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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모르고 오르는 물가에, 역대 최강이라는 태풍 '힌남노'의 북상까지.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라는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2022 추석 풍경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말복이 지나면서 미세하게 달라진 공기가 여름의 끝자락을 감지하게 한다. 막바지 여름 햇볕은 과일들의 단맛을 채우고, 색깔을 진하게 만든 뒤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날 채비를 한다.

24절기는 계절이 바뀌는 징조를 기가 막히게 감지해낸 통계의 결과다. 코끝과 피부로 느끼는 계절의 징후가 전과 달라졌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마다 이름을 붙여놓은 경험적인 지혜의 산물이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부터 농부들은 24절기가 보내는 신호를 바탕으로 밭을 갈고 모를 심었다.

최근 몇 년간 이런 24절기의 정석이 사라졌다. 예측불허의 계절이 오고 있다. 인간들은 기후 대전환, 기후 변화의 시기에 준비없이 내던져졌다. 변화는 순조롭게 오는 법이 없다. 희생을 요구하고 대가를 치르게 한다. 계절을 의지해 사는 농부들이 그 기후 변화의 직격탄을 최전선에서 맞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부여 농가를 둘러봤다. 

가물다 한번에 내린 비... "작황이 30%밖에"
 
일반 대추보다 크고 아삭한 식감과 고당도를 자랑하는 부여 왕대추
▲ 부여 왕대추 일반 대추보다 크고 아삭한 식감과 고당도를 자랑하는 부여 왕대추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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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에 왕대추꽃이 엄청나게 펴서 수확량이 좋을 줄 알았더니만 수정이 제대로 되덜 안 혔어. 지난 달에는 물난리가 나서 하우스에 물이 차서 수분 조절도 틀렸고 해가 갈수록 농사 져먹기가 쉽덜 안 혀(쉽지 않아)."

부여 규암면에서 벼농사와 하우스 6동에 왕대추 농사를 짓는 농부 박아무개씨의 넋두리였다.

최근 부여군 농민들에게 인기 있는 농작물 중에 하나인 왕대추는 사과처럼 아삭거리는 식감과 고당도를 자랑하는 과일이다. 대추가 말린 과일계의 대표 주자라면 왕대추는 신품종으로, 날로 먹을 수 있어 인기가 있는 과일이다. 비가림 시설에서 재배하며 수분 조절과 일조량이 맛과 수확량을 좌우하는 필수 요건이다.

"대추는 6월 초에서 7월 초까지 꽃이 세 번에 걸쳐서 펴. 올해는 그 시기부터 날씨가 좋질 않았잖여. 가물다가 비가 한꺼번에 내려서 벌들이 일할 시기를 놓친 겨. 작황이 작년에 비해 30%밖에 안 되는 것 같여."

과일들이 몸집을 불리고 익어갈 시기에 내린 폭우는 수박과 멜론 재배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안겼을 뿐만 아니라 왕대추 나무 생육에도 지장을 줬다.
 
포도밭이 물에 잠기기는 했지만 재빨리 뻘 흙을 걷어내고 수확을 해서 당도를 보장하는 포도밭. 캠벨과 샤인머스캣을 구입해서 식구들과 먹어봤는데, 당도가 아주 좋았다.
▲ 부여 은산 포도 포도밭이 물에 잠기기는 했지만 재빨리 뻘 흙을 걷어내고 수확을 해서 당도를 보장하는 포도밭. 캠벨과 샤인머스캣을 구입해서 식구들과 먹어봤는데, 당도가 아주 좋았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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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이 지나서 내리는 비는 농사에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는 쓸데없이 내리는 비랑게. 과일들의 당도만 떨어지게 한다니께."

부여 은산면과 규암면 일대에서 일어난 폭우로 농산물의 정상적인 수확에 가장 많은 차질이 생겼다. 은산면은 포도 재배 농가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부여 은산면에서 청양으로 나가는 국도변에는 포도 재배 하우스들이 밀집해 있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요즘 같은 수확철이면 포도밭에서 직접 따서 파는 포도가 인기가 많다. 명절을 앞둔 이 시기에는 과수원 옆에서 파는 직거래로 농가들이 재미를 봐야 한다.

"소용 읎슈. 지난번 폭우로 포도밭이 물에 잠겨었잖유. 물이 빠지긴 했어도 뻘 흙이 뿌리를 덮어서 자원봉사자들이랑 외지에 사는 가족들이 와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만큼 수확이나 했겄슈. 1년 고생한 게 헛고생이 될 뻔했슈."

인근 지자체의 자원봉사 단체들이 부여로 모여들어서 도움이 필요한 농가들을 지원해준 덕분에 포도 재배 농가들은 한시름을 놨다. 밤나무를 심은 산은 산사태가 나서 밤나무 자체가 유실됐지만 비교적 평지에 심은 포도나무에는 피해가 적었다.
 
