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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풍기읍에서 소백산맥 자락을 따라 북동쪽 끝으로 가다 보면 영주를 대표하는 사찰이자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부석사가 나온다. 고 혜곡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라는 명저로 전국에서 유명한 데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7개 사찰 중 하나로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으니, 이젠 국가대표급 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석사에서 가장 핵심을 꼽는다면, 봉황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국보 제18호 무량수전과 그 앞에 있는 국보 제17호 석등이다. 통일신라의 석공 예술과 고려시대의 목조건축기술과 조화를 이룬다고 해야 할까나. 무량수전 안에는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이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어서, 불자들에게 경외감을 자아낸다.

지난 13일 영주, 아니 이제 세계에도 내놓을 수 있는 명찰인 영주 부석사로 갔다.

무량수전 올라가는 길     

부석사도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에서 가는 것이 좋다. 소백로를 따라 소수서원을 거쳐서 931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부석면에서 935번 지방도를 만난다. 부석 회전교차로에서 계속 직진하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부석사는 소백산맥에 있는 봉황산(822m) 자락 아래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일주문을 보면 소백산이 아니라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라고 적혀 있다. 삼국유사 <의상 전교> 편에 이런 기록이 있다.     

儀鳳元年湘歸太伯山, 奉朝旨創浮石寺敷敞大乗霊感頗著(의봉 원년(676년)에 의상이 태백산에 돌아와 조정을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大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을 널리 펴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뒤 현판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고 적혀 있는데, 당나라 화엄종 제2대 조사인 지엄에게서 배운 화엄종을 사사하고 귀국한 후에 처음으로 창건한 절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봉 원년'은 신라가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며 삼국통일을 이룬 시점인데, 대승을 폈다는 말은 삼국통일 이후 의상이 왕명을 받아 전쟁 직후 혼란한 백성들의 마음을 불심으로 안정시켰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보물 제255호인 당간지주를 지나 천왕문으로 들어갔다. 오늘 비가 세차게 와서 문 안에서 사천왕의 비호를 받으며 정면을 보니 거대한 누각을 중심으로 양쪽에 건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누각은 1748년에 재건되어 부석사 경내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범종루다. 오늘날에는 범종이 사라지고 법고와 목어만 있다. 
 
영주 부석사 일주문. 앞에는 태백산부석사 뒤에는 해동화엄종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故 효남 박병규 서예가의 작품이다.
 영주 부석사 일주문. 앞에는 태백산부석사 뒤에는 해동화엄종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故 효남 박병규 서예가의 작품이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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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55호 부석사 당간지주. 통일신라 9세기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255호 부석사 당간지주. 통일신라 9세기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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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범종루. 부석사 경내의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팔작지붕의 측면이 정면으로 보이는게 특이한데, 뒤에 보이는 극락세계를 가려준다.
 부석사 범종루. 부석사 경내의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팔작지붕의 측면이 정면으로 보이는게 특이한데, 뒤에 보이는 극락세계를 가려준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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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의 지붕이 상당히 특이한데, 정면으로 보면 팔작지붕의 측면이 보인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간 후 범종루 아래로 몸을 낮춰 들어가 비를 잠시 피하고 다시 올라가 건물 뒤쪽을 보면 맞배지붕의 측면이 보인다. 왜 지붕을 특이하게 지었는지에 대한 옛 기록은 없지만, 정면 팔작지붕은 범종루 뒤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을 자아내고, 뒤쪽 맞배지붕은 절 아래 소백산맥 자락을 멋지게 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인 것 같다. 

범종루 아래에서 정면을 보면 극락세계로 가는 안양문이 보인다. 특이하게도 범종루에서 북서쪽으로 확 틀어져 있는데, 질서 정연하게 지은 경주 불국사와 비교하면 자유분방한 분위기다.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 안양문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면 다시 한 번 누각 아래로 몸을 낮춰서 들어가야 한다. 누각 아래를 지나면 뒤편 현판이 안양루로 바뀌는데, 말 그대로 누각 좌우로 있는 분홍빛 가득한 배롱나무 8월 극락세계에서 아래 사바세계를 보는 느낌이다. 
 
극락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는 부석사 안양문. 범종루에서 북서쪽으로 확 틀어져 있다. 2층 누각 부석사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
 극락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는 부석사 안양문. 범종루에서 북서쪽으로 확 틀어져 있다. 2층 누각 부석사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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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루 옆에서 보는 배롱나무 아래의 세계. 부석사 경내의 지붕들이 산자락과 어울려 내려가는 느낌이다.
 안양루 옆에서 보는 배롱나무 아래의 세계. 부석사 경내의 지붕들이 산자락과 어울려 내려가는 느낌이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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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소조불상, 조사당

