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31 11:54최종 업데이트 22.08.3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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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강제동원) 현금화에 관한 결정이 이번 주에라도 나오지 않을까 전망하는 보도들이 적지 않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사건을 다루는 대법원 3부 주심인 김재형 대법관이 9월 4일 퇴임에 앞서 금요일인 2일에 퇴임식을 하게 됨에 따라 그런 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담당 사건을 퇴임 전에 반드시 마무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므로 9월 2일과 4일을 그냥 넘길 수도 있다. 피해자들이 승소 판결을 받아놓고도 또다시 기약 없이 기다리는 상황이 하염없이 계속될 수도 있다.


압류된 미쓰비시 특허권을 현금화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해도, 시간이 더욱 지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특허권 자체가 금전은 아니므로 기준가를 책정하고 감정 평가를 하고 공매를 거치는 각각의 절차에서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 전개에서 나타났듯이 윤석열 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해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현금화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이러저러한 외부적 사유로 절차가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

윤석열 정부는 대법원에 대한 외교부 의견서를 통해 절차를 지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일본 측이 명확히 가해자인 상황에서까지 일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보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일이다.

대법원은 8월 19일까지 이 사건에 대한 결정을 내렸어야 했는데도 기일을 그냥 넘겨버렸다. 만약 이 사건 피해자가 일본인이었고 한국 대법원이 별다른 입장 표명 없이 기일을 넘겼다면, 일본 외무성은 물론이고 한국에 있는 일본대사관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 대법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절차를 지연해 한국인 피해자들을 불리하게 만들었다면, 대한민국 행정부가 나서서 입장을 표명하거나 피해자들을 위로해야 마땅하다. 외교부는 삼권분립 하에서도 미쓰비시에 유리한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한국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그런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법부든 행정부든 대한민국 국기기관이 국민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미세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조짐이 최근 양국 정부 사이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력'이 무엇이었길래

금요일인 지난 26일, 도쿄에서 한·일 국장급 협의가 있었다. 이상렬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강제징용 문제를 중심으로 한일관계 현안들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국내 언론 보도에 따르면, 외교부는 26일 국장급 협의와 관련해 "한일관계 개선 및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된 우리 측 노력을 설명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측이 성의 있는 호응을 보일 필요가 있음을 재차 강조했다"라고 밝혔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에 따라 한국 측에 책임을 가지고 대응하도록 요구했다"라고 회담 결과를 발표했다.

외교부와 외무성의 국장급 협의 결과 요약을 종합하면, 한국 외교부는 한국의 해결 노력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성의를 촉구했고(A) 일본 외무성은 기존의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면서 한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했다(B)고 볼 수 있다. 양측이 각각 자기 입장을 설명하면서 상대방의 성의를 촉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B 부분에 관한 양국 언론의 보도는 대동소이하지만, A와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다. 결이 좀 다른 보도가 <교도통신>에서 나왔다. 국장급 회의 당일인 26일 저녁에 보도된 '정부, 한국의 노력을 인정(政府、韓国の努力認める)'이라는 <교도통신>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기사는 "일·한 두 정부는 26일 도쿄도에서 외무성 국장급 협의를 열고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대해 배상을 명령한 전 징용공 소송 문제를 둘러싼 의견 조정을 꾀했다"라고 한 뒤 국장급 협의 뒤에 외무성 간부가 출입기자단에 했다는 발언을 소개했다. <교도통신>에 보도된 외무성 간부의 발언은 이렇다.

"한국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 외교부는 '우리 측 노력을 설명하면서 일본 측이 성의 있는 호응을 보일 필요가 있음을 재차 강조했다'라고 회담 결과를 밝혔다. 이 설명대로 26일 협의가 진행됐다면, 일본 외무성 간부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사실이 이상해진다.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외무성은 어느 정도이기는 하지만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서 한국 측의 성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외무성은 한국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기자단에 설명했다. 한국 정부의 노력을 칭찬한 셈이 된다. 이는 국장급 협의에서 실제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우리 외교부 국장이 설명했다는 '한국의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한일 외교당국은 26일 도쿄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 배상 소송의 해법을 모색하는 국장급 협의를 개최했다. 이날 오전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국장급 협의에는 이상렬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참석했다. 한일 국장급 협의 참석 위해 외무성을 방문한 이상렬 국장의 모습. 2022.08.26 ⓒ 연합뉴스

 
전반적인 대화 분위기에 관한 <교도통신>의 보도도 눈길을 끈다. 위 <교도통신> 기사는 "일본 측은 사태 수습을 위한 대처 상황에 관한 설명을 한국 측으로부터 받았다"고 보도했다. 외무성 취재 결과를 토대로 한 기사이므로, 이 부분 역시 외무성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외교부는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촉구하는 자리였다고 말했지만, 일본 외무성 쪽이 볼 때는 사태 수습을 위한 대처 상황과 관련해 한국 측 설명을 듣는 자리였다. 그런 설명을 들은 후에 외무성 국장이 '한국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대법원에 의견서를 낸 뒤인 7월 28일, 외교부 당국자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모임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현금화가 이뤄지면) 일본이 거기에 대해 보복을 할 것이라고 저희는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이렇게 하다가는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발언은 듣기에 따라서는 경고가 될 수도 있다. 외교부가 일본 외무성을 그렇게 대했다면 '한국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고 느껴진다'는 반응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는 피해자를 대할 때와 일본 외무성을 대할 때의 외교부 태도가 각각 어떤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이 가해자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가해자인 줄 알면서도,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자국민들이 피해자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입장은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다.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뿐 아니라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기 때문에, 전 세계 누가 보더라도 공정한 위상을 지닐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한국인 입장에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배상 대신 보상이라는 대통령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 때 윤석열 대통령은 배상 대신 보상이라는, 피해자 대신 채권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을 받을 방안을 지금 깊이 강구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피해자가 소송에서는 채권자가 되므로 윤 대통령의 표현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전범기업의 관계가 채권자-채무자 구도에서는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지 않고 채권자로 부르고, 배상을 배상이라 하지 않고 보상이라 부르는 이 상황에서,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는 행정부 당국자들이 피해자들을 챙기고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국가가 자국민들을 외면하는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심화시키는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행정부에 더해 대법원까지 피해자들을 외면한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이 더욱 서글퍼지게 된다. 대법원만이라도 피해자 보호에 적극성을 보여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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