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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십여 년 전쯤 집 앞에 영어 간판을 단 유치원이 있었다. 이름하여 '리틀 아메리카(Little America)'. 이름뿐만 아니라 건물 벽에도 성조기를 본뜬 그림이 대문짝만하게 그려져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그즈음 전국적으로 영어 유치원 바람이 불었다. 어릴 때 배울수록 외국어 학습에 효율이 높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연구 결과가 유행처럼 방송을 타던 시절이었다. 당시 원어민 발음을 위해 혀를 교정하는 시술도 성행한다는 자못 엽기적인 뉴스도 있었다. 

우리말도 서툰 대여섯 살 안팎의 아이들에게 종일 영어를 사용하게 하는 게 과연 온당하냐는 질문이 되레 손가락질받던 때이기도 했다. 이른바 '이중언어 사용자(Bilingual)'로 키우려면 태교 때부터 영어를 시작해야 한다고 호들갑 떨었다. 가히 영어가 국어였고, 국어가 영어였다.

모든 시민들이 영어를 배울 필요가 있나
 
박형준 부산시장과 하윤수 부산시교육감이 지난 9일 영어상용도시 추진 관련 업무협약을 맺고 있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하윤수 부산시교육감이 지난 9일 영어상용도시 추진 관련 업무협약을 맺고 있다.
ⓒ 부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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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미국'임을 공공연히 뽐내던 유치원이 떠오른 건, 최근 부산시가 영어 상용화 도시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다. 영어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건 박형준 부산시장의 공약이었다. 이는 2030년 세계엑스포 유치를 위한 준비의 일환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내실화하겠다는 거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다만, 코흘리개 유치원생부터 초중고, 대학생과 장삼이사 시민들까지 영어를 배우고 실생활에서 활용하도록 지방정부가 유도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자칫 시민들에게까지 '영어 스트레스'를 떠안길 수도 있다.

시민의 자발성이 배제된 상명하달식의 정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보여주기식 정책으로 전락하거나 '배가 산으로 가는' 부작용만 양산된 채 흐지부지될 게 뻔하다. 과거 전국 각지에 경쟁적으로 생겨난 '영어 마을'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 이젠 궁금해하는 이들조차 없다.

부산시는 외국인이 방문했을 때 여행과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도 했다. 과문한 탓인지, 외국어 번역기가 스마트폰의 기본 앱으로 깔린 요즘 세상에 영어가 서툰 주민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는 외국인은 거의 없다. 번역기 앱에선 영어뿐만 아니라 웬만한 외국어를 완벽하게 통역한다.

부산시뿐만 아니라 전국의 도시 대부분은 이미 '영어 친화적 환경'이다. 불야성을 이루는 도심 번화가의 간판 중 우리글과 말로 된 건 거의 자취를 감췄다. 굳이 찾는다면, 영어 발음을 우리글로 적은 게 전부다. 가게의 이름도, 거기서 파는 물건의 이름조차 죄다 영어다. 

되레 시민들이 일상생활에 적잖은 지장을 받고 있을 지경이다. 얼마 전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한 어르신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액체형 세안 비누를 찾고 있다는 그가 내게 보여준 제품 겉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Daily Moisture Therapy Facial Cream.'

얼굴에 사용하는 보습 크림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다시 진열대에 놓으시면서 씁쓸하게 웃으셨다. 분명 우리 기업이 만든 내수용 제품인데도, 굳이 영어로 적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 나 역시 헛웃음이 나왔다. 더욱 황당한 건, 그 옆에 나란히 적힌 '데일리 모이스처 테라피 페이셜 크림'이라는 '번역문'이었다. 이건 과연 영어일까 우리글일까. 

이따금 찾아오는 외국 관광객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머지않아 영어가 모국어를 대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오는 요즘이다. 어쩌다 한 번, 외국인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엑스포 따위에 연연하기보다 평범한 시민의 일상생활을 보듬는 시정이 백만 배는 더 중요하다. 

