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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산 전경
 불갑산 전경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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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생부터 군대 간다네." "뭐시여?" 신문을 보고 이야기하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은 윤민용(가명)은 순간 광목을 떨어뜨렸다.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징병제를 공포한 이후 1944년도부터 조선인 청년들을 일본 전쟁터에 끌고 간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제1기 징병 대상이 1923년 3월 1일생부터라는 것이다. 이 소식에 1923년 4월 9일생인 윤민용은 군대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 만주로 도피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징병 대상이 11월 1일생부터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무조건 굶어"


하지만 군입대 대상에서 빠졌다고 징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남 목포 포목점에서 5년간 일한 윤민용은 1944년 10월 초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고 오사카로 향했다. 각 지역의 공장과 광산에 배치되기 전, 수용소는 수천 명의 조선인 청년이 대기하고 있었다.

함평군 엄다면에서 학교 선생을 한 박말갑이 "이 사람들은 농한기에 가구공장에 다녔습니다"라고 둘러댔다. 동향 사람들이 쉬운 일을 맡게끔 함평읍과 학교면 사이에 가구공장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대패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윤민용도 목수 경력자로 인정(?)되었다. 그렇지만 윤민용은 남의 나라에 와서 강제노역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어떻게 하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에게 박말갑이 귀띔해주었다.

"무조건 굶게" "다음엔 어쩐다요?" "내가 알아서 함세" 그러잖아도 허약체질인 윤민용이 일주일을 굶자 뼈만 남게 되었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지만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같이 따라간 박말갑이 "같이 자랄 때 봉께, 이 친구가 덴칸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덴칸은 조선말로 지랄병(간질)이었다. 본격적으로 작업배치를 하기도 전에 시체 치울 생각에, 일본인 감독은 윤민용을 징용 해제시켰다. 7개월 차이로 징병을 면제받은 그가 병을 핑계로 징용이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때는 1944년 12월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장

윤민용은 가방끈이라고는 서당에 3년 다닌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목포에서 17세부터 5년간 포목점 생활을 한 데 이어 징용으로 일본까지 다녀와 시골에서는 '똑똑한 젊은이'로 소문이 났다. 해방 후 여운형·김규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에 들불처럼 번졌다. 함평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조선에서 관료를 지낸 이재혁이 맡았다.

함평군 해보면에도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김우식)가 만들어졌고, 산하에 치안대가 꾸려졌다. 윤민용은 해보면의 치안대장을 맡아 건국 활동에 젊음을 불살랐다. 정국은 정신없이 변화되었다. 미군정의 진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전환되었지만 미군정은 이를 불법화했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해보면에서도 지지·반탁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어떠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남조선에는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윤민용은 194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해보면 산내리 송산마을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권'을 주장한 조선공산당의 정강·정책은 민중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윤민용의 증언에 의하면 함평군 학교면사무소 직원과 학교 교사 대부분이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윤민용이 공무원 시험을 통해 1947년도부터 근무한 해보면사무소 분위기도 위와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방 후 민중들이 사회주의와 조선공산당을 자연스럽게 수용한 데에는 일제강점기 말까지 변절하지 않고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일 것이다.

윤민용은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 함평경찰서와 해보지서에 5~6차례 연행되어 구금되었다. 그만큼 그는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기까지의 시기에 확고한 신념의 기치 아래 활동을 한 것이다.
 
"내 식구가 왔는데 피난을 왜 가?"


함평을 경유해 목포로 후퇴하려던 담양경찰대는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기겁했다. 영광군 불갑면 삼학리에 살던 소년 김영승(1935년생)은 해거름에 삼학출장소로 들어가는 한 무리의 경찰들을 보았다. 담양경찰대가 후퇴하다가 밥을 해 먹기 위해 삼학출장소로 들어간 것이었다. 경찰들이 쌀을 씻어 대형가마솥에 장작불을 땔 때였다.

'슈웅', '쾅' 인민군들이 삼학출장소를 향해 로켓포와 박격포를 쏘았다. 경찰들이 응사를 했지만 화력의 절대적인 열세였다. 교전은 오래지 않아, 담양경찰대의 일방적 패배로 종결되었다. 1950년 7월 22일 밤이었다. 인민군은 2명이 전사한 데 반해 경찰은 100여 명이 전사했다. 생존한 경찰들은 인근 마을로 피신하거나 도주하기에 급급했다. 전사한 경찰들과 도주한 경찰들의 무기들이 삼학출장소 주변에 널려 있었다.

영광군 불갑면 삼학리 신성마을 청년들이 이 무기로 무장해 자위대를 구성했다. 또한 삼학출장소 경계에 있던 함평군 해보면 청년들도 무장을 했는데, 인민군 점령시절에 생산유격대(윤민용의 증언)로 출범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유해 발굴 보고서>) 하지만 생산유격대는 후일 불갑산에 입산했을 때의 조직이고, 인공시절에는 치안대나 자위대였을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함평군 해보면 보도연맹원 40여 명은 함평군 나산면 구산리 넙태에서 학살당했다. 1949년도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윤민용은 당시 해보면사무소에 근무했다. 그는 다행히 소집을 면해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지 않았다.