안양문을 지나면 부석사의 상징인 무량수전이 내 눈앞에 들어온다. 하지만 바로 앞에 보이는 석등도 주목해보자. 사각으로 이뤄진 무늬 바닥돌과 팔각기둥 위에는 가운데 기둥을 받치는 큼직한 연꽃 조각이 있다. 그 위로 석등을 점등하는 부분인 팔각의 화사석(火舍石)이 있는데, 네 면은 불꽃을 밝히기 위해 뚫려 있고, 네 면은 각기 다른 모습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 위 지붕돌도 역시 팔각이라 석등 전체로 보면 비례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통일신라 최고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1962년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석등 뒤로는 워낙 교과서와 교양 프로그램에서 많이 언급되는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이 있다. 공민왕 7년(1358)년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 피해를 입어서 8년 후 진각국사 원응이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얼마 안 남은 고려시대 건물 중 하나다.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정면 5칸과 측면 3칸의 주심포 양식인데, 거대한 팔작지붕을 24개의 기둥이 650년 이상 지탱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한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과 고려시대에 고쳐지은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
 통일신라시대에 제작한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과 고려시대에 고쳐지은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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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내가 봤던 봉정사 극락전과 달리 정자살로 이뤄진 창호문들로 가득하다. 종이를 창문에 붙이는 건 고려시대에 시작했다고 하는데, 고쳐지었을 당시 가장 최신의 건축양식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창호의 구조도 특이한데, 맨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창호와 중앙 세 칸 양쪽 끝에 있는 창호는 들어 올리는 구조, 중앙 세 칸 중앙의 두 창호는 여닫이 문으로 되어 있다. 들어 올리는 창호 앞에는 걸쇠가 달려 있는데, 여름에 여닫이문을 제외하고 모두 들어 올리면 밖에서 무량수전의 장엄함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 안에 들어가니 거대한 불상인 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이 보인다. 2.78m 높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근엄한 얼굴의 소조상은 불자들에게 경외감을 자아낸다. 대다수 학자들은 무량수전이라는 이름과 사찰 경내 원융국사비에 '아미타불 한 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어 아미타불로 추정하지만, 불상이 파손을 입어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실제 누구인지는 아직 논쟁이 치열하다. 

그래서 불상의 이름이 확실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보통 불상은 정남향으로 되어 있는데, 소조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만약 소조상이 아미타불이라면, 불상을 서방극락세계에 모신 것이 된다. 소조불상은 통일신라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초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량수전 처마 아래 걸쇠가 걸려 있다. 창을 걸쇠에 걸면 밖에서 장엄한 무량수전 내부를 볼 수 있다.
 무량수전 처마 아래 걸쇠가 걸려 있다. 창을 걸쇠에 걸면 밖에서 장엄한 무량수전 내부를 볼 수 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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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통일신라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통일신라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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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왼쪽 뒤편에는 한자로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돌이 있다. 당나라 유학시절 의상을 흠모했던 선묘라는 여인이 용이 되어서 의상을 방해했던 태백산의 권종이부들을 물리치고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재미있게도 이 전설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측 기록인 송고승전에 내용이 나온다.     

무량수전만 보고 부석사를 나서는 실수를 하지 말자. 무량수전 북동쪽에 통일신라 때 건립된 삼층석탑이 있는데, 삼층석탑에서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동시에 보면 산자락을 따라 자연스레 내려가는 부석사 건물들의 경관을 볼 수 있다. 삼층석탑에서 좀 더 올라가면 고려시대에 지어진 국보 제19호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 오른편 철창 뒤로는 선비화라는 나무가 있는데, 의상의 지팡이에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는 전설이 있다. 뭔가 뜬금없는 것 같지만 퇴계 이황이 이 선비화를 보고 지팡이를 언급한 한시를 지어서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조사당 안에는 제석천, 범천, 사천왕들이 그려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가 있었는데, 최근에 벽화 손상이 심해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26년까지 보존처리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뜬 돌이라는 의미의 부석(浮石). 부석사 창건설화로 내려오는 선묘와 연관이 있다. '부석'이라는 한자는 이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뜬 돌이라는 의미의 부석(浮石). 부석사 창건설화로 내려오는 선묘와 연관이 있다. "부석"이라는 한자는 이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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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9호 조사당. 선비화 나무가 철창 안에 있다. 아이를 못 낳는 부인들이 선비화의 잎을 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하도 많이 따가서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국보 제19호 조사당. 선비화 나무가 철창 안에 있다. 아이를 못 낳는 부인들이 선비화의 잎을 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하도 많이 따가서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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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봉황산 부석사. 일주문으로부터 무량수전까지 가려면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 수많은 계단에는 천왕문, 범종루, 극락으로 들어가는 안양문이 있는데, 극락세계에 있는 소조불상을 만나라면 사천왕의 시험을 거친 다음, 범종루와 안양문 아래 누각으로 몸을 숙여서 들어가야 하는데, 마치 극락세계를 가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위해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문을 넘어가면 말 그대로 누각이 되어서 다른 높이에서 본 여러 사바세계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건축물의 범종루부터 고려시대 무량수전으로 가는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가면 근엄하고 거대한 소조여래좌상을 마주할 수 있는데, 보살들에게 경외심을 자아낸다. 부석사의 묘미는 수많은 인생의 굴곡을 넘어 극락으로 가서 소조여래 아래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안양루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안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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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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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행테마 중앙선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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