 명의 소년 기수 등과 만났습니다. 뚜뚜 나팔 소리에 이어 기묘한 밴드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길고 괴상한 행렬을 이루어 익산으로 들어섰습니다. 지붕 꼭대기고 어디고 우리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몰려 있더군요.

우리는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는데 장이 열리고 있어서 주막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 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부득이 가축 우리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지요. 

동행인 양묵과 수일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관리들이 외국 문명을 심하게 배척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을 가 본 적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외국인과 같이 다니기만 해도 고국과 등지게 하는 마약에 중독된다고 믿는다는 겁니다. 심지어 고관들도 그렇게 믿는다는 겁니다. 양묵의 한 친구가 일본 군함을 탄 적이 있는데 레모네이드라는 음료가 나와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그 음료가 바로 마약(魔藥, devilish medicine)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한 배외적인 풍조에 비추어 보면 용안 현감은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평안도가 고향인 그는 15살 때 아내를 두고 고향을 떠나 한양에 왔는데 서광범 집의 사랑에서 기거하면서 서광범의 도움을 받아 관계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낯 설고 길 설은 남부 지방을 시찰하기도 했고 뜻한 바가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기술을 연마했습니다. 서울로 돌아 온 뒤에는 별기군을 모아 신식군사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는 1882년 사변(임오군란) 때 구식 병사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반군들은 그에게 총격을 가했고 팔이 관통당한 그를 도랑에 던져 넣고 돌을 던진 후 떠났습니다. 죽었으리라 여겨진 그는 살아 남았고 그 후로 용안 현감이 되었던 것이지요. 

작년에 용안에 부임했을 때에 마침 기근이 덮쳤답니다. 현감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약 5만량을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백성을 돕고 수탈 같은 건 하지 않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최근에 그가 전주를 방문했는데 맨 먼저 80이 넘은 노인을 찾아 뵈었고 그 다음에 전주 감사를 방문했습니다. 전주 감사가 왜 자기에게 먼저 인사를 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하자, 김 현감은 그 어르신이 자신을 깨우쳐 주신 스승이므로 마땅히 그랬노라고 응수했습니다. 

그 노인은 수년 전부터 조선의 문호 개방과 외래 문화 수용을 주창한 선각자였습니다. 김 현감은 내게 그 어르신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 바랐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관리들은 돈 있는 백성을 불러다가 뇌물을 요구하는데 만일 거절을 당하면 매질을 해댄다고 양묵이 말하더군요. 고을 사람들이 하눌님께 탐관오리를 내쫒아달라고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으면 들고 일어나 관리들을 공격하여 한양으로 내쫓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전주 가는 길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눈이 무척 많이 내렸고 도로 상태는 최악이었다. 가마꾼이 불쌍했습니다. 충직스러운 가마꾼은 주의 깊게 우리를 운반하느라 지독하게 고생을 합니다. 입은 것은 무명 옷 한 벌 뿐이고 맨발에 짚신을 신고 있습니다. 

수일과 나는 그날 속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익산에서 먹은 찹쌀떡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처음 겪어 본 고통이었는데, 가슴이 화끈거리고 경련이 일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날 밤을 보냈던 주막 방은 정말이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개 집이나 돼지 우리가 더 나을 것 같았으니까요. 벼룩과 힘든 싸움을 한 끝에 날이 밝았습니다. 30리를 더 가면 전주입니다. 고개 넘고 강 건너 전주 시의 남문에 당도한 것은 그날 12시 10분이었습니다.  

전주성 내에는 약 2천 가호가 있었고 고을 전체에는 7천 내지 8천 가호가 있었습니다. 길은 비좁고 형편없었습니다. 집들은 끔찍했고 가게는 매우 드물었고 초라했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간 끝에 동쪽 끝에 있는 크고 누추한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곧 시끌벅적한 무리가 나타나더니 관아에서 왔다면서 막무가내로 내 방에 들어오겠다고 우기더군요. 나는 정말 싫었습니다. 감사를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집사가 메시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감사가 안방(Anpang)에 드셨는데 감영에 행차할 때에 알려 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잔뜩 굳어 있는 표정의 그는 척 보아도 나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온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조사관인 셈입니다.  

나는 그를 누그려뜨려 주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무반응이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임금, 참판 등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고 이에 그는 식겁했습니다. 이내 큰 음식 상이 나타났고 그 후에 나는 가마를 타고 감사를 방문하러 나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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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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