올해 천재지변을 당한 부여 농민들을 돕는 차원에서도 부여 농산물에 대한 변함없는 애용을 부탁한다.
▲ 부여 은산면 포도밭 직거래 판매장 올해 천재지변을 당한 부여 농민들을 돕는 차원에서도 부여 농산물에 대한 변함없는 애용을 부탁한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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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기 있는 샤인머스켓을 심어서 올해 첫 수확을 앞둔 은산면의 어떤 농가는 지난 폭우로 포도밭에 물이 차오르던, 보고도 믿기지 않은 순간을 평생 못 잊을 것이라고 했다. 귀농 3년 차로 포도 재배로 인생 2막을 다시 시작한 한 농가는 현실 같지 않은 천재지변 앞에서 눈물을 흘릴 틈도 없이 포도를 따러 과수원으로 나갔다고 했다. 

추석이 지나면 포도 가격을 제대로 받기가 어렵기도 하고 수요도 줄기 때문에 명절 전에 팔아야 했다. 창고는 부서지고 집 앞마당까지 찬 펄 흙을 그대로 놔두고, 포도부터 땄다고 했다. 인터뷰 와중에 맛을 보라며 선뜻 한 송이를 건네는 농민 앞에서 덥석 포도를 받아먹기가 미안할 정도로 구구절절한 사연이었다. 

'힌남노' 꼬리가 치고 간 과일밭 
     
멜론 농가에게 추석은 그야말로 대목이다. 멜론 농사에 들어간 비용을 한 번에 회수하고 목돈을 챙길 수 있는 호기였다. 선물용으로 대량 구매를 원하는 고객층을 각 농가들마다 확보하고 있었다. 추석 무렵에는 별도의 수수료가 들어가지 않는 직거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지에서 멜론을 수확해서 바로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는 일은 즐거운 노동이었다.

과일 농사는 탐스러운 열매를 수확해서 포장할 때, 비로소 보람이 느껴지는 일이다. '한번 입에 넣으면 멈출 수 없는 맛'이라는 고객들의 찬사를 들을 때 농부로서의 자존감이 살아난다. 해마다 부여군 굿뜨래 브랜드의 멜론은 가락동 농수산 시장에서 타 지역의 멜론보다 상품성을 우수하게 쳐줬다.
 
부여군에는 메론 재배로 특화된 농가들이 많다. 올해는 폭우 피해를 입은 은산면 외의 지역에서 재배된 메론은 여전히 맛이 좋다.
▲ 부여군 남면에서 재배한 메론 부여군에는 메론 재배로 특화된 농가들이 많다. 올해는 폭우 피해를 입은 은산면 외의 지역에서 재배된 메론은 여전히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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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해는 전 국민의 동정을 받을 정도의 폭우 피해를 입은 부여군의 멜론은 당도를 의심하는 상인들의 눈총부터 받고 있다고 한다. 폭우 피해는 은산면에서 많이 입기는 했지만 멜론은 부여 전 지역에서 고르게 재배하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은 농가가 더 많다. 싸잡아서 보는 시선이 부여군 전 농가를 향하는 통에 멜론 농가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농부들의 축구공 만한 멜론을 딸 때마다 느끼던 손맛과 보람은 해마다 반감되고 있다. 해가 갈수록 농사법은 일취월장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기후변화에 어떤 천재지변이 도사리고 있다가 툭 뛰쳐나올지 알 수가 없는 통에 농사를 접어야 할지 매번 고심하게 된다. 농부들에게 과일 농사는 애증의 산물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포포나무(연노란색~갈색의 과실이 나는 나무. 열매는 바나나, 망고, 파인애플과 비슷한 맛을 낸다고 알려져 있다)의 성장 과정을 때때로 사진으로 올리던 농부가 있었다.

북아메리카가가 원산지인 포포나무를 심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며 이끌어가는 그의 열정에 댓글이나 마음의 응원을 보내주곤 했었다. 하루종일 어디로 튈지 모른다며 전 국민을 긴장시키던 태풍 '힌남노'의 꼬리가 그의 포포나무 농장을 치고 지나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난 6일 그는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놈의 태풍이 그냥 가기 싫어서 우리집 포포 열매를 다 따놓고 갔네유. 설익은 것도 따고 정말 미워유. 나무도 부러지고... 그래도 나는 살아있으니 감사해야쥬."
 
북미가 원산지인 포포나무 열매. 다이어트, 피로회복, 항암 효과가 있는 과일로 
아직은 재배가 일반화 되지는 않았다.
▲ 포포나무 열매 북미가 원산지인 포포나무 열매. 다이어트, 피로회복, 항암 효과가 있는 과일로 아직은 재배가 일반화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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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이랄까? 긍정적 에너지라고 해야 할까? 21세기를 사는 농부의 자세와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던 전통적인 농부의 자세는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기후변화에도 자생력을 길러야 하고 새로운 농법에도 재빨리 적응해가야 하는 농부의 길은 시대를 막론하고 멀기만 하다.

태그:#부여 멜론, #부여 왕대추, #포포나무 , #부여 은산 포도, #부여 농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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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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