"인민군이 함평에 진주했을 때 피난 가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윤민용은 "내 식구가 왔는데, 피난을 왜 가?"라며 반문했다. 윤민용과 남로당을 위시한 좌익진영 입장에서는 인민군이 '해방군'이자 '식구'였던 것이다. 인공 시절 윤민용은 해보면인민위원회에서 토지 관계 업무를 봤다. 6.25 나기 전에 하던 일이었다. 전쟁이 났다고 해서 면사무소 일이 크게 달라진 게 없었고, 그의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윤민용이 생각한 해방 시절(다른 말로 '합법 시절' 또는 '인공 시절' 이라고 한다)은 아주 잠깐이었다. UN군이 수복하면서 불갑산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갑산에서 지프차를 타고 다녀


북한군 점령기 말에 해보분주소에서 보안업무를 본 윤민용은 1950년 12월 말 불갑산에 입산했다. 해보면 생산유격대장에 취임한 그는 얼마 안 되어 불갑산 생산유격대장을 맡았다.

죽창을 든 그는 지프차를 타고 불갑산 곳곳을 다녔다. 목포와 무안, 나주, 영광, 장성, 함평 등 각지에서 온 동지들과 피난민들이 군·면 단위별로 움막을 치고 살았다. 생산유격대는 치안을 확보하는 일을 맡았고, 피난민들의 동향도 파악했다. 그런데 불갑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김영승은 "생산유격대는 비무장 빨치산으로, 주로 보급 투쟁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윤민용의 생산유격대장 역할도 오래가지 않았다. 1951년 2월 20일 군경의 토벌작전인 '대보름작전'이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군경의 인간사냥은 목불인견이었다. 윤민용은 당시 산비탈에 시신이 즐비했다고 한다.

"하여튼 그 고랑에 (시신이) 가득 찼응게. 가득 찼고. 그 보름날 작전 그 뒤로 아침에, 아까 말한 것 같이 (중략) 낭중에 석양이 되야서 나오다 보니까는 헉해. 산이고 들판이고 산비얄(산비탈)이제 잉. 헉해요. 죽은 사람들이"
 

불갑산 생산유격대장 윤민용은 대원 30명과 함께 해보면 산내리를 경유해, 나주로 갔다. 이 와중에 그는 가족을 잃었다. 불갑지구사령부 문화부대원이었던 동생 윤주용(가명)과 큰형 윤선용(가명)을 잃었다. 행방불명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정황상 군경에게 처형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윤민용의 아내와 둘째 아들(당시 2세)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1년 3월 초에 해보면 문장리 뒷산에서 경찰들에게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20여년 구두수선

나주에서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로 이동한 윤민용은 1951년 3월 15일 체포되었다. 광주경찰국으로 이송된 그는 사형을 구형받고, 최종 무기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이유는 3명을 죽였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는 총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 기본적으로 생산유격대는 비무장이었고, 그는 천성적으로 누구를 죽일 수 있는 심성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아니 죽이기는커녕 남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마음의 상처를 줄 인물이 아니었다.

목포와 대전, 서울, 마산에서 옥살이를 한 그는 만 15년 만에 석방되었다. 무기징역형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되었기 때문이다. 석방된 그가 구할 수 있는 직장은 없었다. 전남도청 앞에 구둣방을 열어 구두닦이와 구두수선 일을 했다. 20년간 일을 하면서 그는 눈과 귀와 입을 닫았다. 누군가 아는 체할까 항상 머리를 숙이고 일했다. 징역살이나 다름 없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다만 불갑산에서 죽어간 동지들과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제수(동생 윤민용의 아내)와 젖먹이 조카의 시신을 수습한 윤민용의 둘째 형은 평생을 경찰에게 시달렸다. 빨갱이 형제를 둔 죄(?)였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윤민용의 아들도 연좌제로 마음의 상처를 받아야 했다. 원래 법학과에 들어가 법조인을 꿈꾸었던 그는 아버지의 과거를 알고 공대로 방향 전환을 했다.

총대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불갑산 생산유격대장 윤민용은 세 사람을 죽인 죄(?)로 15년간 감옥살이했다. 공무원이었던 그가 돌아갈 직장은 당연히 없었고, 전남도청 앞에서 20년간 구둣방 일을 해야 했다. 죄 없는 아내와 젖먹이 아들이 학살되고, 가족들이 연좌제로 고통받은 게 그의 죄일까.
 
불갑지구사령부가 주둔했던 용천사
 불갑지구사령부가 주둔했던 용천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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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건국준비위원회, #공무원, #생산유격대, #불갑산, #구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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