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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두의 장례식을 마치고 봉분 앞에 선 가족들
 서병두의 장례식을 마치고 봉분 앞에 선 가족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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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 6구경찰서(청주경찰서) 사찰과가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저격당한 서병두가 왜 버드나무 앞에 쓰러져 있었을까?"라는 사찰과장의 의문에 "피해자가 범인을 잡으려고 쫓아간 것 같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관련기사 : '면도칼' 우익청년 부단장, 좌익 총구에 사망하다 http://omn.kr/20rcr)

그렇다.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 부단장 서병두는 1948년 4월 9일 불청객에게 저격당하고 숨졌다.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졌지만 경찰과 대동청년단은 범인을 좌익세력으로 추정했다. 사건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제4관구경찰청(현재의 충북도경찰청. 아래 충청북도 경찰국) 청장 김상봉과 사찰과장 이영우, 사찰 분실장 한희석은 좌불안석했다.

전향자

"출동!" 대동청년단 사무실 단원들이 정신없이 뛰었다. 대동청년단 정보부에 청원군 낭성면 산성리(현재 청주시 산성동)에 20명으로 추산되는 빨치산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가 접수된 것이다.

하지만 빨치산들은 이미 단양군 소백산으로 이동했다. 실망한 대원들이 명암약수터를 경유해 명암저수지에 다다랐을 때, 한 청년이 생을 포기한 듯한 눈으로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충북도경 사찰과 형사 박계택이 그에게 다가가 청년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휴, 실은 제가"라는 말로 입은 연 청년은 남로당원이었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 문화동 출신 윤민전(가명)은 빈농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마치고 부모님 일을 돕다 해방을 맞아 청주로 온 이다.

특별한 생활근거지가 없던 그는 우연히 좌익진영과 접촉하다가 1946년 12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입당했다. 정력적인 활동이 인정된 그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지부'에서 상근하게 됐다. 미군 철수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지만, 이 점이 남로당의 의심(?)을 사 임무없이 대기상태로 있었다. 이후 겨우 소백산지구 유격대장으로 발령 났다.

윤민전은 자신이 속한 조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판단해 명암저수지에서 극단적 선택을 결심했다. 박계택은 이런 윤민전을 설득해 경찰에 협조하면 신원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윤민전을 끄나풀(정보원)로 활용해 서병두를 암살한 범인을 잡겠다는 심산이었다. 끈질긴 설득으로 윤민전은 전향을 결심했다.

족청 단복을 입은 남로당원

서병두의 암살범으로 추정되는 남로당원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지트로 잠입해야 했다. 당시 남로당 아지트는 충북 청주시 영운동에 있는 김상수의 풍로공장이었다.

김상수는 원래 남로당 경상남도 진주시 위원장이었지만 수배령을 피해 청주로 왔다. 그는 와세다대학교를 나와 한국전쟁 전 청주에서 활동하다가 인공시절 청주시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청주근세60년사화>에는 김상주로 기록돼 있으나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를 역임한 김동수는 김상수라고 증언한 바 있다.

김상수 집에서 윤민전은 동향 출신의 최시동을 만났다. 어릴 때 같은 마을에 살았던 최시동은 종종 남로당원이나 좌익들이 신분위장을 위해 가입하는 조선민족청년단의 감색 단복과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최시동이 소지한 권총은 미제(美制) 45구경으로 대동청년단 부단장 서병두와 괴산군 국회의원 후보 김영규의 목숨을 앗아간 총이었다.

"지금의 정세에서 공산주의는 역사의 순리이다. 민족반역자들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김영규가 좋은 예이다. 나는 반역자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 파견되었다"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최시동의 눈빛이 매서웠다.

사실 최시동은 1946년 2월 월북해서 8개월간 유격훈련 과정을 이수하고 남파되어 충북지역에서 활동한 이다.(편찬위원회, 1985, <청주근세60년사화>) 그런 이의 입에서 김영규 이야기가 나오고 45구경 권총을 보자 윤민전은 서병두의 암살범이 최시동임을 직감했다.

엿장수와 나무꾼으로 위장

윤민전은 박계택에게 최시동에 관한 정보를 보고했다. 대동청년단과 충청북도 경찰국은 긴급하게 움직였다. 박계택은 엿장수로 충청북도 경찰국 사찰과 안상호 형사는 나무꾼으로 오인성 형사는 농부로 위장해 김상수가 운영하는 풍로공장 주변에서 잠복했다.