부산시의 맹목적인 '영어 사랑'은 학교 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당장 2030년까지 관내에 500여 개의 어린이를 위한 영어 전용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산에 거주하거나 여행 온 외국인과 아이들이 어울려 책을 읽으며 놀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말하자면, '부산형 영어 마을'인 셈인데, 언뜻 '영어 전용 키즈 카페'를 지방정부가 나서서 운영하겠다는 발상 같기도 하다. 과연 얼마나 취지를 살릴지는 모르지만, 영어가 '출입증' 구실을 하는 곳이어선 곤란하다. 아이들에게조차 영어가 하나의 외국어가 아닌 '권력'으로 여겨질 테니 말이다. 

이는 그러잖아도 좀체 수그러들 줄 모르는 영어 교육열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 부산시교육청이 함께 추진하는 사업이니만큼 학교에서 영어 교육의 비중이 커지게 될 건 명약관화다. 듣자니까, 영어 사교육 시장도 '재도약'을 위한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알다시피, 영어 영역이 수능에서 절대평가로 전환되면서 대입에서의 비중이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다. 수능의 열쇠는 수학 영역이 쥐고 있다는 건 대학 입시의 불문율이다. 찬바람 부는 영어 사교육 시장이 이번 부산시가 앞장서 추진하는 영어 상용화 도시 조성 사업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전히 압도적인 '영어의 지위' 
 
영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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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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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영어 교육이 강조될수록 상대적으로 우리글이 홀대받는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밴드웨건 효과(Band Wagon Effect)'가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 영어 사교육 시장이다. '밴드웨건 효과'는 다수의 선택에 편승해 따라가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과거 이명박 정부 출범 초 영어 교육이 강조되었을 때, 아이들 사이에서 문고판 영어 소설책 읽기가 유행이었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해졌지만, 쉽게 풀어 쓴 고전과 해리포터 등 판타지물이 도서관의 맨 앞자리 차지였다. 당시 교육부총리의 '오륀지' 발언이 희화화하며 논란이 벌어졌지만, 학교 교육에 주는 신호는 강력했다.

대입에서 부침을 겪었을지언정 우리 사회에서 영어의 지위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정부가 나서서 영어 교육을 강조하지 않아도 오매불망 '원어민(Native-Speaker)'을 꿈꾸는 사람이 차고도 넘친다. 과거 우리가 일본이 아닌 미국의 식민지였다면 더 좋았을 거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다. 

정녕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영어 실력이 아니라 우리글의 문해력이다. 박형준 시장의 눈엔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형편없어 보이는지 몰라도, 현직 교사인 내가 보기엔 정반대다. 국어의 어휘력에 견준다면, 요즘 아이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미국인으로 느껴질 정도다.

믿기 힘들겠지만, 다음의 따옴표 친 단어의 뜻을 모르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 문제에 관한 질문이 있다고 해서 가보면, 십중팔구 문제에 쓰인 단어의 의미를 물어온다.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정답을 맞히기란 난망한 일일 테다.

"미군정의 '청사'로 활용되었다."
"다음의 지문을 통해 '유추'해보자."
"사회로 고스란히 '환원'되었다."
"유용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고등학생인데다 나름 공부깨나 한다는 아이들인데도 그렇다. 더욱 난감한 것은, 그들 단어를 영어로 풀어 설명하면 더 쉽게 이해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청사'보다 'Office Building'이, '환원'보다 'Return'이 그들에게 더 익숙하다. 한 아이는 '리턴했다'고 하면 쉬울 텐데 왜 굳이 환원되었다고 쓰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환원'의 의미를 알기 위해 한영사전을 뒤져 'Return'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현실은 그로테스크하다. 기우라고 일축하기 전에, 영어 상용화 도시 조성 사업을 두고 '제2의 오륀지 발언'이라는 시민단체의 지적을 부디 부산시가 성찰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 해도, 박형준 시장에게 '이명박 시즌 2'라는 조롱이 그리 달갑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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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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