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19 05:10최종 업데이트 22.09.19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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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분위기에 취해 가상의 눈들은 멋진 유화까지 보여주곤 한다. ⓒ 김승재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신 분 중에서는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다른 장애인에게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중증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서 장담하는데, 만약 나를 포함한 장애인 중 누군가에게서 조금은 과장된 뭔가를 느꼈다면, 그건 나름 치열한 노력의 산물일지언정 결코 거짓이나 위선의 표현은 아니다.

성경을 펼쳐봐도, 부처님 말씀에 귀 기울여봐도, 시인의 노래를 들어봐도, 대문호의 멋진 글을 읽어봐도, 인간의 삶은 즐겁거나 행복하다기보다 힘겹고 괴로운 경우가 많다. 그래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런 힘겨움을 이겨내고 고통에서 벗어날 때, 벅차도록 가슴 가득 밀려오는 기쁨과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나와 '너'가 만나 '우리'를 이룰 때만 가능한 것이리라.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인간이다. 그래서 산다는 건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거기에 한두 가지가 더 얹혔다. 그래서 많은 경우 5단계 감정 변화 중 4단계 '우울'이 기본값이 돼 버렸다. 그럼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비장애인들보다 좀 더 힘을 내고, 좀 더 크게 기합을 내지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3단계 '타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말이다.

딱 그런 이유뿐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이런 이유만 이해하면 비장애인의 눈에도 장애인이 똑같아 보일 것이다. '왜 이렇게 오버하지' 느껴진다면, '좀 더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하구나' 생각하고 들어주면 고맙겠다.

자, 아래와 같은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할지 상상해 보자. 잠깐 눈을 감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족, 아니면 친구,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이 앞에 있다. 정말 즐거운, 아니면 정말 심각한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내게만 하얀 장막이 둘러쳐져 있다. 어쩌면 까만 장막일 수도 있는데, 하여튼 그 장막에는 아무 무늬도 특징도 없다. 내 눈길이 닿는 곳은 어디라도 그냥 온통 하얗거나 까맣다. 장막 너머 어렴풋이 빛이 느껴지고, 뭔가 아른거리는 것 같지만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상대의 표정은 물론 몸짓도 전혀 볼 수가 없다. 주변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마주 앉은 상대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조명이 밝은지 어두운지, 주변 공간이 어떻게 장식돼 있는지, 심지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그런데 그 장막 너머에서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때론 너무도 궁금해 열심히 눈길을 돌려보지만, 확인할 수가 없다. 목소리도 들려온다. 내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무슨 몸동작이 있었는지 모두가 웃거나 놀라지만 나는 웃을 수도 놀랄 수도 없다.

어떤가? 원활한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솔직히 나는 그렇지 못했다. 처음 나는 대화는커녕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우울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지금 내 시력은 뿌옇고 아주 흐릿한 뭔가가 있다는 것만을 느낄 수 있는데, 사실 그것도 매우 부정확하다. 앞서 든 예처럼 지나치게 불투명한 장막으로 온통 둘러싸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떤다. 수다? 대화도 불가능하다더니? 그렇다. 그래서 그걸 이야기하고 싶다.

내게서 별빛과 더불어 아름다운 밤 풍경까지 빼앗아 간 망막색소변성증은 내 시야까지 조금씩 갉아 먹더니 마침내는 눈에 비친 세상을 온통 뿌옇고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마치 빛이 바랜 너무 오래된 사진처럼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시나브로 색을 잃어가면서 희미해졌고, 수없이 그어지던 실금까지 흐려지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잔상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새하얀 웨딩드레스 아내의 모습도, 깔깔대며 달려오던 쌍둥이 딸과 아들도, 잔잔한 미소 속 부모님과 친지들도, 언제나 껄껄 웃던 친구들도 모두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우울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았고,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부정과 분노에서 벗어나 이제 어느 정도 타협했다 싶었는데, 어느새 나는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래도 40년 넘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름대로 삶의 쓴맛, 단맛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우울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반성도 해보고, 각오도 새로 다졌다. 위로와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긍정적 마인드로 나를 극복하려 애써 보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점잖은 노력만으로는 안 됐다. 조금은 미치광이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를 우울의 수렁에서 끄집어낼 뭔가 아주 센게 필요했다.

난 스스로에게 외쳤다. '그렇게 바보, 멍청이, 쪼다같이 살려면 차라리 그냥 죽어버려라.' '쪽팔리지도 않냐? 딸 아들이 보고 있는데, 그렇게 질질 짜기만 할 거냐?'

다른 장애인에게라면 절대 못 할 소리겠지만, 나는 나란 장애인에게 마구 퍼부었다. 보이지도 않는 거울 속 나를 노려보며 욕도 해보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래고래 악다구니도 써 봤다. 이러다가 정말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즈음, 내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내가 나타났다.

새로운 나는 '너'를 찾았고 '우리'를 만났다. 여전히 쭈뼛쭈뼛 망설이고, 괜히 짜증도 내고, 생뚱맞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너'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미소를, 아니 조금은 과장되게, 진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얼굴을 되찾았다.

그 후 모든 게 너무 쉬워졌다. 정말 황당했다. 아니 혼자 난리를 치던 내가 너무 창피해서 우울의 늪으로 다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너'와 '우리'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고, 그들의 따뜻한 공감의 손길은 벌써부터 나를 향해 있었다.

지금은 괜찮은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가상의 눈이 완성한 나만의 영화 속 주인공들 ⓒ 김승재


거짓말처럼 나에게서 벗어나 '너'를 만나자마자 뿌옇기만 한 내 시야에 다시 모든 게 나타났다. 하나둘, 더 많은 '너'를 만나면 만날수록 더 많은 모습이 나타났고 그것은 '우리'와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보이지 않는 눈을 의식하면 다시 뿌옇고 흐릿해지기는 하지만, 다시 '너'와 '우리'와의 만남을 즐기게 되면 진짜 생생한 모습들이 나타난다.

인간은 시각을 통해 외부 자극의 대부분을 판단하고 저장한다. 그래서 직접 본 것은 물론 듣거나 읽은 것도 가능한 한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어 기억한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가 좀 더 특별했는데, 보일 때도 나는 마치 동영상을 재생하거나 눈앞에 사진을 펼쳐 놓은 것처럼 어떤 일이나 장면을 추억하곤 했다.

내가 새롭게 살게 된 이 세상을 인정하고 새로운 내 눈들과 타협을 하자마자 내 기억 속 수 많은 이미지들은 마치 내가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주고, 동영상을 재생해 줬다. 물론 실제와는 다를 것이고, 때론 전혀 엉뚱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대화는 물론 수다까지 떨 수 있게 되었다.

카페에 간다면 이제 나는 내가 앉은 곳을 중심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테이블과 의자 심지어 벽도 만져서 느껴본다. 커피를 만드느라 열심인 바리스타의 움직임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참 이야기에 빠져 있는 주변 사람들 말소리와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드는 문소리도 들어본다. 조명이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도 느껴보고, 카페 안에 가득 고인 커피 향도 맡아본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면 동행한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럼 거짓말처럼 내 앞에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거기에 대화 상대까지 멋지게 끼워 넣고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면 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을 가도, 바다를 가도 마찬가지다. 영화관이나 박물관, 심지어 미술관도 같은 방법으로 갈 수 있다. 물론 진짜 눈으로 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보여줄 영화를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세상과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기 위한 도구로서, 나만을 위한 영화를 촬영하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것뿐이니까.

그래서 지금은 진짜 보이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괜찮은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아, 또다시 허풍을 떤 것인가? 진짜 엉뚱한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정말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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