윤민전은 풍로공장 안의 신미숙(가명) 거처로 갔다. 충북여성동맹 활동가였던 신미숙은 김상수 풍로공장을 아지트로 활동하던 좌익활동가였는데, 윤민전과 연인 관계였다. 윤민전이 전향하자 그녀도 전향해 경찰 끄나풀을 했다.

1948년 7월 13일 오후 2시 윤민전이 신미숙 집의 방문을 열자 중의적삼을 입고 밀짚모자를 얼굴에 덮고 낮잠을 자던 최시동이 있었다. 문을 다시 닫은 윤민전은 신미숙에게 "냉수 한 대접만 주시오"라고 했다. 신미숙이 부엌에서 냉수를 가져올 때 방안에서 "누가 왔소?"라는 음성이 들렸다. 방문을 열고 문턱에 걸터앉은 윤민전을 보고서야 최시동은 안심했다.

팽팽히 긴장된 공기를 깨뜨린 것은 집주인 신미숙이었다. "중앙당에서 김상수 동지에게 명령이 하달되었소. 윤 동무가 빨리 전달하시오" 윤민전이 움직이려는 찰나에 최시동이 "잠깐. 내가 나가거든 연락하시오"라며 제지했다. 그러자 신미숙이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김상수 동지에게 전달하는 내용은 시급을 요하는 일이오" 결국 윤민전이 풍로공장을 빠져나와 주변에 매복해 있던 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체포조는 충북 경찰국과 영운지서에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지원병이 도착한 직후 최시동이 풍로공장을 나왔다.

"꼼짝마. 움직이면 쏜닷!" 날쌔게 달리는 최시동보다 사방에 매복해 있던 경찰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최시동은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꺼내 보지도 못했다. 대퇴부에 권총을 묶어 놨기 때문이었다. 추격전 끝에 최시동이 검거됐다. 1948년 우익청년 부단장인 서병두가 저격된 지 95일 만이었다.(전창식, <월간충청> 1977년 3월호 '서병두 암살사건')

조각칼을 품은 청년
 
서병두 암살범 최시동이 재판받은 청주지방법원 터(우측의 현대극장 주변)
 서병두 암살범 최시동이 재판받은 청주지방법원 터(우측의 현대극장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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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을 자백한 최시동은 1949년 청주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았다. 최시동의 공판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법정 입구는 인산인해였다. 

그런데 법정에 일찌감치 들어간 한 청년의 모습이 수상했다. 법원 경계를 서고 있던 청주경찰서 한 형사의 눈에 그 모습이 포착됐다. 청년의 소지품을 확인해보니 끝이 날카로운 조각칼이 나왔다. 서병두의 장남 서정식(1929년생)이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으로 최시동이 법정에 입장할 때 찌르려고 했던 것이다.

스무 살의 청년이 이렇게 행동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인 서병두가 사망하기 몇 시간 전 서정식은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 사무실에 들러 "한약 다려놨으니 일찍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가슴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경찰 조사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최시동은 1948년 4월 10일 서병두의 영정이 차려진 상갓집에 와서 조문하고, 밤을 지새고 장지까지 따라왔다. 아버지가 죽기 전부터 장례식 때까지 최시동에 의해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했다니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1949년 6월 15일 있었던 제1회 공판 이후에 1950년 5월 13일 선고공판에서 판사는 사형을 선고했다. 최시동의 항소로 재판은 서울지방법원으로 이관됐고, 그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이 서대문형무소를 개방했고, 최시동은 7월 13일 청주로 내려왔다. 검거된 지 만 2년 만의 귀향이었다. 청주내무서장(현재의 청주경찰서장)을 맡은 그는 자신을 검거한 박계택과 형사들의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후퇴한 상태였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박계택의 아내 이일남(당시 27세)만이 붙잡혀 청원군 낭성면 산성리에서 학살당했다. 최시동의 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해 7월 29일 미군기의 청주 시내 폭격 때 청주경찰서가 파괴됐는데, 이때 최시동은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가고 우측 늑골 절골상을 입었다. 최시동이 검거될 당시 남로당 아지트를 운영하던 김상수가 인공시절 청주시 인민위원장을 맡아 최시동을 긴급히 도립병원(당시 인민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치료받게 했으나 끝내 눈을 감았다.

서병두의 장남 서정식은 현재 구십의 나이가 넘도록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에게 필요한 건 "당신의 아버지는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와 위로 아닐까.
 
서병두가 암살된 터 앞에 선 서정식(서병두 아들)
 서병두가 암살된 터 앞에 선 서정식(서병두 아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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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전향, #대동청년단, #사찰과, #남조선로동당,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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